100화. 런 투 유
(100/110)
100화. 런 투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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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런 투 유
2022.11.14.
“내가 직접 북부 왕국으로 가서 로제트를 만나는 수밖에 없겠어.”
“예? 보스, 아니 폐하께서요? 안 됩니다, 그건!”
“급한 사람이 가야지 별수 있나.”
“이제 정보 길드의 보스도 아니시고 방탕 황자도 아니십니다. 예전처럼 아무 데나 막 다니실 수 없다고요.”
“보고 싶은 사람도 못 보는 황제, 개나 물어 가라지.”
플록스가 펄쩍 뛰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정말로 물어 가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귀족들은 아직도 간을 보고 있을 겁니다. 황권이 공고해지기 전까지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런 플록스를 유심히 보던 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경이 황좌에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런 농담 마시라니까요. 여하튼 당분간 황궁을 벗어날 생각은 마십시오.”
“그럼, 로제트를 내 눈앞에 데려오든가.”
“허, 갑자기 사춘기 소년이라도 되신 겁니까?”
“코흘리개 어린애라고 할 줄 알았더니. 황제라고 대우해 주는 건가?”
“좋으십니까? 저도 두 분이 하루빨리 만나시길 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입니다. 레이디가 아닌 황후는 생각할 수도 없고요. 하지만 당장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기다리는 수밖에는.”
“있다면?”
“예? 뭐가 있습니까?”
“방법 말이다. 개들에게 황위인지 개뼈다귀인지를 내어주지 않고도 로제트를 만나러 갈 수 있는 방법.”
* * *
뷰글라스와 시아는 하말린으로 돌아갈 날을 꼽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의 부탁으로 얼결에 가담하게 된 전쟁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 다행히 황위 탈환에 성공했고, 자신들의 목도 무사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으니 아마도 작위와 포상이 내려오겠지? 작위는 됐고, 전부 돈으로 바꿔 달라고 해야지.
그 돈이면 하말린으로 돌아가 슬슬 취미나 즐기면서 여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을 거야.
부부는 그와 같은 꿈에 부풀었다.
새로운 황제의 부름을 받았을 때도, 포상에 관해 논의하려는 것이겠거니 짐작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황제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말이었다.
“부탁이 있소.”
잘 부탁드려야 할 건 우리인데? 폐하께서 대체 무슨 부탁을 또?
“경은 원래 뛰어난 배우가 아니오?”
“과찬이십니다. 그저 완벽을 추구하며 오늘도 노력하는 평범한 배우일 뿐입니다.”
“그런 성실함이 참 대단하오. 배역도 가리지 않겠지?”
“그럼요. 아무리 하찮은 단역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지요. 엑스트라도 자기 인생이라는 연극에서는 모두 주인공이 아니겠습니까.”
“멋진 말이오. 그래서 짐은 경같이 훌륭한 배우가 이 하찮고 귀찮은 배역을 마다하지 않고 성심껏 연기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소.”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엔 황제 역이오.”
* * *
“폐하도 참 잔인하십니다.”
“보스라고 부르라니까. 시아에게 뒤집어씌우고 쫓아온 네가 할 소리는 아닌데?”
“그럼 폐, 보스를 혼자 보냅니까. 저라도 뒷바라지를 해야지.”
진은 황궁을 벗어나 북부 왕국으로 갈 수 있는 묘안으로 환각 버섯을 떠올렸다. 예전에 뷰글라스를 로제트로 보이도록 만든 그 신기한 버섯.
황제 역할은 뷰글라스가, 수석 보좌관 역할은 시아가 떠맡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크게 놀라서 거부하려 했지만, 진의 협박과 회유에 결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레이디 때야 그저 전원생활을 즐기면 됐지만, 황제라면 정무에 관한 여러 결정도 내려야 할 텐데 제가 어찌 감히.」
「경의 눈에 짐이 그대와 달라 보이나? 우리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아니, 경이 더 나을지 모르지. 자신을 믿어. 경이 하는 말이 곧 내 뜻이다.」
「저도 저지만, 아내는 제국어가 아직도 서툰데…….」
「괜찮다. 종이와 펜을 들고 뭔가 끄적거리는 척만 하면 된다.」
「금방 돌아오실 거지요?」
「최대한 서두르겠지만, 만일의 경우엔 그대가 계속 황제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런 무서운 말씀 마십시오. 레이디와 함께 얼른 돌아와 주십시오.」
「정 힘들면 말보르크 백작, 아니 공작에게 황위를 넘기고 도망가는 방법도 있고. 밤비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니 연인인 공작이 어떻게든 책임을 지겠지.」
갑작스런 날벼락에 황당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평생 동안 몇 배로 갚겠다’며 억지로 감사 인사를 안긴 후, 진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북부 왕국으로 향했다.
유랑 기사로 신분을 위장하고서.
신분이 들통날 수 있는 이동 마법은 피하고 대신 말들에게 강화 포션을 먹여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국경을 넘을 무렵엔 체력이 약한 플록스는 실신하다시피 해 짐짝처럼 실려 갔다.
그렇게 한 마리 괴물처럼 질주하여 진은 마침내 로제트가 지내고 있다는 집에 당도했다.
자그마한 정원이 딸린 집. 정원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고, 한편에 세워진 간이 상점 같은 곳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다.
‘드디어 당신을 보는 건가, 로제트?’
진은 심호흡을 한 후 그녀가 있을 단층집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 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정석 난로가 노란 불빛을 내뿜고 있는 따스한 집 안 풍경과 그립고 그리웠던 로제트의 밀색 머리칼, 올리브색 눈동자, 행복해 보이는 미소.
그리고 로제트의 양옆을 떡하니 차지하고 선 낯선 사내 두 명과 그들의 품에 각각 안긴 아기들이었다.
“아이고 보스, 같이 좀 가세요.”
기진맥진한 플록스가 겨우 뒤쫓아 와 헉헉댔지만, 진은 말없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집을 잘못 찾아왔습니까, 보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
“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플록스는 진의 얼굴을 살피곤 흠칫했다. 대체 저 집 안에 뭐가 있기에…….
보스의 저 눈은 한밤중에 막사를 급습한 적의 목을 차례로 딸 때의 그 눈인데.
플록스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면서 얼른 창가로 다가가 집 안을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 이미 대문 밖을 나선 진은 서늘한 얼굴로 생각했다.
한 놈은 다부진 체격에 단련된 근육,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기운, 표정이 없고 예리한 눈이 검이나 몸을 쓰는 놈이고.
로제트를 훔쳐보는 질척한 눈빛이 그녀에게 푹 빠졌고.
한 놈은 체격은 건장하고 팔의 특정 부위에 근육이 도드라지지만 전반적으로 미끈한 느낌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 간사한 입매가 귀족 나부랭이거나 예술가 행세하는 놈이고.
헤벌쭉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게 역시 그녀에게 푹 빠졌고.
아기들은…… 아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보스, 보스! 잠시만요! 제발 혼자 내빼지 좀 마십시오. 아이고, 이 플록스 죽습니다.”
플록스가 허우적거리며 달려오자 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둘 중 어느 쪽일까?”
“예?”
“아니, 됐다. 알 것 없지. 전부 없애 버리면 되니까.”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한 놈은 수월할 것 같고, 한 놈은 조금 애를 먹을지 모르겠군. 왕실 기사단이나 지역 수비대에서 몰려오기 전에 이곳을 뜨는 게 좋겠지.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채비해.”
“금방 왔는데 또 어딜 간다고요? 설마 이상한 생각 하시는 겁니까?”
“로제트와 아기들까지는 데리고 간다. 그런데 아기들은 보통 어떻게 가져가지?”
“가져가다니요. 아기가 무슨 물건입니까. 아무리 갑자기 아버지가 되셔서 놀라고 경황이 없으시다 해도 그렇지.”
“뭐?”
“예?”
“뭐?”
“예?”
“…….”
“…….”
어리둥절하던 플록스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며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엇나가던 대화의 이유를 그제야 깨달은 플록스는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여차하면 눈밭을 구를 기세였다.
“와 씨,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다물어.”
“저 지금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겁니다. 그 와중에 레이디와 아기님들은 데리고 가신다니, 아, 눈물 나.”
“닥치라고.”
“아니, 딱 봐도 보스랑 똑같이 생겼던데 어떻게 그걸 못 알아보십니까?”
“뒤통수밖에 안 보였어.”
“뒤통수도 닮았던데요?”
“…….”
건수를 잡은 플록스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참, 천하에 나쁜 남편이시네요. 행여 거사에 방해될까 알리지도 못하고 홀로 낯선 곳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런 레이디를 의심하시다니. 레이디가 도망가실 만도 하네요.”
“정말로…… 나와 로제트의 아이들이라고?”
“아직도 의심하십니까? 나중에 얼마나 미안하시려고.”
“내가 이상한 거라고? 이건 당연히 놀라고 당황할 만한 상황이잖아.”
“아니, 레이디께서 북부로 가시기 전까지 두 분이 얼마나 붙어 계셨습니까. 매일매일 동침하시는데 아기가 안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네요. 본인이 한 일은 생각을 안 하십니까?”
“내 아이…….”
수백 가지 감정이 진을 덮쳤다.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들.
그런데, 내 아이까지 생겼는데도 당신은 내게 돌아오지 않으려 한 거야? 왜?
“진……?”
어지러운 눈을 들어 바라본 곳에 로제트 그녀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꿈처럼 서 있었다.
* * *
“진, 혹시 기절하거나 잠든 건 아니죠?”
진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 동안 기별이 없기에 참다못한 내가 물었다.
“숨 좀 쉴게. 로제트라는 공기가 필요해.”
진의 얼굴은 내 어깨에서 목 언저리로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이었다. 정말로 내가 공기라도 되는 것처럼 진은 숨을 깊이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나한테선 별로 좋은 냄새도 안 날 텐데. 좋은 향기는 당신한테서 나지.”
“아니, 당신한테선 사람 미치게 하는 향기가 나. 오늘도 지옥과 천국을 오갔는데.”
아이들을 보고 많이 놀랐겠지? 지금껏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화가 났을까? 이렇게 진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그런데 천국은 그렇다 치고, 지옥은 어느 대목을 말하는 걸까.
일단은 이 덩치 큰 아기의 등을 조용히 도닥여 주기로 했다. 칭얼대는 주니어들을 달랠 때처럼.
“로제트.”
드디어 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진의 얼굴은 처음보다 많이 냉정해졌는데, 이제는 내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전생에 성혼했다는 걸 숨긴 거야?”
“어떻게…… 알았어?”
“버섯들이 알려 주더군. 그 숲에서 나와 당신이 한 서약을.”
버섯들이 결혼식 증인 역할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진이 다시 까칠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성혼 서약을 한 건 엄밀히 말해 내가 아니지. 그 자식은 되고 나는 안 되나?”
“난…… 당신한테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지난 시간의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그리고?”
지난 생과는 무관하게, 당신이 나를 다시 한번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고, 말하기는 좀 부끄러웠다.
꾹 다물어 버린 내 입을 한동안 주시하며 기다리던 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로제트, 당신이 하는 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더니 진은 잿빛 눈을 집요하게 마주쳐 오며 물었다.
“그럼, 전생과 아무 상관없이, 그 버섯 하객들 앞에서 한 서약과도 상관없이, 좀 미안하지만 저기 있는 저 아이들과도 무관하게, 당신을 사랑하는 건 괜찮은가? 그건 허락해 줄 수 있어? 설마 그것조차도 안 되는 건가?”
“진…….”
“내가 사랑하게 된 건 지금의 당신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래.”
나도 그렇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거짓말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미안하고, 고마워.”
진은 아이들을 두고 한 말일 터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진에게 하고 싶은 말도 같았다. 미안하고 고마워.
“괜찮아. 두고두고 우려먹을 거거든. 임신하고 출산할 때 서운했던 일은 평생 가는 거 알지?”
“평생 곁에만 두어 주신다면 얼마든지. 그저 영광입니다, 부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