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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나를 평범한 사내로 만드는 너를 (101/110)


#101화. 나를 평범한 사내로 만드는 너를
202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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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가. 이 작은 밀색 머리가 얌전히 내 품 안에 있다니.

가슴에 닿는 그녀의 숨결이 어린 새의 그것처럼 연약하면서도 따스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러했다. 남들처럼 먹고 자고 산책하고 대화하고. 그런 평범한 순간이 도리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생각해 보면 내가 제국의 황제가 된 것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 사건이기는 했다. 내 어머니를 찾은 것도, 내 어린 시절을 찾은 것도. 그 과정에 몇 사람을 얻고 몇 사람을 잃은 것도.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황제가 된 것보다 지금의 이 평범한 고요가 더 손에 잡히지 않는 꿈같았다.

로제트의 남편이 되어 평범한 부부처럼 이렇게 함께 잠자리를 데울 수 있다니.

옆방에 있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은 그 아이들이 신기루 같기만 하다.

아내와 아이들이라니. 하아, 어떻게 한다? 나 어쩌면 좋지!

황제로서 갑작스레 정무를 보고 귀족들과 관리들을 통솔하게 되었을 때도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았다.

그 어떤 일보다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지금껏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를 구경도 해 본 적이 없으니.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엔 하말린의 현자인 오쿨루스 왕이 가장 훌륭한 남편이자 아버지의 표상일 것 같은데. 바깥에서 보는 모습과는 또 다를 수 있으니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무엇보다 저 주책맞은 왕세자를 보면 영 의심스럽단 말이지.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인간이면 서로 알아보자마자 자기 누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것도 로제트 앞에서.

여하튼 어렵게 손에 넣은 이 평범한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한 욕심이 나를 초조하고 조급하게 만든다.

문득, 내 품 안의 이 여인이 야속해져서 손가락으로 콧방울을 톡 건드리니 아기 고양이 같기도 한 야릇한 소리를 흘렸다. 생각지 못한 공격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게 제국의 황제가 되라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주문을 했다. 그러고서 정작 본인은 자꾸만 나를 평범한 사내로 만든다는 걸 알까.

수많은 보통의 사내들이 빠져들고 만끽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할 감정들, 그 평범한 감정들을 알게 하는 유일한 그대여.

그대가 얼마나 유해한 선물인지, 내 밤새 요목조목 알려줘야겠군. 부부라면 불면도 함께 나누어야 하는 법.

* * *

우리가 재회한 지 이틀이 지났는데, 진은 여전히 아이들을 피하고 있다. 만져 보거나 안아 보라고 권해도 이렇게 대꾸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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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물론 갑자기 알게 된 아이들의 존재가 당황스럽고 어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할 수도 있고.

지난 생의 진은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같이 불행한 아이가 세상에 또 생겨나는 것이 싫다며. 진심이었던 걸까?

이번 생의 진도 지난 생과 마찬가지로 실은 아이를 원치 않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자식이니 궁금하다거나 핏줄이 당긴다거나 하는 게 전혀 없나? 자기랑 똑같이 생긴 주니어들이 예쁘지도 않아? 조금 서운해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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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로제트. 자기랑 똑같이 생겼으니까 더 무서운 거 아니겠소. 뭐, 그저 쑥스러운 걸 수도 있고. 진의 성격이 좀 그렇지 않소?”

내 불만을 듣고 모텝이 한 말이었다.

짐작했던 대로, 진과 모텝은 하말린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처음엔 경황이 없어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당신이 왜 여기에?’ 하면서 똑같이 황당해했다.

절친한 사이는 아니라 해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다.

진에게 모텝은 존경하는 하말린 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이고, 모텝에게 진은 군주인 아버지가 아들처럼 아끼는 인재이자 매제가 될 뻔한 남자.

두 사람은 제국의 황제와 하말린의 왕으로 곧 만나게 되겠지. 뭔가 미묘한 관계였다.

지난 생에 두 사람이 어떤 운명으로 얽혔는지 아는 내 눈에 유독 그리 보이는지도 모르지만.

모텝은 아마 진을 골탕 먹이려고 만나자마자 일부러 모얌의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내가 모얌을 모르는 것으로 알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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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내 누이가 실망이 여간 크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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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왕녀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마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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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괜찮소. 모얌은 언제나 다음 계획이 있으니까. 아아, 대책이 없는 건 항상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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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왕국에 눌러앉을 셈인가? 슬슬 하말린의 앵무새로 돌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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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남편의 비밀 하나 알려 줄까요? 이거면 앞으로 꽉 잡고 살 수 있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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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아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이처럼 호시탐탐 진을 도발하고 싶어 찔러 대는 모텝이기에, 그의 말을 어디까지 진지하게 들어야 할지 헷갈리지만,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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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예뻐도 냉큼 좋다는 티를 내기가 쑥스러울 거요. 폐하 생긴 걸 보시오. 좋아도 좋다고 표현할 얼굴이오? 이럴 때는 아이들과 셋만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거요.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마음껏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주자는 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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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아이들만 집에 남겨 두자고요? 아기를 다루는 데 서툰 진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위험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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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소. 아이들이 울면 달래 줘야지, 배고프다면 먹여야지, 더러워지면 닦아 줘야지, 그러다 보면 어느덧 서먹함이 가시고 가까워지는 거 아니겠소?”

흠, 일리가 영 없는 말은 아니었다. 모텝의 얼굴에 ‘진, 된통 한번 당해 보시오’라는 표정이 언뜻언뜻 스치는 듯해 조금 불안했지만.

생각해 보면 진은 변덕이 심한 미고도 잘 다뤘다. 그리치의 뒷골목 아이들이나 토버마리의 소작농가 아이들도 스스럼없이 대했고.

그때의 진은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으로는 전혀 안 보였고, 아이들도 의외로 진을 좋아하며 잘 따랐다.

그러니까 진과 아이들이 알아서 친해질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정말로 방법일 수도. 황궁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영영 기회가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황제로서의 의무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지금이 서로 부대끼며 부자간의 정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진과 아이들이 함께하지 못하고 흘려보낸 시간을 이참에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 역시 하도 오랜만에 진을 만났더니 처음엔 어색하고 경직됐지만, 말도 섞고 눈빛도 섞고 이것저것 섞다 보니 금방 옛 감정이 되살아났으니까.

또 진에겐 중요한 숙제가 있기도 했다.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일.

그 일은 일부러 진의 몫으로 남겨 두었기에 지금까지 아이들을 주니어 1, 주니어 2나 볼록이, 꽥꽥이 등의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를 한번 안아 보지도 않고 이름을 지을 수는 없는 법.

이런 생각으로 나는 사람들을 모아 작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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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핑계를 만들어 진과 아이들만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우자고요.”

나는 북부를 떠나기 전에 왕궁에 가서 레이디 페와 행정관 아이언스, 왕실 주치의 브라운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며 쿠엔티노와 플록스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쿠엔티노는 호위, 플록스는 외교 사절 겸 계약 실무자로 가는 것이었다. 이곳의 마정석이나 마법식 사용과 관련한 계약을 지금 맺어 두는 쪽이 유리할 것 같았다.

앤은 마사 스쿨에 등교하는 날이고, 모텝은 애초에 이 집 식구가 아닌데 본인이 뻔질나게 드나든 것일 뿐이고.

국선 유모에게도 오늘은 오지 말고 쉬라고 미리 연락을 넣었다.

또 심심하면 찾아와 집안일을 턱턱턱 해 놓고 가는 이웃의 부인들에게도 사정을 말해 두었다.

평소처럼 들렀다가 ‘아기들은 우리가 볼 테니 나리는 저쪽으로 가 계십쇼’ 하고 인심을 쓰면 곤란하니까.

이렇게 진은 쌍둥이와 무인도 같은 집에 고립되었다. 원래 극한 상황 속에서 서로 간의 친밀도가 급속히 높아지는 법. 부디 부자간의 정이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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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괴성을 듣고 옆방으로 달려간 진은 열어젖힌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두 아이는 유아용 침대의 창살을 붙잡고 흔들며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곳을 탈출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기들이 내는 소리는 특별해서, 고막을 산산조각 내고 뇌를 마비시키는 위력을 갖고 있었다.

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궁리했다.

아기들이라 해도 어차피 성인과 같은 종족이 아닌가. 그저 크기를 작게 줄여 놓은 것뿐. 막무가내에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경향이 있지만, 성인도 그런 놈은 많으니까.

진은 일단 우리같이 생긴 침대 쪽으로 다가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고 신중히 다섯 걸음 다가갔다.

쌍둥이의 시선이 일제히 진을 향했다. 드디어 진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낯선 존재의 등장에 아이들은 입을 벌린 채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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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옳지. 어려움을 해결해 줄 어른이 왔으니 이제 진정하렴.’

하지만 방 안이 조용해진 건 아주 잠깐이었을 뿐, 아이들은 다시 와이번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진은 쏜살같이 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긴 태어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나타난 시커먼 아비가 뭐가 좋겠는가.

그렇게 진은 문밖에 서서 냉정을 되찾으려 애쓰며 생각했다.

사람이 저런 반응을 보일 때는 어떤 경우다? 무서울 때, 싫을 때, 불편할 때, 답답할 때, 화날 때, 짜증 날 때, 아플 때, 배고플 때…… 배고플 때?

진은 다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주변도 둘러보았다. 먹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부엌으로 급히 가 보았다. 탁자 위에 아이들 것으로 보이는 식기와 냄비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일부러 준비해 둔 모양새였다.

냄비 뚜껑을 열어 보니 뽀얀 죽이 담겨 있었다. 앤이 하루에도 몇 번씩 희고 멀건 죽을 휘젓고 있는 걸 본 진은, 안 그래도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귀리 죽으로, 북부에서는 아기들이 주로 이걸 먹는다고.

진은 아기용 식기에 귀리 죽을 퍼 담은 후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쟁반을 든 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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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먹인다?’

방이 떠나가라 괴성을 지르며 뒹굴고 있는 아이들을 진은 난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나지막한 아기용 식탁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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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욱여넣고 숟가락을 쥐여 주면 되겠구나.’

진은 귀리 죽 그릇을 두 개의 자그마한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침대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울타리처럼 생긴 침대의 문이 열리는 순간, 아이들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탈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을 휘저으며 뒤뚱뒤뚱 걷기를 시도하다가, 영 불안정하다고 느꼈는지 이내 바닥에 착 엎드려서 뽈뽈 기어가기 시작했다. 기는 속도로는 세계 1위 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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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들이…… 천재?’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아나는 아이들의 뒷덜미를 차례로 낚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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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맘마 먹을 시간이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귀리 죽, 너희가 좋아하는 거야.”

하지만 아이들은 귀리 죽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버둥거렸다. 그리고 식탁에 앉히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죽 그릇을 발로 시원하게 차 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는 그릇과 사방에 튄 흰 죽의 참사를 바라보는 진의 눈도 하얗게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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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 황족의 식사 예절을 제대로 알려 주마!”

불과 얼마 전까지 은 스푼으로 음식을 마구 헤집으며 허겁지겁 먹던 진이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의 손을 벗어난 아이들은 열린 방문을 향해 토끼처럼 질주했다.

쾅! 진은 분노에 찬 얼굴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과 검기를 날려서 사납게 방문을 닫았다. 눈앞에서 갑자기 탈출구가 막힌 아이들은 꽤액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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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어. 침대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겠다. 이건 벌이야.”

살벌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눈을 부릅뜨던 진은, 마음을 굳게 먹은 것도 소용없이 다음 순간 하반신에 힘이 쭉 빠지며 무릎이 푹 꺾이고 말았다.

쌍둥이가 왠지 애잔한 얼굴로 진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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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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