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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마음의 모양 (102/110)


#102화. 마음의 모양
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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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

이 영악한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들을 지켜 줄 만능 주문이라는 것을. 녹록지 않은 아기의 삶을 통해 터득한 사실이었다.

부드럽고 폭신한 인간들은 ‘마마’라는 말에 그다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딱딱하고 울룩불룩한 인간들은 ‘빠빠’라는 말 한마디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보가 되곤 했다.

불리할 때, 원하는 게 있을 때, ‘빠빠’라고 외치면 웬만한 상대는 자신들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봐라, 저 멀대도 그 한마디에 녹아서 흐물거리고 있지 않은가.

저 거인은 그동안 겪었던 거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사납기에 ‘빠빠’라는 주문과 더불어 눈동자도 반짝여 주었다.

역시 정신을 못 차리는군. 험상궂게 구겨졌던 미간이 펴진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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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

아이들의 의도대로 이 말은 진의 심장을 강타했다. 설마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는 건가? 내가 아빠라는 걸?

진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가라앉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부끄러움과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꼈다.

어른이 돼서 아이들과 똑같이 싸우려 들다니. 아무래도 뇌를 뒤흔드는 괴성에 이성이 잠시 마비되었나 보다.

진은 사랑스러운 악당 같은 아이들을 보며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정보 길드의 수장을 맡아 온 경험과 짧은 황제 경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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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 짧았어. 이 아이들에게 스스로 얌전히 먹기를 바라는 건 너무 무리한 주문이야. 내가 떠먹여 주어야 한다는 얘긴데. 하나도 아니고 둘을 어떤 전략으로 먹여야…….’

진은 까다로운 전투를 앞둔 장수처럼 다시 미간을 좁히고 고뇌했다.

하나를 침대에 두고 하나만 먼저 먹이는 방법도 시도해 보았지만, 침대에 남은 하나가 어찌나 세상 서럽게 우는지,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 되었다.

잠시 후 진은 최대한 부드러운 천으로 자신의 허리 양쪽에 아이들을 하나씩 묶어 매단 뒤 엄숙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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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대 사내로 부탁하마.”

그런 다음 쌍둥이에게 번갈아 가며 한 입씩 죽을 떠먹였다. 아이들은 대롱대롱 매달린 이 자세가 나름 마음에 드는지 다행히 크게 떼쓰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어찌어찌 죽을 다 먹인 후에는 아이들을 양쪽에 매단 채로 집 안을 세 바퀴 돌았다. 침대를 그렇게나 싫어하는데 냉정히 되돌려 보내려니 마음이 좀 그랬다.

날씨가 따뜻했으면 정원이라도 한 바퀴 돌았을 텐데, 아쉽지만 오늘은 집 안 구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녁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온 로제트는, 아이들과 얽힌 채 쓰러진 진과, 진을 올라탄 채 쌔근쌔근 자고 있는 쌍둥이를 방바닥에서 발견했다.

부자간에 좋은 시간을 보냈나 보네? 미소가 절로 나올 만큼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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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진은 로제트에게 아이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다.

아이온과 트리톤.

로제트가 알기로, 그건 전설 속에 등장하는 고대 괴물의 이름이었다.

애들이 배 속에서 버섯 포션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보통 또래보다 드센 건 맞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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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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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 아무래도 우리가 천재를 낳은 거 같아. 크게 될 아이들이니 특별히 기운 좋은 이름을 지어 줘야지.”

이상한 이유였지만, 괴물 이름이라는 걸 모르고 부르거나 들으면 어감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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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온! 트리톤!”

로제트가 부르자 아이들은 제 이름인 걸 아는 듯 방긋방긋 웃어 댔다. 어머나, 우리 애들 천재가 맞나 보네.

* * *

북부 왕국을 떠나기 전 영험하다는 설산에 가 보기로 했다.

토버마리의 버섯 계곡, 하말린의 고요의 숲에 이어 함께 가게 된 수정 화원. 마음을 정화하고 좋은 기운을 북돋워 주는 신성한 숲은 우리가 꼭 가야 할 필수 코스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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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독한 겨울에도 숲에 버섯이 있나 보지?”

진은 내가 버섯을 보러 가는 줄 알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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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면 분명 있을 테지만, 이번엔 버섯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고백하러 가는 거예요.”

북부의 겨울은 너무나 추워서 입김을 하 내뿜으면 곧장 투명한 얼음 결정으로 변해 바닥에 톡톡 떨어질 정도였다.

특히 이 수정 화원에 가면 더욱 극적인 결과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북부인들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 신성한 숲을 찾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결심을 내뱉거나 마음을 고백하면 유독 아름다운 형상을 띤 결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히 보기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만큼 순결한 힘이 깃들게 된다고 믿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그 힘이 돕는다고.

이 오래된 북부의 전설과 풍속에 사업적인 가치를 입힌 이가 다름 아닌 레이디 페였다.

레이디 페는 고백 중에서도 연인의 사랑 고백에 초점을 맞추어 이곳을 연인들의 성지, 프러포즈 명소로 홍보한 것이다.

덕분에 겨울이면 제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이 수정 화원으로 몰려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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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그냥 숲에 묻어 두고 오기도 하지만, 주로 유난스러운 연인들이 박제를 해 간다고 하오.”

어떻게 알고 따라붙은 모텝 왕세자가 설명을 보탰다.

수정 화원으로 출발한 이는 나와 진, 밤비, 플록스, 모텝 그리고 쿠엔티노였다.

진이 있으니 전부 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자신들도 볼일이 있다며 기어이 따라붙어 예상보다 대규모 인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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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식을 이용해 얼음 결정을 영구히 보존하는 기술이라오. 박제 비용이 꽤 비싼데도 불티나게 팔린다지 않소. 하긴 여기까지 와서 쪼잔하게 돈 아끼다간 이별 통보받기 십상이겠지.”

밤비가 숲에 가는 이유야 뻔하고, 나머지 모텝이나 플록스, 쿠엔티노는 딱히 고백이나 결심을 할 일이 없지 않나? 본인들이 있다고 부득부득 우기니 더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럼 진과 나는 왜 가느냐? 당연히 제국의 안녕과 황실의 번영을 빌러 간다. 황제가 그게 아니면 뭘 기원하러 가겠는가.

물론 나는 그에 더해 진과 아이들의 행복과 건강도 빌 거지만. 버섯 램프 사업이 잘 풀리도록 힘 좀 써 달라고도 해야지. 쿠키 가게도 더 번창하게 해 달라고 하고.

방한 결계를 친 마차가 드디어 수정 화원에 도착했다. 밤비가 우리 같은 외지인은 결계 없이 숲에 갔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라며 준비한 마차였다.

역시 방한용 특수 로브를 걸치고 마차에서 내렸다. 이 역시 없으면 마차에서 한 발 내딛자마자 심장마비로 저세상 갈 수 있다고.

무시무시한 경고와는 달리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의 풍경은 마음이 절로 경건해질 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온통 새하얀 눈과 투명한 얼음들이 순결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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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워요!”

톡톡 토도독. 내가 한 말이 영롱한 얼음 결정이 되어 떨어졌다.

다들 감명을 받았는지, 수다쟁이 모텝 왕세자마저 침묵에 잠겼다. 간만에 대자연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물론 여기저기서 꺅꺅대는 연인들의 탄성이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그들에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일까 싶어 참아 주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 숲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아무래도 진지한 고백을 하기에는 혼자가 덜 쑥스러울 테니.

나도 진과 조금 떨어져서 결심이랄까 바람이랄까 하는 것들을 입 밖으로 조심스레 밀어냈다. 순식간에 얼어붙어 수정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다 보니 이것저것 너무 많이 말한 것 같기도. 얼음 결정들이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자잘자잘하게 자주 들린 것 같아 조금 민망했다.

나는 남편에, 애들에, 동업자에, 사용인들 등등 신경 쓸 일도 사람도 많은 걸.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 금방 뻔뻔함을 되찾았지만.

얼마 후 따스한 손길이 내 어깨를 감싸기에 돌아보니 진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잿빛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인 것 같은데? 눈과 얼음에 반사된 빛 때문에 잘못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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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황제로서의 결심과 포부는 잘 묻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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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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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반응이 영 시들하십니다? 제국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결심이니 박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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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신 박제하고 싶어? 하고 싶다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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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나 말고. 나야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고 박제까지. 솔직히 유치하잖아? 난 그냥 숲에 묻고 가는 게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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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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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연인 사이라도 그렇지, 무슨 마음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증명해야 한담? 어머, 생각만으로도 닭살 돋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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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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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도 다 끝났나?”

나는 일행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떤 결심과 소원을 이 숲에 묻었을지 궁금해졌다. 밤비를 제외하고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 그러다 박제 주문 줄에 서 있는 플록스를 발견했다. 어떤 결심이기에 박제까지? 혹시 고백인가? 플록스에게 연인이 생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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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진, 저것 봐. 플록스에게 연인이라도 생긴 거야? 언제 생겼대? 누구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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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진의 소맷자락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자 진이 왠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맨날 붙어 다니는 사이에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이렇게 따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뭐, 무슨 말을 박제했는지 직접 보면 알겠지. 보통 연인의 이름을 넣어서 고백하니까, 흐흐흐.

그래도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폭로하기보다는 나만 살짝 보여 달라고 부탁해야지. 플록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이렇게 애쓴다니까.

나는 박제한 얼음 결정을 소중히 품에 집어넣고 있는 플록스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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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록스, 뭔데 박제까지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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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깜짝이야. 레, 레이디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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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록스 혹시 연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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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제 주제에 연애는 무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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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플록스가 어때서요.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살짝 보여 줘 봐요. 비밀 지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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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닙니다, 레이디. 볼만한 거리가 못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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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게 아니면 그냥 보여 주면 되겠네요. 플록스도 실은 자랑하고 싶잖아요. 자기 연인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나한테 다 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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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닙니다, 레이디…….”

플록스가 생각보다 더 완강히 거부하자 괜한 오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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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품에 숨긴 거 봤어요.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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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왜 이러십니까, 레이디!”

플록스는 급기야 나를 피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레이디가 자존심도 다 버리고 이렇게 애원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다니. 포기하려는 찰나.

툭.

달아나던 플록스의 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플록스의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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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황제 폐하 만세, 제국이여 영원하라…….”

길기도 하네. 플록스의 마음을 읽은 나는 곧장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잘못한 내가 어쩔 수 없이 먼저 고백을 주워서 플록스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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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지킬게요.”

내가 내뱉은 공허한 약속이 얼음 결정이 되어 눈밭에 떨어졌다.

플록스는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박제된 고백을 받아 다시 품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돌아서는 그의 눈가가 촉촉해 보였는데, 설마 또 우는 건 아니겠지?

내가 무례하고 주책맞게도 왜 그랬을까. 뒤늦게 후회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플록스는 연애를 하는 게 맞았다.

위대한 제국과. 그 제국의 영광된 미래를 이끌어 갈 군주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제국과 황제를 그토록 사랑하는 이가 플록스만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플록스를 제외한 그들은 나를 굴러온 재앙 혹은 적으로 간주하여 증오심을 감추지 않을 거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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