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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태풍의 눈 (103/110)


#103화. 태풍의 눈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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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황궁을 조금 더 크고 복잡해진 페가수스 본부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아이들이 처음 황궁에 왔을 때는 우리를 반기는 정겨운 얼굴들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공작위를 받고 황제파 수장이 된 말보르크, 밤비가 이끄는 황실 기사단에 대부분 흡수된 페가수스 시동생들 그리고 마법·연예부라는 이상한 자리를 떠맡은 시아와 뷰글라스까지.

특히 뷰글라스는 맨발로 달려 나와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진과 나의 귀환을 그 누구보다 격하게 기뻐했다.

수정 화원에 다녀오고 사흘 뒤, 우리는 북부 왕국을 떠나 제국으로 돌아왔다. 밤비 찬스를 이용해 이동 마법으로 빠르게 귀환한 것이다.

출발 전엔 아이들이 이동 마법을 견뎌 낼 수 있을지 우려가 많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쌩쌩하기만 했다. 오히려 마법이 신기한지 깩깩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골골거린 건 마법 약골로 판명받은 나와 플록스뿐이었다. 우리는 울렁거림, 두통, 가슴 답답함 등의 부작용을 호소했다.

쿠엔티노와 모텝 왕세자도 함께 입국했고, 앤은 북부 왕국에 남았다.

학업도 이어가야 했고 쿠키 가게도 자리를 잡아 가는 데다, 앞으로 앤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생각하면 북부 왕국이 앤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앤과는 당분간 작별하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의 장소에서 꿈을 이루자고 약속했다.

앤이 그곳에서 사업 수완과 마법식 기술을 배우는 동안, 나는 나대로 제국을 바꾸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앤 같은 인재가 북부 왕국이 아닌 이곳에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쿠엔티노는 황궁에서도 계속 내 호위를 맡게 되었다. 실력으로 보나 충성심으로 보나 그보다 더 적임자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문제는 여기까지 따라온 저 모텝 왕세자인데. 자신은 어차피 승계 여행 중이니 이번엔 장소를 옮겨 제국의 문물도 둘러보겠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그간의 정을 생각해 호위도 없고 여비도 떨어져 가는 자신을 쌍둥이들의 보모 겸 가정교사로 채용하라고 강요했다.

어처구니없는 요구였지만, 하말린 왕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딱 잘라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혹시라도 지난 생처럼 불온한 세력에 붙들려 이용이라도 당하면 골치 아파지는 건 진이니까.

시아와 뷰글라스가 하말린으로 돌아갈 때 왕세자도 딸려 보내면 되겠다는 계산으로, 당분간은 그의 요청을 빙자한 뻔뻔한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기로 했다.

여하튼 이처럼 모두가 나와 쌍둥이를 반기고 주변에 든든하게 의지할 사람도 많았기에, 황궁 입성이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가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또 수석 보좌관이 된 플록스가 사용인들에게 어찌나 세심하게 준비를 당부했는지, 처음 경험하는 황궁 생활임에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아이온과 트리톤도 기어 다닐 장소가 넓어지고 박살 낼 놀잇감이 많아진 데다, 무엇보다 골탕 먹일 사람들이 늘어나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전부 위장된 평화였다. 내가 황궁에 오기 전부터 진은 황후 간택 문제로 공신 가문 귀족들에게 들들 볶이고 있었던 것.

새로 즉위한 황제와 사돈 관계를 맺고 싶었던 귀족들에게 나는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 난데없이 굴러온 재앙의 사과 같은 존재였다. 거기다 황자까지 둘이나 달고 나타났으니.

기껏 공들이던 자리를 웬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낚아챈 바람에 닭 쫓던 개가 된 그들은, 내게 적개심을 활활 불태우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황제가 될 남자를 노린 영악한 창부라는 둥, 친자 확인을 해 봐야 한다는 둥, 황제에게 흑마술을 쓴 게 아니냐는 둥, 별의별 모함을 해 댔다.

나 참 억울해서. 그래서 내가 안 한다고, 안 돌아간다고 했잖아! 황후고 황궁이고.

기막히게 잘 도망갈 준비가 된 사람을 북부까지 기어이 쫓아온 사람이 누군데? 전생의 자기 자신을 질투하며 지금의 자신은 왜 안 되냐고 신경질을 팩팩 부린 사람이 누군데?

황제가 먼저 옆구리 쿡쿡 찔렀다고 말해 봐야 아무도 안 믿어 주겠지만.

내 정체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주로 내 출신에 대한 모함이 많았다.

진이 방탕 황자 시절 뒷골목에서 만난 질 나쁜 여자라나. 그들이 말하는 ‘질 나쁜 여자’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딱히 틀린 말은 또 아니네?

함께 입궁한 음침한 호위 기사와 떠돌이 이민자 같아 보이는 보모는 그들의 모함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나.

하지만 내 정체가 밝혀지자 귀족 사회는 더욱 발칵 뒤집혔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폐 황제의 오른팔이자 진압군 수장이었던, 카를슈테인 공작의 전처? 폐 황제의 편에 섰다 막판에 슬그머니 발을 뺀 그 앰브로시아 후작가 출신?

황후는커녕 엄히 다스려야 할 중죄인이 아닌가?

물어뜯을 좋은 구실을 얻은 자들은 신이 나서 온갖 새로운 추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런 소문과 비난들이 내 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진이 특별히 황명을 내린 모양인데, 내가 이 사실들을 어떻게 다 알게 되었느냐.

바로 황제의 수석 보좌관인 플록스가 친히 세세하게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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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혹시 아직도 도망칠 생각을 하십니까?”

플록스가 어울리지 않게 엄숙한 얼굴로 이렇게 묻기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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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이젠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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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전 레이디를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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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작정이었으면 진이 절대로 찾지 못하게 꽁꽁 숨어 버렸겠죠. 이미 황궁에 발을 들인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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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폐하께선 어떻게든 레이디를 보호하고 싶어 하시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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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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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께서 듣고 마음 아파하실 만한 얘기는 차단하라고 하셨죠. 레이디 모르게 혼자 처리하고 싶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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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긴장되는데요? 나에 대해 얼마나 나쁜 소리들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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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황후라는 자리와 정치적 상황이 그런 거지요. 레이디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좋은 소리를 듣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긴 해도 내가 가진 배경이 유리하진 않겠지. 이혼녀에 뒷받침을 해 줄 가문도 거의 몰락한 상황이고.

나부터도 그런 이유들 때문에 스스로 황후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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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되지만 저는 폐하와 달리 레이디께서 누구보다 상황을 잘 파악하고 계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적합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나아가 상대편에 타격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숨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요.”

맞는 말이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진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야말로 내 도움 없이 진 혼자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일인데 모르고 넘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플록스는 귀족들이 지껄인 말을 내게 소상히 일러바쳤는데. 나중엔 솔직히 모르는 게 나았겠다는 후회도 들었다.

아무리 모함하기 위해 꾸며 낸 말이라 해도 듣다 보면 사람을 위축되게 하니까. 악의에 찬 말이란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독약과도 같았다.

내가 아무리 떳떳해도, 내 의지가 아무리 강철 같아도, 어쩔 수 없이 상처 입고 망가지는 부분이 있었다.

나 혼자 욕먹고 말면 그만인 경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앞날과 연관되어 있을 때는 더더욱 견디기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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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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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레이디 앰브로시아를 황후로 책봉한다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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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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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책봉은 본디 사사로운 감정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역대 황후들을 보아도, 황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사례는 지금껏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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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되오나 황후 책봉 문제는 저희 귀족들과 협의해야 하는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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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의 결정이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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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는 단순히 황제의 아내가 아니라 제국의 작은 군주이자 백성들의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만큼 그 자격을 엄격히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저희 귀족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자기 가문의 여식을 황후로 밀어 넣고 권력을 독식하려는 검은 의도만 없다면 충언으로 들릴 법한 말이었다.

황제의 얼굴이 싸늘해지자 귀족들 중에서도 연륜 있는 노련한 자가 나서 인심 쓰듯 중재안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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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는 황제의 정치적 파트너이지요. 반면 남녀의 연정이란 금방 빛이 바래는 법입니다. 이런 경우엔 선대 황제들께서도 취하셨던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를 황비로 봉하시지요. 황위 계승의 기회도 모든 황자에게 골고루 열어 주시고요.”

언뜻 온건하고 유연해 보이는 제안이지만, 가장 악질적인 수작이었다. 이자는 새로 즉위한 황제를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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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앰브로시아의 자격이 궁금한가 보군. 그녀는 황위 탈환 전쟁의 영웅이다. 짐이 이 황좌에 앉아 있는 건 그녀 덕분이라 할 수 있지. 그 점에 있어서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공이 크다고 단언할 수 있다. 공이 있기에 권력을 갖는다. 이것이 그대들, 공신 귀족들의 명분이 아닌가?”

찬물을 끼얹은 듯 사방이 조용해졌다가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자가 황위 탈환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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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알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부디 일깨워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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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의 말을 믿기 힘들다? 좋다. 그대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지만, 탈환전의 성과를 기록한 공훈록 출간을 명해 두었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좌관들이 금박을 입힌 양장본을 잔뜩 가지고 들어와 귀족들에게 한 권씩 나눠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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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 짐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니,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갈 그대들은 반드시 정독하기를 권한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책을 받아 든 귀족들을 보며 황제는 친절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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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족적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그러다 보니 책이 많이 두꺼워진 면이 있지만, 새로운 시대의 가장 귀중한 경전이자 전승 기념비와도 같으니. 레이디 앰브로시아에 대해 경들이 궁금해하는 내용도 거기 소상히 밝혔으니 답은 그대들이 직접 찾으라.”

진은 전쟁 중에 이미 기록을 모아 두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토록 빨리 공훈록이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전쟁에서 진다면 길고 긴 애도문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황제의 일격에 주춤했던 귀족들은 다시 우려를 표했다. 간단히 포기할 위인들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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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앰브로시아가 승전에 기여한 바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이 크다 해도 치부 또한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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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폐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카를슈테인의 전처가 아니었습니까. 적장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비난과 오명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황제는 귀족들의 과도한 충심에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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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레이디 앰브로시아는 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카를슈테인과 합법적으로 이혼했는데. 이혼한 것이 죄란 말인가? 아니면 제국의 법이 유명무실하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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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상관없이 세간에서 떠드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 소문들이 폐하의 평판을 깎아내릴까 저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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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엔 사사로운 감정으로 황후를 책봉하지 말라더니, 이제는 뒷소문을 무서워하라? 아, 하지만 경의 의견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아니야. 제국의 법이 엉망이라는 지적엔 짐도 동의하네. 안 그래도 제국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할 생각이었거든.”

황제가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지 않자, 귀족들 중에서도 나이 지긋한 능구렁이 원로들이 시간 끌기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서 황제를 더 자극해 봐야 자신들에게 불리하겠다는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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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다만 황후 책봉의 시기를 늦추어 주십시오. 이제 막 즉위하셨으니 제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황후 책봉은 그간의 폭정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돌본 후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자의 매우 합당한 청원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마땅히 거부할 만한 핑계가 없을 만큼.

하지만 황후 책봉의 시기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로제트도, 아이들도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황제를 흔들 수 없다면, 더 쉽고 연약한 대상을 흔들려 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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