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낯선 소유욕2022.02.14.
쏴아아. 지안은 시원하게 쏟아지는 샤워기 물속에 가만히 손을 뻗었다. 여전히 불에 덴 듯 뜨겁고 얼얼한 손. 도하의 커다란 손에 한동안 갇혀 있다 나온 손에서, 아직도 화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제 손의 두 배는 될 듯 커다란 손. 고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길고 매끈한 손가락까지. 그의 손은 얼핏 봐선 여자의 것처럼 희고 고왔다. 그래서 미처 몰랐다. 그 손이 지닌 악력이 얼마나 거센지. 마치 자기 소유의 것을 놓치지 않으려 움켜쥘 때처럼, 그는 거칠고 무섭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에게 닿은 건 손뿐인데, 온몸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워졌다.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랬다. 지안은 천천히 샤워기 앞으로 다가가 몸을 적셨다. 냉수로 샤워하기엔 아직 이른 계절이었지만, 비정상적으로 홧홧해진 몸을 식히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었다. 갈색의 기다란 머리칼이 물에 젖어 진한 빛깔을 띠었다. 아름답게 굴곡진 몸 선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악보 위 음표처럼 부드럽게 떨어졌다. 지안의 살짝 벌어진 입술 끝에서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지워보려 해도 자꾸만 재생되는 하나의 장면. 코앞까지 다가온 도하가 마치 입맞춤을 할 것처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던 모습. 그 순간 몸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던 심장의 위태로운 요동침을 온몸이 기억하고 있다. 그만 떠올리려고 눈을 질끈 감으면, 이번엔 생생한 목소리가 고막을 뒤흔든다.
‘이제 내 허락 없인 아무 데도 가지 마. 또 그랬다간…… 그땐 이것보다 더한 걸 하게 될 테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 또 지금처럼 말도 없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그땐 똑같이 위험한 벌을 받게 될 거야.’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심장이 제멋대로 파닥거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큰 사고 이후, 도하가 처음으로 하는 운전이었다. 지안은 하얗게 상기된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다행히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도 온몸에 퍼졌던 긴장을 풀었다. 운전대를 잡고 몰두한 그의 옆얼굴에선 왠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 각도를 그의 얼굴로 고정시켰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도하가 특유의 냉랭한 목소리로 지적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잊지 못할 외출. 그 외출이 남긴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자꾸만 어른거리는 한 남자의 잔상을 씻어내려 지안은 차가운 물에 몸을 적셨다. 하지만 차가운 물이 닿자, 이번에는 또 다른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를 구하기 위해 깊고 광활한 물속으로 뛰어들었던 어느 밤의 기억. 그날 느꼈던 수온과 지금 샤워기의 물 온도가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건 저만의 착각일까. 도하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그와 함께한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쉬이 식지 않는 열기 때문에, 자꾸만 깊어지는 생각 때문에. 지안의 샤워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더 길어지고 있었다.
*** 진작 샤워를 마친 도하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었다. 저를 보고 요동치던 세준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 나눈 3년 만의 눈인사. 세준의 얼굴에 일었던 빛은 반가움이나 놀라움이 아니었다. 그저 불청객을 마주한 당혹감, 노여움에 가까워 보였다. 금이 간 유리알처럼 부서지던 세준의 동공이 어느 참에 지안을 곁눈질로 보고 있을 때, 도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사람이 마지막에 눈을 돌리는 곳은, 바로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이었다. 도둑질. 그것만큼 쉽게 무언가를 제 것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 도하는 알고 있었다. 세준이 여태껏 무엇을 훔치려 했고, 훔쳐 왔는지. 하나는 제게 이젠 별 의미 없는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도하가 20대의 열정과 시간을 모두 쏟아 준비한 일이었다. 세상에 훔쳐도 될 것과 훔쳐선 안 되는 것을 나누는 기준은 없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도하는 이전의 것들은 모두 다 훔쳐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이미 오래전 의미 없어진 존재였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되찾아올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번에 세준이 눈을 돌린 방향, 그곳에 있는 여자는 왠지 용납할 수 없었다. 세준을 보는 순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지안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 여자한테 내가 왜……. 도하는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졌다. 그 끝에 단서 하나쯤은 찾을 수 있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맺어진 관계이지만, 그녀는 엄연한 법적 아내였다. 아내, 부부. 그 관계가 주는 무게감과 책임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컸다. 게다가 그녀는 단지 아내에 불과하지 않았다. 정순의 말을 빌리자면,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저를 가족보다 더 살뜰히 보살핀 최고의 간병인이었다. 그런 여자를 지세준 같은 강탈자의 타깃이 되게 할 순 없었다. 허공을 응시하던 도하의 시선 끝에 뜨거운 열기가 어렸다. 이런 걸 소유욕이라고 부르는 걸까. 소유욕이라니. 34년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감정이었다. 물건이나, 동물, 사람. 그 무엇에도 느껴본 적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라는 존재를 잃은 아이, 가장 소유하고 싶은 존재를 상실한 아이의 가슴 속에 다른 건 다 아무 의미 없어졌다.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었고, 갖게 되어도 싫었다. 어차피 또 사라져버릴 테니까. 한데 이번만은 그렇게 쉽게 생각되지 않았다. 대체 왜……. 남다른 두뇌로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답답함을 가득 담은 도하의 눈이 불현듯 시계에 닿았을 땐, 지안이 2층에 올라간 지 한 시간 반이 지났을 때였다. 병실로 돌아오고도 벌써 여러 번은 왔을 시간이다. 아무리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고, 재활도 훌륭하게 소화했다지만, 그래도 너무 소홀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여자는 유종의 미라는 말도 모르나. 그러다 불안한 마음이 훅 끼쳤다. 혹시 또 어딜 간 건 아닌지. 그 사이, 세준이 말도 안 되는 수를 써 그녀를 다시 또 불러낸 건 아닌지. 도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지안을 마지막으로 본 2층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에 올라와 보는 건 3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와보는 2층은 마치 오래전 떠나온 옛집처럼 낯설고,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도하는 긴 복도를 유유히 지나 게스트 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곳에 굳게 닫힌 방문 하나가 보였다. 똑똑. 지안이 그러하듯, 그도 문 앞에서 노크하고 잠시 대기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나간 건가. 설마 지세준이 또……! 문득 스민 불안감에 도하는 얼른 문을 잡아당겼다.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으로 강하게 스며들어왔다. 긴 잠에서 깨어난 후, 그는 줄곧 알고 싶었다. 이게 무슨 향기인지, 대체 어디에서 나는 건지. 꽃밭에서 나는 싱그러운 내음 같기도 했고, 나무에서 나는 은은하고 마음 편안해지는 그런 향 같기도 했다. 정확한 건 몰라도 향수나, 탈취제 같은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향은 아니었다. 한데 그녀가 홀로 쓰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 깨달았다. 그게 바로 서지안, 그녀의 향기였다는 걸. 후각에 잠시 신경을 빼앗겼던 도하는 다시 부지런히 눈을 돌렸다. 그가 이 방에 온 목적은 그녀를 찾기 위함이었다. 방안을 쓱 둘러보던 그의 시선 끝에 정갈하게 정리된 행거가 보였다. 행거에 걸린 옷가지들은 점잖은 그녀를 닮아 무채색으로 깔끔하고 단정했다. 그 옆, 작은 화장대로 향한 시선이 위에 올려져 있는 화장품을 보곤 잠시 멈추어 섰다. 늘 투명하고 촉촉하던 그녀의 피부. 그런 피부를 유지하려면, 수십 개의 화장품은 기본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화장대는 굉장히 단출하고 심플했다. 그러고 보면 지안은 평소 화장도 잘 하지 않았다. 누구와 참 많이 비교될 정도로. 도하는 얼마 전, 저를 찾아왔던 하린을 가만히 떠올렸다. 하린이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녀에게선 복잡하게 뒤섞인 화장품 냄새가 났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도하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걸 생각하면 지안에게선 늘 깨끗하고 은은한 향이 났다. 어쩌면 이 모든 게 환자를 향한 간병인의 배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화장을 하고 외모를 꾸미기에도 바쁜 나이에, 자신을 꾸미기보다 아픈 사람을 보살피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한 여자. 문득 지안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제라도 화장을 하겠다고 하면, 그는 강하게 말리고 싶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 얼마나 맑고 빛나는지 알기나 하냐고. 지안의 민낯을 떠올리던 도하의 입술 끝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다시 시선을 옮겨, 도하는 그녀가 이따금 휴식을 취했다는 침대를 봤다. 아담한 체구의 그녀가 혼자 잠들기에는 다소 큰 사이즈의 침대. 그걸 보던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 그 옷이 조금 전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라는 걸 기억해내는 사이, 옷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있는 무언가가 시선을 강탈했다. 은은한 레이스 장식이 박힌 스킨 컬러의 여성용 속옷. 순간 도하의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그제야 게스트 룸 한쪽에 자리한 욕실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쪽에서 배경음처럼 희미하게 들려오던 물소리가 이제 막 그쳤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가 씻고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는 한 시간도 전에 샤워를 마쳤고, 그녀 또한 그러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여겼기에. 놀란 그의 몸이 좀처럼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네킹처럼 굳은 도하가 뒤늦게 걸음을 떼던 그때, 욕실 쪽에서부터 들리던 발소리가 부쩍 더 가까워졌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 올수록 도하의 심장박동도 미친 듯 올라갔다. 도하가 겨우 문에 다다라 손잡이를 잡는 순간이었다. 달깍.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 가벼운 발걸음 소리. 놀란 지안의 비명. 그 모든 소리가 순차적으로 도하의 고막을 때렸다.
“아악!”
“……!”
도하는 천천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샤워가운을 아슬아슬하게 두른 지안이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권도하 씨! 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