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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구두계약의 위험성 (23/110)

23화. 구두계약의 위험성2022.02.18.

가느다란 목선 아래 일자로 곧게 솟은 쇄골, 한 품에 폭 감길 듯 가녀린 어깨라인. 도하의 시선이 샤워가운 밖으로 드러난 지안의 하얀 살결에 닿았다. 오프 숄더 원피스를 입은 것과 별반 다름없는 차림이었지만, 살결에 아직 남아 있는 물기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톡,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느릿하게 따라 움직였다. 그 모습을 눈에 담던 도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든 순간이 슬로 모션 효과를 켜놓은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한 남자의 심장은 결코 잔잔할 수 없었다. 폭주하듯 뛰는 심장박동에 도하는 머리끝이 아찔해졌다. 놀란 그녀가 방어적으로 샤워가운을 조여 맬수록, 그 너머에 가려진 옹골찬 실루엣이 아찔하게 드러났다. 도하는 바짝 굳은 채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다시금 상기된 지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흔들었다.

16548867511763.jpg“제 말 안 들려요? 여기서 뭐 하냐고요!”

두 뺨이 붉어진 그녀는 동그란 눈동자를 위태롭게 굴리고 있었다. 도하는 잠시 안면에 깃들었던 감정을 모두 거둬내고 낮게 속삭였다.

1654886751177.png“취침 전 혈압 체크를 잊었나 해서.”

그의 말에 지안의 눈썹이 하늘 방향으로 높이 올라갔다.

16548867511763.jpg“네?”

1654886751177.png“오랜만에 운전을 했더니 피곤하군. 쉬고 싶은데 당신이 아직 취침 전 체크를 해주지 않아서.”

급히 생각해낸 핑계라기엔 제법 그럴싸했다. 도하는 안도하며 지안의 대답을 듣기 위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16548867511763.jpg“…….”

지안은 여전히 제 차림을 신경 쓰면서, 시선을 벽시계 쪽으로 옮겼다. 그러곤 조금 놀란 듯 말했다.

16548867511763.jpg“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는지 몰랐어요. 먼저 내려가 계세요. 얼른 가서 혈압 재 드릴게요.”

1654886751177.png“…….”

도하는 고개를 낮게 두어 번 끄덕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도하가 나가고 방 안에 혼자 남은 지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널을 뛰는 맥박이 귓가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평소보다 샤워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느꼈지만, 시간이 이렇게 지났을 줄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여기까지 올라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욕실 안에서도 집요하게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남자가, 바로 욕실 문 앞까지 다가와 서성이고 있을 줄은. 지안은 연거푸 놀란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샤워가운에 손을 가져갔다. 이제 옷을 갈아입고 병실로 돌아가야 한다. 기다림에 지쳐 직접 간병인을 찾으러 온 집요한 환자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가운을 내리려다 멈칫 동작을 멈추고 문 쪽으로 갔다. 그동안은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일. 문을 잠근 그녀의 발아래로 그제야 샤워가운이 좌르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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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8867511801.png“세준 씨는 다 알고 있었지? 그런 거지?”

하린이 손에 기울이고 있던 와인잔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셔츠 소매 단추를 풀던 세준의 손이 순간 그대로 멈췄다.

16548867511804.png“뭐?”

16548867511801.png“알고 있어서 그런 말 한 거잖아. 도하 씨가 살아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하린의 말에 세준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16548867511804.png“너, 어떻게…….”

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준의 뒤로 다가서며 말했다.

16548867511801.png“세준 씨 이야기 듣고 이상해서 좀 알아봤어.”

16548867511804.png“…….”

16548867511801.png“내가 아직도 도하 씨한테 미련이 있을까 봐 불안해?”

16548867511804.png“……뭐?”

16548867511801.png“그래서 떠본 거 맞아?”

굳게 다물어진 세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 순간 뒤에서 하린이 그에게 백허그를 하며 쏙 안겼다. 놀란 세준의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16548867511801.png“난 이제 세준 씨밖에 없어. 민하린 인생에서 권도하라는 이름은 진작 삭제되었다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입술과 달리 하린의 눈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도하를 만나고 온 후 확실해진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도하를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피어오른다는 것. 게다가 그의 곁에 있던 여자. 꼴에 예의를 논하는 서지안이라는 여자를 보고서 더 그런 마음이 솟구쳤다. 그따위 여자에게 도하를 뺏긴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도하에게 돌아가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준을 버리고 도하에게 가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단 계산이 나왔다. 도하가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지난 3년이라는 시간. 세준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들을 이뤄냈고, 현재의 도하보다 훨씬 더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 그와 3개월 후면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될 거다. 그럼 적어도 앞으로 인생의 탄탄대로는 보장된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마음이 끌리는 쪽에 올인할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아직은 더 지켜보고 싶었다. 든든한 보험 하나를 곁에 두고. 권도하가 어떻게 일어설지, 얼마나 더 갖고 싶어질지. 세준은 등 뒤에 붙은 하린의 온기를 느끼며 전과는 다른 허탈감을 느꼈다. 도하의 것이라는 메리트가 사라진 여자. 그녀가 안겨 있지만 더는 만족감도 성취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하의 곁에 있는 다른 여자를 알게 되어서일까. 그 생각이 들다가도 아직 섣불리 하린을 버릴 수 없었다. 도하와 서지안이라는 여자의 불확실한 관계 때문이었다. 법적으로는 부부일지 모르나, 사랑 없이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도하가 사랑 없는 아내보다, 다시 첫사랑 하린을 찾게 된다면. 어렵게 손안에 쥔 카드를 쉽게 버릴 수 없다. 세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하린을 품에 안았다. 가까이 붙은 두 몸은 여느 연인들처럼 뜨거웠지만, 심장에 끓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었다. 서로를 버릴 수 없는 카드로 여기는 계산 섞인 마음만이 뜨겁게 들끓고 있을 뿐. *** 차트를 살피던 강 박사의 얼굴이 아침 햇살만큼이나 훤해졌다. 도하는 강 박사를 투시하듯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내뱉었다.

1654886751177.png“어떻습니까?”

도하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자, 강 박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8867536272.jpg“그래도 아직 야근을 한다거나 과도한 업무를 보시면 절대 안 됩니다. 방심하는 순간, 다시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살짝 겁을 줬지만, 명백한 출근 허가였다. 강 박사의 말에 도하의 안면 위로 생기가 너울거렸다.

1654886751177.png“감사합니다. 강 박사님.”

16548867536272.jpg“……감사는요. 저보다 우리 지안 씨가 더 많이 고생했죠.”

강 박사가 슬쩍 옆으로 물러나자, 뒤에 있던 지안이 눈을 내리고 씩 웃었다.

16548867536272.jpg“그럼, 저는 내일 오전에 다시 오겠습니다.”

1654886751177.png“수고하셨습니다.”

강 박사를 배웅하러 나갔던 지안은 다시 병실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잠시 우뚝 선 채 생각했다. 그럼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인가. 저택으로 돌아오기 전, 도하가 호텔에 찾아왔을 때 분명히 이야기했었다. 후유증이 낫고, 재활도 잘 마치고, 정상적으로 일상에 복귀하게 되면 그땐 깨끗이 정리해 주겠다고. 길고 길었던 지난 간병 생활. 새드엔딩이 아닌 해피엔딩을 맞았다는 사실에 감사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그리 기쁘지 않았다. 이제 이곳을, 정든 사람들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지안은 괜스레 코끝이 아릿해져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정순에게 떠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막막했다. 크게 실망하실 텐데. 지안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그녀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아주던 정순의 모습. 손수 밥상을 차려주던 모습과 오너 모임에서 그녀를 손자며느리로 소개하며 기뻐하던 모습까지. 정순을 생각하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젠 자신이 아니라도 정순을 보살펴줄 사람이 있었다. 하나뿐인 손자, 권도하. 원체 무뚝뚝하고 차가운 남자라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더 늦어지면 그만큼 정순이 받게 될 충격도 커질 테니까. 지안은 심지를 굳히고 정순이 있는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문 앞에서 노크하고 기다리자, 안에서 정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48867564412.png“누구니?”

16548867511763.jpg“할머님, 저 지안이에요.”

안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정순이 직접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16548867564412.png“지안아!”

지안은 정순이 지금처럼 따듯하고 반갑게 불러줄 때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애써 참으며 씩 웃었다.

16548867564412.png“왜? 이 할미한테 할 얘기라도 있니?”

16548867511763.jpg“……네. 잠깐 들어가도 되죠?”

목이 메어 갈라지는 소리가 날 뻔한 걸 간신히 넘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스 의자에 앉자, 정순이 향긋한 모닝티를 내어주었다.

16548867511763.jpg“감사합니다.”

16548867564412.png“감사는. 근데 우리 지안이 얼굴이 왜 이리 심각할꼬?”

정순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16548867511763.jpg“…….”

지안이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하자, 정순도 함께 심각해져서 물었다.

16548867564412.png“왜, 도하 때문에 그래? 도하가 속상하게 했니?”

지안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16548867511763.jpg“저, 할머님…….”

지안이 말을 하려다 차마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자 정순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16548867564412.png“아이구, 지안아 이 할미 숨넘어가겠다. 대체 무슨 말인데, 그리 뜸을 들여.”

정순이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들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16548867511763.jpg“할머님, 저…… 곧, 이 저택을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얼마간 테라스 주변으로 낯선 침묵이 깔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순이 입을 열었다.

16548867564412.png“그게 무슨 소리야. 저택을 나가다니?”

지안은 주름진 눈꺼풀을 연신 끔뻑이는 정순을 차마 보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16548867511763.jpg“그게 사실은…….”

쾅. 지안이 입술을 떼기 무섭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도하가 뜨거운 시선으로 지안을 쓱 훑고는 나지막이 내뱉었다.

1654886751177.png“이제 이곳이 아니라…… 회사로 출근해야 하거든요.”

그의 말에 정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48867564412.png“출……근?”

이번에도 도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1654886751177.png“네.”

16548867564412.png“그러니까 지안이가 출근을 한단 소리니?”

정순이 되묻자, 도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1654886751177.png“네. 저랑 같이 출근할 겁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지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1654886751177.png“방금 강 박사한테 출근해도 되는 몸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만, 아직 완전히 나은 게 아니니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요.”

도하가 ‘완전히 나은 게 아니다’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자, 지안의 눈이 맥없이 흔들렸다. 그의 말은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니, 함부로 떠날 궁리 말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들렸다.

1654886751177.png“당분간 서지안 씨 아니, 아내가 제 비서 역할을 할 겁니다. 옆에서 몸 상태도 체크해 주고요."

16548867511763.jpg“……!”

놀란 지안의 귓전으로 태연하다 못해 짓궂기까지 한 음성이 들려왔다.

1654886751177.png“그렇지,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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