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애틋한 신혼부부2022.02.21.
“잘 생각했다. 도하 혼자 출근한다고 하면 많이 불안했을 텐데. 우리 지안이가 도하 곁을 지켜준다니, 이 할미는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정순이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순의 주름진 얼굴 위로 안도의 미소가 번지자, 지안은 차마 입에 꼭 물고 있던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그게 아니에요, 할머님. 비서라뇨.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걸요. 지안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도하를 휙 쏘아봤다. 비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비서라니. 그녀가 눈빛으로 항의했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그 짓궂은 미소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다 나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일상에 복귀할 때까지’라는 말로 맺었던 구두계약이 얼마나 위험했던 것인지도. 강 박사가 완치 판정을 내려도 그가 아니라고, 아직 후유증이 남았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그와 했던 약속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게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거였다. 뒤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지안이 출근하게 되었단 소식에, 정순은 언 50년 전 자신이 처음 출근하던 날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지안은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중간중간 슬며시 미소 지었지만 실은 정신이 전부 딴 데 가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담소를 나눈 건지도 모를 정도였다. 겨우 안방을 빠져나온 지안은 앞서 걷는 도하를 불러세웠다.
“저기요!”
평소와 달리 앙칼진 목소리에 도하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설마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죠. 지안은 기가 찼지만 애써 인내하며 말했다.
“잠깐 정원에서 산책 좀 하시겠어요? 볕도 좋은데.”
도하는 산책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볕보다 더 뜨거워 보이는 지안의 눈빛에 흥미가 돌았다.
“그러지.”
먼저 산책을 제안한 사람답지 않게 지안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침묵뿐인 산책이 무료한 듯 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 아니었나. 정말 산책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
그의 말에 지안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아직 머릿속에 할 말을 정리 중이었다. 바위 같은 남자를 상대하려면, 단단히 준비해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의 재촉에 더는 꾸물댈 수만도 없었다. 지안은 최대한 정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권도하 씨 비서로 회사에 출근한다고요?”
지안이 제 일을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돌려 말하자, 말속의 의도를 읽은 도하가 픽 웃으며 내뱉었다.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묻지?”
그의 태연한 반응에 지안은 조금씩 평정심을 잃었다.
“분명 약속하셨을 텐데요. 정상적으로 일상에 복귀하게 되면, 혼인 무효 소송이든 이혼이든 해주신다고.”
“그랬었지.”
“……근데, 왜. 저를 또 비서로 만드신 거죠?”
“아직 정상적인 일상 복귀가 아니니까. 당신도 들었잖아.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라고. 방심하면 다시 무너진다고.”
도하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실황으로 보니 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설령 완전히 나은 게 아니라 해도 저는 간병인일 뿐, 당신 비서가 아니라고요.”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내 옆에 머물며 내 몸 상태를 챙겨주는 것.”
“하지만…….”
“한동안 내 건강에 대한 불신의 시선들이 따라다닐 거야. 오너의 건강 리스크만큼 치명적인 문제는 없거든.”
“…….”
“간병인이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곤란해. 비서라면 모를까.”
“……하지만 비서는 한 번도.”
“당신은 하나만 생각해. 내가 회사에 복귀했다가 얼마 못 가 다시 쓰러지면? 그땐 어떻게 책임질 거지?”
“……!”
“기약 없는 간병이 적성에 맞다면 그리 해도 좋아.”
“……뭐라고요?”
“그게 아니라면, 당신 의무를 끝까지 다하도록 해. 내가 다 나을 때까지 내 옆을 지키는 일을.”
3년간 지극정성 보살폈던 게 처음으로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인 남자인 줄 알았다면, 조금 대충, 설렁설렁, 요령 부릴 것 다 부려가면서 보살필 걸 그랬어. 지안은 억울함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선, 이번엔 확실히 해둬야겠다고. 어리석은 구두계약 따윈 절대 하지 않겠다고.
“좋아요.”
“…….”
“권도하 씨 비서…… 하도록 할게요.”
지안이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자 도하의 짙은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대신…… 계약서를 써 주세요.”
그녀의 눈동자와 목소리에 강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계약서?”
“네. 계약 기간과 내용이 정확히 들어간 정식 계약서 말이에요.”
도하는 잠시 허를 찔린 듯 생각에 잠겼다. 정순이 왜 그렇게 그녀를 똘똘하다, 야무지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계약 기간이 적힌 계약서를 써 달라니.
“……언제 나을 줄 알고 계약 기간을 적지?”
“이 부분은 강 박사님께 조언을 구해보죠. 정확하진 않더라도 통계학적 측면에서 기간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뭐?”
지안의 반격에 도하의 입술이 잠시 허탈하게 벌어졌다.
“권도하 씨 말대로 저도 제 의무를 다하고 싶어요. 환자를 두고 도망치고 싶진 않으니까. 하지만…….”
“……?”
“권도하 씨 개인적인 느낌에 맡기다간,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뭐?”
“모르잖아요. 권도하 씨 환갑, 고희연, 구순 때까지도 제가 옆에서 간병 생활을 하고 있을지.”
“……!”
“함께 늙어갈 만큼…… 우리가 애틋한 사이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종신계약 같은 건 미연에 방지하자구요.”
지안은 그 말을 하고는 돌아서 그에게 등을 보였다. 도하는 둔중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근데 아프다기보다 웃음이 나왔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지. 작은 체구와 달리 단단한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당돌하고 당찬 여자인 줄은 몰랐다. 여태껏 맺어온 어떤 관계에서도 도하는 쉽게 당황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제 앞에서 당돌하게 굴거나, 그를 제압하려 달려든 순간도 없었고. 하지만 눈앞의 여자. 제 어깨에도 차지 않을 작은 여자가 방금 보여준 건 꽤 놀랍고 흥미로운 모습이었다. 도하는 저만치 멀어져 혼자 저택으로 들어가는 지안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계악서를 써 달라고? 당연한 요구라는 걸 알지만, 무슨 까닭에선지 내키지 않았다. 더군다나 계약 기간이 명시된 계약서는 더더욱. 그럼 이 관계에 끝이 정해진다는 소리였으니까. 어느새 눈앞에서 지안의 뒷모습마저 사라지고 없자, 도하의 눈이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 후유. 지안은 그제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도하의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꼭 해야 할 이야기는 얼추 다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비서를 하겠다고 한 건 잘한 일이 맞나. 신중히 고민해볼 시간도 없이, 쫓기듯 뱉어버린 말이라 뒤늦게 근심이 따라왔다. 언뜻 생각했을 때 비서는 간병인과 비슷한 점이 꽤 많았다. 옆에서 누군가의 일을 제 일처럼 살피고 보필한다는 점이. 다른 점이라면, 간병인은 환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일한다면, 비서와 대표는 상하 관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무거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환자 권도하도 이렇게 힘든데, 상사가 된 권도하라면……!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서늘한 전기가 통했다. 시계를 돌려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면 비서도, 계약도 하지 않겠다고. 이대로 모든 걸 종결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게 뻔하지만. 똑똑. 복잡한 지안의 머릿속으로 웬 노크 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이, 거기 있니?”
정순이었다.
“어? 네. 할머님!”
지안이 얼른 다가가 문을 열자, 그 앞에 정순이 생기 넘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지안아, 어서 나갈 준비 하렴.”
“……네?”
“어서.”
“어디, 가시게요?”
“그래. 얼른 준비하고 나와. 어여.”
정순은 다짜고짜 지안에게 준비하라는 말만 남긴 후 자리를 떴다. 같은 핏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순과 도하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이럴 때 보면 피는 속일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불도저 같은 면모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왠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지안은 얼른 2층으로 올라가 간단히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그녀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준비를 마친 정순이 현관 쪽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캐주얼한 슈트 차림의 도하가 보였다. 저 사람도 같이 가는 건가. 지안의 얼굴로 불편한 긴장이 번졌다. 지안이 그쪽으로 오자, 정순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토닥토닥했다.
“자, 그럼 가볼까?”
들뜬 정순의 귓가로 지안이 넌지시 물었다.
“할머님, 근데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우리 지안이 출근하려면 준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준비요?”
지안이 눈을 크게 뜨고 보자, 정순은 잠시 그녀에게서 떨어져 위아래를 빠르게 스캔했다. 그러곤 눈을 가늘게 만들더니 힘껏 고개를 저었다.
“칙칙한 옷이 우리 지안이 미모를 다 죽이잖니.”
지안은 그제야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간병 생활 중엔 딱히 외출할 일도 없어서, 지금 입고 있는 옷 또한 꽤 오래전에 샀던 거였다. 불편한 옷은 활동성이 떨어지기에, 디자인을 무시하고 품이 넉넉하고, 무난한 것으로 주로 입었었다.
“출근하려면 오피스룩 몇 벌은 있어야지.”
그제야 정순이 가려는 곳이 백화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저 불편한 남자가 동행하는 건지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백화점 VIP룸에 들어선 지안은 비로소 정순이 도하를 대동한 이유를 알게 됐다.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단정한 모습의 VIP룸 매니저가 정순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그래. 자네, 오랜만이네.”
“어머, 옆에는 권 대표님 아니신가요?”
매니저가 묻자, 정순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우리 도하가 이렇게나 건강해졌다네. 그리고 옆엔 우리 도하 색시야. 참하지?”
“어머, 그러셨구나!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래서 회장님 얼굴이 이렇게 좋아지셨군요.”
매니저의 지적할 데 없이 완벽한 리액션에 정순의 기분은 더 날아갔다. 정순은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도하의 건재함과 그 곁을 지키는 사랑스러운 지안을 자랑하고 싶었다. 정순의 마음을 엿본 지안은 왠지 모르게 짠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터억. 어느 참에 갑자기 날아온 도하의 손이 그녀의 손을 꾹 그러잡았다. 놀란 지안이 몸을 크게 웅크리며 목소리를 꾹 눌러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도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낮게 대답했다.
“직원이 보고 있잖아. 부부가 이렇게 남처럼 떨어져 있어서 되겠어?”
“……!”
“웃어.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지안은 힐끗 매니저를 응시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애써 건치를 내보였다. 얼어붙었던 얼굴 위로 힘겹게 피어난 미소. 그 모습을 본 매니저가 지나치지 않고 말했다.
“신혼부부라서 그런가. 두 분이 정말 애틋해 보이세요. 회장님, 정말 흐뭇하시겠어요.”
그 말에 화답하듯 도하는 더 힘을 주어 지안의 손을 움켜쥐었다. 맞닿은 손에서 전해지는 뜨겁다 못해 익을 것 같은 온기. 두 뺨이 붉게 익은 지안의 잇새로 더운 숨이 겨우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