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부부 계약서2022.03.14.
어두운 한강 변 주차장. 하린은 고급 세단 운전석에 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수석 쪽 문이 열리더니, 검정 모자에 까만 마스크를 쓴 젊은 남자가 올라탔다. 하린은 다급히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부탁한 건 어떻게 됐죠?”
“그거 정말 너무하시네. 아직 숨도 못 돌렸잖습니까?”
남자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하린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런 그녀를 표정 없이 바라보던 남자가 옷 속에 감추고 있던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내려놨다. 반짝이는 네일 장식이 박힌 하린의 손이 분주하게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에는 몇 장의 서류가 담겨 있었다. 그중 맨 앞장은 지안의 증명사진이 박혀 있는 이력서였다. 하린은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이력서를 눈으로 빠르게 훑은 뒤 남자에게 말했다.
“이런 도움 안 되는 것 말고, 다른 게 더 있겠죠?”
남자는 피식 웃으며 거드름을 피우다 툭 내뱉었다.
“권도하 대표와 서지안이라는 여자관계가 가장 궁금하다셨죠?”
“……뭐 알아낸 게 있나요?”
“권도하 대표 할머니가 간병인으로 들어온 서지안을 돈으로 매수한 모양입니다. 식물인간인 제 손주와 결혼하면 유산을 다 준다고.”
“……!”
하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돈 때문에 혼수상태인 남자와 결혼을 하다니! 사진 속 지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던 하린의 눈빛으로 지독한 경멸이 어렸다. 하린은 잔뜩 힘이 들어간 눈으로 다시 조수석을 응시했다.
“그게 알아낸 정보의 전부는 아니겠죠?”
“……보시다시피 별거 없는 여자라. 아, 하나 걸리는 게 있긴 한데.”
“……말해 보세요. 어서.”
“서지안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빠라는 사람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고, 얼마 후 엄마도 맞바람이 나서 가출을 했답니다.”
하린은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완전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네. 어쩐지 천박함이 줄줄 흐르더라니. 그 피가 어디 안 갔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엄마라는 여자는 그때 만난 남자랑 중국 쪽에 자리 잡아 사는 것 같고, 문제는 이 서지안 아빠라는 작자인데…….”
“……왜요?”
하린이 재촉하듯 쳐다보자, 남자는 목을 가다듬고 느긋하게 말했다.
“입금해 주신 건 서지안에 대해 알아봐 주는 삯이지, 서지안 아빠를 파보려면 추가금을 치르셔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남자의 말에 하린의 눈이 갈고리처럼 째졌다.
“……별거 안 나오면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그녀의 앙칼진 말에도 남자는 여유롭게 웃어넘기며 대꾸했다.
“저, 이일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닙니다. 척하면 척이에요. 맛보기로 좀 읊어보자면…….”
“…….”
“그 아빠라는 작자가 바람난 여자가 아주 유명한 꽃뱀이었다죠. 있는 돈, 없는 돈 다 여자한테 털리고 나중엔 도박에도 손을 대고, 술독에 빠져 음주운전, 폭행, 강도 별의별 전과가 다 있더군요.”
“……!”
하린의 두 눈에 흥미로운 빛이 스몄다.
“이 아빠라는 작자만 다시 나타나도, 사모님이 원하는 그림은 나올 것 같은데…….”
“……그런데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
“그 사람이 몇 년째 잠수 중이랍니다. 사망신고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 나간 흔적도 없고. 왠지 구린 냄새가 난단 말이죠…… 자, 이제 사모님이 결정하시죠. 어떻게 할까요? 파볼까요,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둘까요?”
하린의 눈에 피어난 불꽃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떡밥을 던진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정해진 대답을 기다렸다. 하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뗐다.
“……얼마를 더 드리면 되죠?”
목표를 달성한 남자의 눈이 한껏 휘어졌다.
*** 소파에 기대앉은 도하는 심각한 얼굴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 앞에 지안이 결재를 기다리는 비서처럼 대기 중이었다. [계약 종료일 : 계약일로부터 2개월 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문구. 못을 박듯 적어놓은 기간에 도하의 눈이 크게 일그러졌다. 지안은 그런 도하의 안색을 살피며 덧붙였다.
“보시면서 궁금한 점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계약 자체가 못마땅한 도하는 그 말을 무시한 채 서류를 살폈다. [계약 기간 내 주의 사항] [1. 권도하는 본인 스스로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2. 서지안은 권도하의 건강이 완벽히 회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3. 권도하와 서지안은 서로 배려하고 다투지 않도록 노력한다. (할머니께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 순조롭게 넘어가던 그의 눈이 이어지는 조항 앞에서, 돌부리에 걸린 듯 그대로 멈춰 섰다. [4. 권도하와 서지안은 법적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스킨십을 비롯한 불순한 신체접촉 등을 일절 금한다.] 문서 중간쯤, 도하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을 보고 지안은 금세 알아차렸다. 무엇이 그의 시선을 붙들고 있는지. 그녀 또한 고민 끝에 삽입한 조항이었다. 어젯밤, 그의 손에 이끌려 몸이 고꾸라지며 속절없이 닿게 된 두 입술. 그 뜨겁고 아찔한 상황을 또다시 반복할 순 없었다. 오늘 오전, 상쾌한 아침을 후끈하게 만들었던 육체 꽈배기 같은 것도. 지안은 그때마다 미친 듯 폭주하는 심장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몰랐다. 이러다간 도하가 아니라 자신이 환자가 될 것 같았다. 잠시 한곳을 오래 보고 있던 도하가 나지막이 뱉었다.
“……계약 기간 내 주의 사항, 4번 조항.”
“……네?”
“4번은 삭제하는 게 좋겠군.”
“그건 안 돼요.”
“……뭐?”
지안은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불필요한 접촉으로 서로 괜한 감정 소모를 할 필요 없잖아요.”
“……감정 소모?”
“네. 한 번씩 그런 접촉이 있을 때마다, 별의별 감정을 다 느끼게 되거든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하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뱉었다.
“……느꼈다고?”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가 뱉은 네 음절의 말이 순간 이상하게 들렸다. 앞뒤 다 자르고 뱉으니 더 그랬다.
“느꼈다는 말이 그, 그런 뜻이 아니구요.”
지안이 당황해 말을 버벅댔다.
“그런 뜻? 내가 뭐라고 했나?”
도하가 되레 황당하다는 듯 되묻자 지안은 말문이 막혔다.
“…….”
“사고라며. 그깟 사고에 많은 감정을 담아 생각하는 줄 미처 몰랐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무슨 말을 해도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느낌이었다.
“아뇨.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제대로 해명하고 싶어도, 입술이 멋대로 경직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도하는 살짝 눈을 올려 3번 조항을 응시했다. [3. 권도하와 서지안은 서로를 배려하고 다투지 않도록 노력한다.(할머니께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러곤 다시 말을 이었다.
“4번 조항이 3번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드는데.”
“……네?”
지안은 제 앞에 놓아둔, 도하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이게 어긋난다뇨?”
지안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자, 도하는 그녀와 잠시 눈을 맞췄다. 열이 오른 듯 붉게 물든 뺨과 긴장이 느껴지는 여린 눈동자. 초조함에 안으로 말아 넣은 입술. 그 모습이 아이처럼 귀엽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런 얼굴을 한 채 저를 빤히 바라보는 여자를 옆에 두고, 어떤 접촉도 할 수 없다니. 차라리 고문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도하는 온몸으로 밀려드는 뜨거운 열기를 몰아내며 차분히 말했다.
“할머니께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적혀 있잖아.”
“……네. 맞아요.”
지안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눈을 끔뻑였다.
“황정순 회장님, 우리 할머니를 잘 모르나 본데.”
“……?”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고, 예리하신 분이지. 우리가 서로 털끝 하나도 닿지 않으려고 애쓰는 걸 모르실 거 같아?”
“……!”
지안은 조금 당황해 그대로 굳었다. 최대한 오류를 줄이려고 몇 번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한 계약서였다. 지안은 다 포기해도 주의 사항 4번 항목만은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너무도 쉽게 멘탈이 휘청거렸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외국에서 유학을 마친 후, 현장에서 뛰기까지 한 남자에게, 스물여덟 인생에서 처음 쓴 계약서를 들이민 것 자체가 실수였다. 도하는 의기소침해진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사실 3번 조항보다 더 문제인 건, 2번이라고. [2. 서지안은 권도하의 건강이 회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그녀와 있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온몸이 뜨거워지고 주체할 수 없는 남자의 욕망이 깃드는데. 우연이나 사고를 빙자한 겨우 작은 스킨십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견디라는 것인가. 적어도 숨통 트일 곳 하나쯤은 남겨 두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지금으로서 그녀가 그의 건강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4번 같은 악조항을 만들지 않는 거였다. 도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했다.
“아주 삭제하는 건 좀 그렇고, 예외를 두는 건 어떨까요?”
“……예외?”
“할머님 앞에서만 예외로 하자고요.”
“…….”
도하는 가만히 생각했다. 부부가 정순 앞에서 할 수 있는 스킨십이라고 해봐야, 손을 잡거나 포옹 정도가 전부일 거다. 빠릿빠릿한 지안이라면, 분명 그걸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일 거다. 하지만 도하는 그녀의 얕은수에 넘어가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당신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네?”
지안이 눈을 크게 떠 그의 얼굴에 고정했다.
“오래 있다 보니, 여기 저택 사람들이 전부 다 당신 편이라고 믿고 있겠지.”
“……?”
“아냐.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할머니 사람들이야.”
“……!”
“할머니 앞에서만 스킨십을 하고 다정한 척해봤자 소용없단 소리야. 보는 눈들은 알 테니까. 우리가 다른 곳에선 손끝조차 스치지 않는다는 걸.”
그의 말에 지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하는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확인 사살하듯 뱉었다.
“이 엉터리 계약서론 안 되겠어! 다시 쓰든지, 아님 없던 일로 하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