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심장이 쿵2022.03.18.
정식 출근 하루 전. 도하는 사전점검 차 홀로 회사에 나갔다. 출근을 결정한 순간부터 두뇌의 절반이 회사 생각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누군가를 떠올리던 도하의 입가로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도하가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 멀리서 그를 알아본 직원들이 동작을 멈추고 눈을 껌뻑였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기 저 남자…… 권도하 대표님 아니야?”
“어디 어디?”
“맞네! 우리 회사에 저런 훈남, 권 대표님 말고 없잖아!”
죽었다던, 혹은 죽기 일보 직전이라던 사람이 누구보다 단단한 다리로 걸어오는 모습이라니. 큰 사고로 더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라던 소문은 다 가짜였다. 그의 얼굴은 사고 전과 다를 바 없이 완벽했고 여전히 잘생겼다. 고생 한번 해보지 않은 듯 말끔한 피부, 날렵하고 다부진 이목구비, 쉽게 다가가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운 특유의 분위기까지. 3년간 의식이 없었던 탓에, 혼자 늙지도 않은 건가. 그의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그 큰 사고를 겪고도, 구김 하나 없는 도하의 모습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자 직원들은 마치 불사조를 보듯 도하를 신격화하는 분위기였고, 여자 직원들은 어떤 공격을 당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을 보듯 눈을 반짝였다. 도하는 그런 시선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깨가 무거워졌다. 멈춰버린 지난 3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바위처럼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고 온 사람에게 더 이상 두려운 건 없었다. 도하가 로비를 반쯤 지났을 즈음, 저만치서 누군가 바쁘게 그의 앞으로 뛰어왔다. 헝클어진 더벅머리, 눈 밑에 자리한 짙은 다크서클, 타이를 하지 않은 자유로운 셔츠 차림. 도하는 한승훈 팀장의 행색을 보고, 최소 3일 이상 밤샘 작업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회사 일에 너무 영혼을 갈아 넣지 말라고 조언해도 한 팀장은 좀처럼 들어먹질 않았다. 상명하복을 들며 억지로 쉬라고 명령해도, 한 팀장에겐 그저 소귀에 경 읽기였다.
“대표님!”
급하게 달려 나온 모양인지, 한 팀장은 실내용 슬리퍼 차림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한 팀장.”
도하가 말하자 한 팀장은 울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한번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도하는 말없이 팔을 벌려 가장 믿고 의지하는 부하직원을 안았다. 그가 그동안 홀로 감내했을 고충이 고스란히 밀려와 도하의 가슴에 닿았다. 한 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일할 땐 누구보다 냉철하고 무서운 상사이지만, 한 번 정을 준 사람에겐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을 내어주는 사람이 바로 그라는 걸. 도하가 없는 동안, 홀로 거센 시련의 풍파를 맞은 한 팀장은 오래도록 그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또한, 도하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회의실로 올라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갔다. 한 팀장은 먼저 지난 3년간 격변한 시장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보시는 게 현재 대한민국 딜리버리 사업 관련 기업 점유율입니다.”
도하가 사고를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선발주자였을 케이원 그룹은 점유율에서도 한참 뒤처져 있었다.
“현재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는 CTM의 3년간 성장 그래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프로젝트 화면으로 세준이 세운 회사, CTM의 성장 그래프가 올라왔다. 도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까만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래프를 따라 읽었다. 한참 동안 미동 없이 화면을 보던 도하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도하가 금세 무언가를 알아차리자, 한 팀장은 숙연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속 성장 그래프. 결과만으로 보면 놀라운 성적이었지만, 실로 과정이 의심스러운 그래프였다.
“이렇게 극단적인 성장 곡선은…… 보나 마나 감춰진 문제가 많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도하의 말에 한 팀장이 공감하며 말했다.
“왜, 북한이 건물을 올릴 때, 하루에 한 층을 올리는 속도전을 한다고 하잖습니까. 그 과정에 노동자의 안전이나 건강, 복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죠.”
한 팀장은 돌려 말했지만, 도하는 금방 알아차렸다. 세준의 CTM이 이룬 위대한 실적 너머의 어두컴컴한 내막을. 그 뒤에 숨은 숱한 희생을.
*** CTM 그룹 회의실.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테이블 앞에 회사 주요 경영진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중심 자리에 세준이 보였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길게 빼 느른하게 앉은 세준은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된다, 안 된다라고만 할 거면 왜 회의를 합니까!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회사가 당신들한테 그 많은 돈을 주고 있는 거 아닙니까!”
“…….”
회의실 안, 직원들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앉았다. 세준은 직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뾰족하게 훑다가, 제 아버지뻘인 심 부장을 콕 찍어 물었다.
“심 부장님, 부장님도 ‘더 빠른 30분 컷 배송’이 아직 정착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까?”
심 부장의 이마에 깊게 패어 있던 주름이 더 짙어졌다.
“…….”
심 부장은 여태껏 세준의 무자비한 폭주에도 토 하나 달지 않던 심복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심 부장!”
세준이 호통치듯 부르자,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현재 발 빠른 새벽 배송도 여러 문제가 쏟아지고 있는 실정이라, 이 상황에서 더 속도를 내다가는…….”
심 부장이 이견을 비추자, 세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제 분을 못 이겨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쾅. 소리에 놀란 직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하루 이틀 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심각했다. 회의실 창가 쪽으로 걸어간 세준의 눈에 아직도 시위 중인 무리가 보였다. 떼어내도 금세 다시 붙이는 현수막엔 이런 글들이 보였다. [노동 인권 무시한 무자비한 CTM은 각성하라!] [CTM이 죽인 우리 딸 살려내라!] [CTM 물류창고에서 쓰러진 남편, 우리 애 아빠를 도와주세요!] 굳게 말아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회사 주변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세준이 소리치자, 관련 부서 담당자인 이 팀장이 빠릿하게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최대한 빨리 모두 끌어내라고 하겠습니다.”
세준은 갈고리눈으로 이 팀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또 한 번, 이 광경을 내가 보게 되는 날엔, 이 팀장이 제일 먼저 끌려나갈 거란 것만 알고 계세요.”
세준은 그 말을 던지곤, 직원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회의실을 떠났다. 그가 대표실로 돌아오자, 노 실장은 따라 들어와 오늘 일정을 브리핑했다.
“대표님, 오후엔 대한 미디어 그룹 정 대표님과 오찬이 잡혀 있고, 조금 전에 민중일보 박 대표님께서 전화 달라고 하셨습니다.”
노 실장의 말에 세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언제까지 언론에 순종적인 개처럼 굴어야 하는 겁니까. 그놈의 미디어 그룹 대표와 식사는 왜 자꾸 잡는 거냐고요!”
노 실장은 세준의 폭발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여러모로 CTM이 주목받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노동 인권 무시니, 노동자 과로사니 하는 불필요한 이슈가 언론에 드러나선 안 됩니다. 그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이미지로 미디어에 담겨야 합니다.”
세준은 가끔 노 실장이 CTM의 오너인 양 선을 넘는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조언이나 판단은 늘 옳은 편이었다. 이런 쪽에 전혀 감이 없는 자신에겐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노 실장이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곳에 그를 둔 것이었고. 마음 같아선, 듣기 싫은 소리를 여과 없이 하는 그를 쳐내도 수백 번 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그럴 수 없었다. 오늘 오전, 도하가 케이원에 출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터라 더 그랬다. 돌이켜 보면, 오늘 세준이 평소 이상으로 날카로웠던 건, 직원들을 닦달하고 재촉할 수밖에 없었던 건 모두 도하 때문이었다. 도하가 일선으로 복귀한다는 나쁜 소식에 그의 마음이 쫓기고 있었다. *** 지안은 빈 병실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른걸레로 협탁을 닦던 그녀의 눈에 탁상용 거울 하나가 보였다. 지안은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한동안 유심히 들여다봤다. 몸에 열이 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뺨이 벌겋게 익어 있을 줄이야. 후유. 지안은 긴 숨을 내쉬었다. 청소를 하다 보면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을까 싶어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아침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았다. 지안은 출근을 위해 격식 있는 슈트를 차려입은 도하를 보고서야 실감했다. 그가 많이 회복되었고, 이제 회사에 나가 일하게 될 거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마치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는 부모의 마음 같았다. 괜찮을까, 혹시라도 다시 몸에 무리가 오면 어쩌지? 어서 이 복잡한 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싶다는 마음 이면에는, 여전히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도하가 앞장서 현관 쪽을 향해 걸었고, 지안은 그의 완벽한 슈트 핏을 보며 따라 걸었다. 몸에 잘 맞는 슈트를 입으니, 원래도 긴 팔다리가 더 길고 훤칠해 보였다. 어떤 옷이든 잘 소화해낼 옷걸이이지만, 그래도 다신 환자복만은 입지 말길. 그런 생각들이 지안의 머릿속을 스치던 순간이었다. 앞서 걷던 도하가 갑자기 휙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넥타이가 조금 불편한데 고쳐주겠어?”
갑작스러운 요청에 지안은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넥타이 수정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커다란 몸이 너무도 가까이 붙어 왔기 때문이었다. 침을 삼키기에도 불편한 거리. 지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목 쪽으로 손을 올렸다. 살짝 중심이 어긋난 부위를 잘 잡아 매듭을 고쳤다. 그리고 잠시 한 발자국 물러나 잘 되었는지를 확인했다.
“된 것 같네요.”
지안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는 순간, 그가 단숨에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함 없이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예고 없이 훅 들어온 포옹. 심장이 미친 듯 요동치는 탓에 지안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품에서 나던 향기가 좋았단 것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녀가 벗어나려 몸에 힘을 넣어도, 부둥켜안은 팔의 힘이 얼마나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가 스르르 손의 힘을 풀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다녀올게. 여보.”
“……!”
주워 담을 시간도 없이 또 한 번 곤두박질치는 심장. 그녀가 넋 나간 얼굴로 멍때리고 있던 그때, 바로 뒤에서 웬 인기척이 들렸다.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야로 웃음을 꾹 참으며 서 있는 정순이 보였다.
“하, 할머님!”
“괜찮아, 괜찮아! 신혼 땐 다 그렇게 깨가 쏟아지는 법이야. 하하.”
정순의 경쾌함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지안은 도하가 저지른 포옹의 의미를 생각했다. 긴 실랑이 끝에 결코 삭제할 수밖에 없었던 ‘스킨십 불가 조항’. 반면, 그는 다른 조항 하나는 기똥차게 이행하고 있었다. 할머니 앞에서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조항을. 하지만 이렇게 아무 예고도 없이, 심장 쿵 떨어지게, 괜히 사람 오해하게끔 훅 들어오는 건, 엄연한 반칙이다. 아암, 반칙이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