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노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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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노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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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노크맨
2022.04.22.
샤워기 물줄기가 대리석 타일 위로 힘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지안은 물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빗겨나 멍하니 바닥을 바라봤다.
이따금씩 차가운 물방울이 발등이나 종아리를 적셔올 때면, 꿈이 아니라는 게 실감 났다.
열감이 느껴지는 두 볼과 여전히 두방망이질 쳐대는 심장.
뭘 잘못 먹은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온몸이 공기 중에 붕 뜬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자꾸만 귓가를 어지럽히는 누군가의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좋아하게 됐어. 서지안, 당신. 그래서 이렇게 옆에 있으면, 자꾸 안고 싶고 또 입 맞추고 싶어져.’
‘기다릴게. 당신도 내 맘과 같아질 때까지. 3년이 걸린대도, 아니 그 이상이 걸린대도.’
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고백.
차갑고 서늘한 말만 하던 입술이 들려준,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진심 어린 고백.
그 고백이 귓가를 타고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와 지안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들었다.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고백이라서일까.
아니면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남자에게 듣게 된 진심이라서일까.
이런 고백에는 면역력이랄 게 없는 심장이 평정심을 잃고 제멋대로 요동쳤다.
사춘기를 지나던 학창 시절, 단짝 소진이 첫사랑 선배에게 고백받았을 때. 온종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있던 게 떠올랐다.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해 보이던 눈동자, 허공을 보며 피식 웃다가 어느샌가 슬픈 일이 있는 것처럼 깊어지던 눈.
지안은 욕실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이 마치 그때 그 시절, 소진과 겹쳐 보였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몸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지안은 시원한 물줄기 속으로 천천히 몸을 이끌었다.
***
아침 회의에 불참한 세준은 CTM이 아닌 D그룹 사옥에 와 있었다.
VIP 주차장 한곳에서 대기하며 차창 밖을 살피는 그의 눈이 무섭게 번쩍였다.
도 회장이 세준의 모든 연락을 피하고 있었기에, 그를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김 기사, 도 회장님 차량 번호 기억하죠?”
“차량 번호 말씀이십니까? 그, 그게 차종은 기억하지만 차 번호까지는…….”
“수행 가이드 암기한 거 맞습니까? VIP들 차량 번호, 휴대폰 번호 모두 암기하라고 분명히 적혀 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도 회장님 차가 최근에 바뀌는 바람에.”
“뭐? 그걸 핑계라고 대는 겁니까!”
세준이 거친 숨을 뿜어내던 그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한 대의 고급 세단이 보였다.
“대표님!”
도 회장의 차를 알아본 김 기사가 다급히 세준을 불렀다.
세준은 도 회장의 차가 프라이빗한 주차 공간에 멈춰 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수행비서가 내려 도 회장이 탄 뒷좌석 문을 여는 순간, 얼른 따라 내렸다.
그리고 전속으로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흰 머리칼과 검은 머리칼이 적절히 섞여 얼핏 보면 예술가 느낌이 나는 도 회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세준은 재빨리 외쳤다.
“도 회장님!”
“…….”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던 도 회장의 눈이 순간 커졌다가, 세준을 알아보곤 금세 가늘게 변했다.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냉랭한 음성이, 마치 마음이 떠난 옛 연인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세준은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요새 제 연락도 받질 않으시고, 어젠 또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요.”
“연락은 비서 통해 전했다시피 내가 바쁜 탓이었고, 이상한 소리라는 건 뭔가?”
“……회장님께서 저희 CTM 해외 투자 관련 결정권을 갑작스럽게 철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세준이 고개를 숙인 채 절망한 듯 말했지만, 도 회장은 신경 쓰지 않고 답했다.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은 아니라네. 이렇게 되어 미안하지만, 우리도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니 아쉬워도 겸허히 받아들이게나. 그럼.”
도 회장이 그 말을 남기고 지나쳐 가려 하자, 세준은 다급히 붙잡았다.
“저, 회장님!”
“……아직 뭐 더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가?”
“이유라도 얘기해 주십시오. 왜 이런 결정을 내리신 건지 말입니다.”
도 회장은 우뚝 멈춰 선 채 먼 허공을 보며 말했다.
“자네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네.”
“……신뢰요?”
“그래.”
“……혹시 제가 회장님께 실수한 거라도 있을까요?”
“아니, 그런 걸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닐세.”
“그럼, 어떤 것 때문에 신뢰가 깨진 겁니까, 회장님!”
세준이 구차하게 매달리자, 도 회장은 눈썹 사이를 좁히며 단호히 말했다.
“그건 자네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알 걸세.”
“네?”
“자네를 말하는 주변인들의 평가, 자네 기업을 함께 꾸려가는 직원들의 평가, 그리고 상품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평가가 바로 자네가 살아온 삶을 대변하고 있을 테니.”
“……!”
“아, 그리고 경영 선배로서 한마디 하겠네. 아류가 되지 않으려면, 내실부터 다져야 할 걸세. 지금 당장은 앞서가고 있다고 해도 원조가 속도를 내면, 아류는 금세 무너지기 마련이라네.”
“…….”
“아류가 왜 아류인 줄 아나? 겉모습만 베껴서 그럴싸해 보일 뿐, 속은 빈털터리라서일세. 자네를 만나게 되면 이 이야길 꼭 해주고 싶었네. 그럼, 이만 가 보게나.”
“…….”
세준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저 저만치 멀어져가는 도 회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케이원 그룹, 대 회의실.
태블릿 화면을 살피던 한 팀장이 도하를 향해 말했다.
“대표님, 방금 미국 박람회 측에서 메일이 한 통 왔는데요. 저희 쪽 브랜드 네임을 보내 달라고 하네요.”
“브랜드 네임 말입니까?”
도하가 눈썹을 높게 치켜들며 묻자, 한 팀장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CTM으로 치면, 치타처럼 빠르게 배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담은 ‘치타맨’이 그쪽 브랜드 네임이잖습니까. 저희도 케이원 그룹 딜리버리 사업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이름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팀장의 이야기를 듣던 도하가 회의실 안 다른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다들 자유롭게 말씀해 보십시오.”
직원들이 고민하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을 보며 도하는 덧붙였다.
“브랜드 네이밍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건…… 제가 처음 이 사업을 구상했을 때, 그때의 초심이 담긴 이름이었으면 합니다.”
도하는 10년 전,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었다.
“핵심은 빠른 배송 사업이지만, 본질은 스피드에 있지 않습니다.”
빠른 배송 사업의 본질이 스피드에 있지 않다는 아이러니한 말에 직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상품을 빨리 전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고객들의 마음을 빠르게 만족시키는 게 바로 이 사업의 핵심입니다. 고객들을 빠르게 만족시키려면, 단순히 스피드만 빨라서 되는 게 아닙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배달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상품이 훼손되었거나, 배달자가 무리한 나머지 쓰러진다면, 그게 고객들이 진정 만족하는 배달일까요?”
그의 말에 곧았던 직원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끄덕 움직였다.
“5분, 10분 빠르고 늦고보다 중요한 건, 고객들이 만족할만한 과정으로 상품을 전달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희생되어선 안 되고요.”
그때 직원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말씀하십시오.”
도하가 그를 향해 말하자, 까만 안경을 쓴 직원이 안경 코를 추켜 올리며 입술을 뗐다.
“대표님 말씀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과정을 중시하다가는 업계 1위 CTM을 앞서긴 힘들 것 같습니다. 듣기로 그곳은 배달자의 휴식이나 복지 개념을 철저히 무시하고, 무조건 스피드를 내서 빠르게 배달을 완수한다고 알고 있거든요.”
직원의 말에 도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옳은 지적입니다. 지금 당장 CTM을 앞서려면, CTM보다 훨씬 더 살인적인 스케줄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겁니다. 새벽 배송이 아닌, 획기적인 10분 배송 같은 걸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도하의 흡입력 있는 언변에 직원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금세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휴식이나 복지 개념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오래 일할 수 있을까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배달자들의 휴식과 복지환경이 제대로 제공되는 곳이 나타난다면. 그들은 과연 계속 CTM만을 고집할까요?”
직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면 기업은 절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뭐든 CTM의 반대로 갈 겁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정도를 향해 걸어갈 겁니다. 이건 제가 처음 이 사업을 기획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가장 중요한 신념입니다.”
도하의 이야기를 들은 직원들은 숙연한 눈빛을 빛냈다.
직원들이 하나둘 네임에 관한 아이디어를 냈지만, 모두가 엄지를 치켜들만한 이름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사업의 정체성을 잘 드러낼 줄 수 있고,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이름.
그런 네임에 대한 갈증이 갈급해지던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 도하의 심장이 습관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에겐 익숙한 소리였다.
병실 안에 홀로 있을 때,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하염없이 노크 소리가 들리길, 그녀가 와주길 기다렸었다.
3년을 잠들어 있다가 다시 깨어나, 새것처럼 느껴지던 청신경은 일정하고 청아한 누군가의 노크 소리를 정확히 기억했다.
소리만으로도 문 너머, 노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조금 전 회의가 시작될 무렵, 회의실로 들어와 직원들의 음료 주문을 받아 갔던 출근 이틀 차, 병아리 비서 서지안.
그녀가 음료를 가지고 돌아온 게 분명했다.
지난밤, 저도 모르게 쏟아버린 진심 때문일까.
그녀가 문밖에서 노크해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단순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심장을,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지안이 걸어 들어오는 장면이 그의 눈에 슬로 모션으로 펼쳐졌다.
지안도 저를 보는 게 어색한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게 조금은 야속하면서도 귀여웠다.
음료를 나눠주고 그녀가 회의실을 나갈 때까지 도하는 잠시 시간이 멎은 듯 머리가 멍했다.
그리고 지안이 나간 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머릿속에 한 단어가 콕 박혔다.
[노크맨]
배달인이 고객의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는 소리이자, 고객의 가슴까지 두드리는 소리.
똑똑.
도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노크맨은 어떻습니까?”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노크맨’을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입에는 쫙 붙는데요?”
도하가 차분히 그 안에 담긴 뜻을 설명했다.
“쉽게는 문을 두드리는 행위의 노크이자, 고객의 가슴 깊숙한 곳까지 두드려,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배달 사업. 이게 내가 생각한 이 사업의 진정성과 맞닿은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아이디어 갈증에 허덕이던 직원들은 자신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기막힌 네이밍에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그리고 여자 직원 하나가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요즘 현대인들이 가장 설렐 때가 택배 문자를 받았을 때나, 택배 초인종 소리 들었을 때라고 하잖아요. 그 소리만 들으면 설레서 버선발로 현관까지 뛰어가고요. 그런 의미에서 노크라는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도하는 모처럼 밝게 웃으며 조금 전 지안이 나간 문 쪽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속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오늘도 한 건 했군, 서지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