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이럴 거면 깨어나지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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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이럴 거면 깨어나지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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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이럴 거면 깨어나지 말지
2022.06.24.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가 잇따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밤 9시경, 노스 필라델피아의 한 골목에서 현지 주민들이 한 명의 아시아인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벌였습니다.]
CCTV 화면을 확대한 자료 영상에 가해자들과 피해자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나왔다.
구석에 몰린 채 폭력의 희생양이 된 한 남자와 거침없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붓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나오자, 지안은 순간 미간을 구겼다.
[피해자는 사업차 미국에 방문한 30대 한국인 남성으로, 사고 직후 경찰에 발견되어 현재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 중입니다.]
스피커로 흘러나온 보도에 지안은 순간 머리카락 끝이 바짝 곤두섰다.
사업차 미국에 방문한 30대 한국인 남성.
사업차 이곳에 방문한 30대 한국인 남성이 도하, 한 사람만이 아닐 텐데, 까닭 모를 불길함이 그녀의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게다가 조금 전 스치듯 지나간 CCTV 속 피해자의 실루엣이 왠지 모르게 그와 흡사해 보였다.
지안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아니야, 도하 씨 아닐 거야.’
속으로 자신을 달래며, 지안은 손에 든 휴대폰을 꾹 쥐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길게 느껴지는 통화 연결음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시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듣고 싶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중저음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 대신, 휴대폰 자체 ARS 연결음이 흘러나오자 지안은 얼른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몇 분 후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아무리 바빠도, 짧게라도 전화를 받아주던 남자였다. 그 생각을 하며 연신 휴대폰을 들고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연결 실패.
두려움과 불안감이 그녀의 작은 어깨를 거세게 쥐어 비틀었다.
‘계약 준비 때문에 정신없어서 그런 걸 거야, 휴대폰을 멀리 치워 둬서 못 본 걸 수도 있고.’
세 번째엔 왠지 받을 것 같단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두 번의 통화 연결 실패 후 10분쯤 지났을 무렵, 지안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연결음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다시 이어질 때마다 그녀는 숨을 꾹 참았다가 다시 내쉬었다.
계속되는 연결음에 청신경이 무뎌지려던 찰나,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와 연결되듯 낯선 소음이 밀려왔다.
“……여보세요?”
지안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자, 수화기 너머에서 웬 여자가 영어로 답을 했다. 하지만 너무 빠른 원어민의 말을 그녀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도하 씨? 도하 씨?”
지안이 연신 그의 이름을 부르자, 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이번엔 최대한 느릿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호스피털.”
긴 문장 중 호스피털, 병원이라는 말이 그녀의 심장 정중앙에 화살처럼 꽂혔다.
“……!”
그제야 한꺼번에 몰아닥쳐 구분할 수 없었던 수화기 너머의 소음들이 하나하나 들려왔다.
먼 곳에서 나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와 병원 내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긴박한 안내 방송, 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의료기기 소음과 소란한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수화기 너머의 장소는 병원이 분명했다.
지안은 조금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물었다.
“거기 어느 병원인가요?”
수화기 너머의 여자도 영어가 서툰 그녀를 배려하듯 또박또박 대답했다.
“토마스 제퍼슨 유니버시티 호스피털”
***
외투 하나를 챙겨 호텔 밖으로 뛰어나온 지안은 급히 택시를 잡았다.
“토마스 제퍼슨 유니버시티 병원으로 가 주세요.”
홀로 택시에 올라타 어둠에 묻힌 도시를 바라보는데, 왠지 모를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도하가 곁에 있을 땐, 그저 아름답고 멋지게만 느껴지던 도시의 야경이 이젠 두렵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가 옆에 없다는 게, 이렇게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복잡한 마음이 한시도 그녀를 가만두지 않고 괴롭혔다.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그가 왜 병원에 있는 건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짧은 영어 실력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듣는 순간 뇌리에 바로 각인되었던 병원 이름이 창밖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턴 심장이 이미 몸 밖으로 튀어나온 듯 위태롭게 뛰었다.
‘도하 씨,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어야 해요.’
택시에서 내린 지안은 한달음에 병원 입구로 달려갔다. 중간중간 다릿심이 빠져 발목이 꺾이고, 몸이 휘청거리며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다급한 마음이 힘없는 몸을 멱살 끌듯 붙잡아 이끌었다.
응급실 앞에 도착한 그녀가 그곳을 정신없이 서성이자, 간호사 한 명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간호사가 지친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지안은 버벅대며 말했다.
“내 남편, 그러니까 마이 허즈밴드…….”
그러곤 손가락을 뻗어 응급실 안을 가리켰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동공과 핏기 없는 안색, 시퍼렇게 질린 그녀의 입술을 보던 간호사가 다시금 툭 뱉었다.
“남편분, 이름이 어떻게 되죠?”
지안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권도하.”
“…….”
차트를 넘기던 간호사가 그런 환자는 없다며 고개를 젓자, 지안은 답답한 마음에 번역기 앱을 열었다.
“우리 남편 전화를 이 병원 간호사분이 받았어요. 그분이 제 남편이 여기 있다고 했고요.”
번역 앱을 내밀어 들려주자, 간호사가 말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들은 아직 명부에 없을 수도 있으니, 키와 인상착의를 자세히 말해 주시겠어요?”
번역 앱을 확인한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대답했다.
“한국인이고, 키는 185 정도, 흰 피부에 이목구비가 날카롭고, 옷은…….”
그녀의 말을 들은 간호사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하곤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다시 나왔다.
지안은 눈에 힘을 바짝 넣고 간호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간호사가 손짓하자, 지안은 입술을 꾹 문 채 걸음을 옮겼다.
셀 수 없이 많은 침대 사이로 아픈 환자들의 얼굴과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지안은 고통스러운 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저벅저벅.
앞서 걷던 간호사의 걸음이 어느 침대 앞에서 멈춰 서자, 지안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엷은 가림막 너머,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커다란 남자의 어렴풋이 모습이 보였다.
“보호자 분이 말한 인상착의와 가장 가까운 아시아계 남자 환자입니다. 아직 의식이 없어서, 한국인인지 확인은 못 했지만요.”
간호사는 설명을 마치자마자, 호출을 받고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지안은 위태롭게 뛰는 심장박동을 애써 외면하며, 천천히 가림막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녀의 다리가 휘청,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붓고 피 칠갑이 된 남자.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꾹 참았던 눈물이 뜨겁게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도, 도하 씨…….”
가득 고였던 눈물이 세찬 빗방울처럼 툭툭 떨어져 내렸다.
지안은 미동도 없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떨군 채 오열했다.
“도하 씨, 안 돼요. 다시 전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요.”
의식 없이 잠든 남자를 보자, 지난 3년의 길고 긴 기다림이, 그 인고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도하 씨, 제발…… 제발 일어나 봐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남자.
지안은 애타게,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도하 씨, 도하 씨…….”
‘도하 씨’ 하고 불렀을 때, ‘왜, 서지안’하고 그가 대답해 주던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 순간들이었는지.
그와 함께 거닐었던 정원과 함께 본 낯선 나라의 야경, 함께 출퇴근하던 회사와 함께 나눴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가끔 폭 안겨야 했던 그의 널따란 품과 불의의 사고처럼 맞닿았던 뜨거운 입술.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사소한 기억의 조각이 흐르는 눈물방울에 젖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도하 씨, 빨리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도하 씨가 이렇게 있으면 나 또 무섭단 말이에요.”
“…….”
제 울먹임과 목소리만 돌아오는 이 익숙한 적막을 그녀는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 없고, 그의 눈빛을 느껴본 적 없을 때라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냥 다정하진 않아도 툭툭 내뱉는 말에 담긴 따스한 진심을, 저를 향해 고정된 태양보다 뜨거운 눈빛을 느껴버린 이상, 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마음의 고백.
“지켜준다면서요. 우리 할머니 앞에서 약속했던 거 벌써 까먹었어요?”
흐느낌을 따라 그녀의 작고 가녀린 어깨가 부서지듯 흔들렸다.
지안은 심장이 깨질듯한 슬픔을 서툰 원망에 감춰 내보냈다.
“몸만 집채만 하게 크지, 맨날 사람을 걱정시키고. 이게 뭐야, 무슨 남자가 이러냐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굳게 고정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얼굴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시선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침대 위에 고개를 파묻듯 완전히 머리를 숙인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깨어나지 말지, 왜 깨어나서 사람 마음을 다 흔들어놓고…….”
“…….”
서운한 마음에 욱하고, 진심 아닌 말을 뱉고 나니 의식이 없을 때도, 제 말을 다 듣고 있었다던 그의 얘기가 떠올랐다.
혹시 조금 전 말도 그가 듣진 않았을까, 마음이 쓰여 다시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깨어나길 백 번, 천 번 잘했어요. 당신 목소리, 눈빛, 마음. 느껴볼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에 더 없을 행운이었으니까.”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는 낯선 나라의 응급실이라서,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사고라서.
그녀의 심장 깊은 곳에 걸려있던, 그래서 아무에게도 꺼낸 적 없는 진심이 단숨에 터져 나왔다.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나직이 속삭였다.
“빨리 일어나서 우리 좀 나가요, 병원 분위기 이제 지겹잖아요.”
“…….”
“이제 내가 해 줄게요. 내 목소리, 내 눈빛 그리고……. 마음. 도하 씨가 전부 다 느낄 수 있게. 이제 내가 보여줄 차례라고요.”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처럼 날아왔다.
“정말이야, 그 말!”
“……!”
지안은 놀라 커진 눈으로 바로 앞의 남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하지만 남자는 몸만 거기 있을 뿐, 여전히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처럼 그의 영혼이라도 다녀간 것일까.
잠시 멍해진 채 넋을 놓고 있던 그녀의 어깨로 묵직한 무언가가 툭 내려앉았다.
지안은 경직된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그러곤 귀신을 본 듯 놀라서 몸을 떨며 말했다.
“……도, 도하 씨?”
생채기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의 건강한 남자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해, 어서 가자며. 이제 당신이 보여줄 차례라며.”
도하의 만면 위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