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다신 헷갈리지 않도록
(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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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다신 헷갈리지 않도록
2022.06.27.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계속되는 안내음에 노 실장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때 검은 슈트 차림의 남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실장님!”
“그래, 알아봤나?”
“대표님 휴대폰 위치가 마지막으로 잡힌 곳이 노스 필리로 나왔습니다. 골목골목을 다 뒤졌는데도 대표님은 찾지 못했고요.”
“……!”
노 실장의 이마 위로 굵은 주름이 깊게 패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노 실장은 마음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세준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노 실장! 지금 월권하는 거야? 내가 내 돈을 쓰겠다는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지?’
‘대표님, 지금 송금할 수 있는 돈은, 회사 자금뿐입니다. 대표님이라 해도, 마음대로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어디에 쓰시는지 용도조차 불분명하다면요.’
‘잡소리 그만하고 당장 부쳐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 해고할 테니까!’
평소였다면 전화를 끊자마자 돈을 송금했을 테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박람회에서 방출된 후 마주한 세준의 눈빛은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큰 사고를 치고도 남을 만큼 위험천만해 보였다.
그런 사람에게 거액의 돈을 송금한다는 건, 위험한 도박에 베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그 돈은 개인 돈이 아닌 회사 자금이었다. 추후 문제가 생기면 노 실장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거였다.
위기의 때에는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 하기보다, 그냥 가만히 흘러가도록 지켜보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노 실장은 연륜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피 끓는 나이의 세준은 자꾸만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가 하려는 것들에선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마지막 통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준이 1만 달러를 가지고 나갔다는 걸 이미 들었는데, 다시 10만 달러를 부치라고 재촉하는 걸 보면 정상적인 상황은 분명 아니었다.
돈을 보내지 않은 건 다시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지만, 이후 세준과 연락이 닿지 않자 사뭇 불안해졌다.
그때,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갔던 직원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
“노 실장님!”
“무슨 일이지?”
“혹시 몰라서 노스 필리에 정보통 하나를 심어두고 왔는데, 그자가 의심 가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의심 가는 사건?”
“몇 시간 전, 노스 필리에서 유명한 조직원 세 명이 아시아계 남자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사건이 있어 난리가 아니었답니다.”
“뭐?”
이야기를 듣던 노 실장의 눈이 순간 튀어나올 듯 커졌다.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고…….”
직원의 보고에 노 실장은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그 일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해!”
***
눈꺼풀 위에 납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여긴 또 어디야.’
세준은 피 맛이 감도는 입술을 굳게 물고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 힘을 다해 눈을 떠봐도 희미한 천장 불빛 정도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두덩이 퉁퉁 부어올라 좁아진 시야로 밝은 빛 한줄기가 들어오자, 금세 현기증이 느껴졌다.
“으윽.”
그는 버티지 못하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고막으로 삐이이, 하는 이명이 들리며 골이 흔들리는 것 같은 두통이 몰려왔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통증에 신음하던 그의 뇌리로 기억이 끊긴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10만 달러와 기다림에 성난 세 남자, 아니 세 짐승의 습격.
사람이 사람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죽음이 코앞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세준은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때의 아찔함을 떠올리자,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끊어질 듯 다시 아파져 왔다.
다행히 죽진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찢어지고 멍든 곳의 통증이 온몸을 장악했다.
정신이 조금씩 또렷해지자, 조금 전 무의식에 꾸었던 꿈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가 누운 곳 바로 옆에서 웬 여자가 하염없이 울부짖는 꿈이었다.
‘빨리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세준 씨가 이렇게 있으면 나 무섭단 말이에요.’
‘빨리 일어나서 우리 나가요.’
어서 일어나라고 깨어나라고 울부짖던 여자의 음성.
슬픔에 젖은 그 목소리가 너무도 애처롭게 들려서 마치 자신이 슬픈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우는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꿈속에서도 눈을 떠보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모른다.
하지만 끝내 눈은 떠지지 않았고, 여자를 볼 수도 없었다.
‘꿈에 나온 그 여자는 대체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민하린?
잠시 하린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세준은 1초도 안 돼 생각을 접었다.
그녀는 지세준이 의식을 잃어 깨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일 번으로 줄행랑을 칠 사람이었다.
허탈한 웃음을 뱉던 그는 이내 통증을 느낀 듯 안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 주변에는 저를 위해 그렇게 울어줄, 깨어나라고 울부짖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입 안에서 감도는 피 맛보다도 더 쓰고 아린 맛이 전신으로 퍼졌다.
***
도하는 입가로 실없이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방법이 없었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먼 데를 보며 걸었다.
조금 전, 제 안으로 날아든 작고 따듯한 품. 지안이 먼저 제 품 안으로 뛰어 들어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 엉뚱한 곳에 앉아 울고 있던 여자.
‘이제 내가 해 줄게요. 내 목소리, 내 눈빛 그리고……. 마음. 도하 씨가 전부 다 느낄 수 있게. 이제 내가 보여줄 차례라고요.’
무슨 오해가 있었건, 그건 나중 문제였다.
울부짖는 여자의 고백에 빨리 대답하지 않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도하는 재빨리 대답부터 했다.
‘뭐 해, 어서 가자며. 이제 당신이 보여줄 차례라며.’
‘…….’
그 말에 커다란 눈망울에 가득 고인 눈물이 위태롭게 흔들리다 분홍빛 뺨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곤 순식간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 품으로 거칠게 뛰어 들어왔다.
타악.
‘도하 씨!’
‘……!’
‘……흑흑.’
그녀는 그가 입고 있던 셔츠의 가슴 부분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괜찮아. 나 이렇게 멀쩡하잖아.’
도하가 그녀의 마른 등을 토닥이며 달래듯 말했지만, 작은 몸에 일은 떨림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그의 품 안에서 한참을 더 흐느끼던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했다.
‘……무서웠어요. 다신, 다신 이 목소리 듣지 못할까 봐. 도하 씨가 날 볼 수 없을까 봐.’
‘……!’
한 번도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 여자라서, 그녀의 눈물이 도하의 가슴을 더 크게 흔들었다.
지안의 눈은 아주 오래전, 커다란 세상 속에 홀로 던져졌던 그 시절의 작은 아이처럼 잔뜩 겁먹은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본 이상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
‘절대 혼자 남겨두지 않을 거야. 남겨져도 내가 남겨지지.’
도하는 심장을 꺼내 보여주고 싶어질 정도로 갈급했다. 이게 얼마나 간절한 바람인지, 얼마나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지.
그는 뜨겁게 일렁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향해 입술을 가져가자,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은 눈꺼풀 위에 뜨거운 입술이 닿는 순간, 지안은 엷게 몸을 떨었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분홍빛 뺨도 입술로 어루만져 주었다.
마지막은 가장 닿고 싶었던, 그녀의 숨결이 있는 입술.
단숨에 폭 겹쳐진 두 입술이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부드럽게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부드러웠던 접촉은 점점 더 깊고 진해졌다. 더 깊숙이, 더 온전히 서로를 느끼기 위해 과감해지는 붉은 요동침.
한곳에 머물지 않고 양쪽을 번갈아 가며 기울어지는 고개의 각도가 아찔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안심해도 좋다며, 여기 이렇게 건강하게 있다며, 입술에서 입술로 전해주는 생생한 숨결 그리고 온기.
그녀의 입술 끝에 배어 있는 눈물조차 달았다.
“도하 씨?”
조금 전, 숨 막혔던 그 순간의 떨림을 곱씹던 도하의 귓가로 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방금 내 이야기 못 들었죠?”
“……어, 무슨 얘기 했어?”
“나와서 다 설명해 준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지안이 여전히 젖은 눈으로 재촉하듯 말하자, 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박람회장에서 한 팀장이 과로로 쓰러졌었어.”
“……네? 한 팀장님이요?”
“케이원의 유명한 일벌레거든. 박람회 준비 때문에 서울에서도 하루에 2시간 이상을 잔 적이 없대. 미국 와서도 마찬가지고.”
“……어떡해.”
“그래서 한 팀장을 업고 응급실로 뛰어갔는데, 그때 옷에서 휴대폰이 떨어졌었나 봐.”
“……아.”
“그걸 간호사가 주워서 당신 전화를 받았던 거고.”
지안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자, 이번에는 도하의 눈이 골똘해졌다.
“그러는 당신은? 왜 다른 남자 앞에서 그러고 있었던 거지? 얼마나 구슬프게 울어대는지, 그 앞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고.”
“……그게, 도하 씨 기다리다 뉴스를 봤어요.”
“뉴스? 한 팀장이 쓰러진 게 뉴스에도 나오나?”
“아뇨. 그게 아니고. 뉴스에 하필 아시안 혐오 범죄가 나오는 거예요. 피해자가 사업차 방문한 30대 한국 남성이라고 소개되는데…….”
“……설마, 그게 나라고 생각한 거야?”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CCTV 속 남자가 키도 크고, 도하 씨랑 뭔가 비슷한 것도 같고, 더군다나 전화도 병원 사람이 받으니까…….”
지안이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듯 눈썹 사이를 힘껏 좁히자, 도하가 말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얼굴 보면 모르나, 누워 있는 남자가 남편인지 아닌지.”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다쳤기도 하고, 찬찬히 뜯어볼 겨를도 없었어요. 이미 내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
도하는 지안의 허리에 팔을 둘러 그녀의 몸을 제 몸에 바짝 붙이며 말했다.
“……안 되겠어. 다신 헷갈리지 못하게 만들어 줘야지.”
“……네?”
“얼굴 말고, 다른 곳으로도 나를 알아볼 수 있게.”
“……그, 그게 무슨.”
도하는 대답 대신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눈에 왠지 모를 야릇한 생기가 넘실거리자, 지안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
쏴아아.
도하가 욕실에 들어간 뒤 물소리가 들려오자, 지안의 심장은 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다신 헷갈리지 못하게 만들어 줘야지. 얼굴 말고, 다른 곳으로도 나를 알아볼 수 있게.’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눈에 어린 짙은 욕망을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오늘, 오늘 밤만은 그 욕망을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란 것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시작이 어떠한들,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있었다.
부부.
부부라면 마땅히, 아니 진작에 거쳐야 했을 통과의례.
온 생각과 신경이 거기에 쏠리자, 지안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게다가 그에게 큰일이 난 줄 알고 놀랐던 가슴이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앉아 있는 것조차 숨이 막혀서 객실 안을 빙빙 돌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