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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자비는 여기까지 (61/110)


61화. 자비는 여기까지
202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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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바 위에 놓인 와인을 본 지안은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정순의 생일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한 번씩 마셨던 와인.

처음엔 그 맛을 잘 몰랐지만, 이젠 포도주의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향을 제법 즐길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접 와인병을 따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오프너를 들고 코르크 마개 위를 서성이던 그녀는 기억을 짜내듯 이맛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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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렇게 했던 것 같은데.”

메이드들이 하는 걸 어깨너머로 봤었지만, 직접 하려니 쉽지 않았다.

서툰 솜씨에 오프너가 자꾸만 코르크 마개 위를 이탈했다.

지안이 낑낑대고 있는 사이,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그녀는 커다래진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은 도하가 동굴처럼 깊고 그윽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워 가운 사이로 은근하게 드러난 몸을 보자, 지안은 그대로 숨죽인 채 얼어버렸다.

조명을 받아 짙게 음영이 진 몸이 왠지 모르게 위험해 보였다.

이리저리 바쁘게 도망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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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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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하의 시선이 와인 쪽으로 향하자, 지안은 얼른 병을 품 안에 감추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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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치 불량한 짓을 하다가 선생님에게 걸린 학생처럼 행동이 어색하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도하는 단숨에 팔을 잡아당겨 그녀가 품 안에 감추고 있던 것을 끈질기게 확인했다. 그러곤 놀란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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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잖아?”

지안은 머릿속이 뒤엉킨 듯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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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이 좀 나서요.”

그녀가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먼 데를 보며 말하자, 도하는 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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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 날 때 물 대신 술을 마시는 여자인 줄 미처 몰라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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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가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당황한 듯 새빨개진 얼굴로 해명하려고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도하의 눈에는 마냥 귀여워 보였다.

왜 갈증이 났는지.

뭐, 가끔, 왜 그럴 때가…… 대체 어떤 때인지.

그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오늘 밤 그녀를 깊이 안고 싶다는 걸, 그녀의 전부를 느끼고 싶다는 걸 은연중에 뱉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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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어. 다신 헷갈리지 못하게 만들어 줘야지. 얼굴 말고, 다른 곳으로도 나를 알아볼 수 있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얼굴로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긴장과 두려움이 드리웠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왜,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미니바 위에 비치된 와인을 발견한 찾게 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았지만, 당황해 버벅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그는 짓궂은 남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도하는 와인병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나직이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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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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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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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오늘 밤에는.”

도하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지자, 지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안으로 깊이 말아 넣었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더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미니바 위에 비치된 와인을 발견한 꺼내든 건 그와 깊어가는 이 밤을 기념하며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긴장을 몰아내려고 한 선택이었는데, 그게 지금 보니 가장 위험한 선택이 되어 있었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 그리고 오롯이 둘뿐인 호텔 객실 안.

이제 막 제 마음을 모두 고백해버린 여자와 그 마음을 누구보다 기다렸을 남자.

샤워 후 몸과 마음이 정갈해진 상태에서 함께 마시는 와인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차오를 대로 차오른 남자의 욕망을 터뜨리기에 가장 적합하고 위험한 기폭제.

지안은 잽싸게 도리질하며 미니바 위에 비치된 와인을 발견한 원래 있던 자리로 가져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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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술은 안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괜히 마셨다가 내일 두통이 올 수도 있고, 도하 씨도 아직 술을 마시기에는…….”

어!

하지만 단숨에 와인병은 도하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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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서툰 손길이 생채기를 내고 간 코르크 마개를 그가 단번에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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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정도는 괜찮아. 몸의 긴장도 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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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간에…… 몸의 긴장은 풀어서 뭐 하려고.

아무렇지 않게 툭 뱉은 한마디가 사람을 더 얼어붙게 한다는 걸 그는 알기나 할까.

지안은 멍한 눈으로 와인병과 두 개의 잔을 든 채 티 테이블 앞으로 가는 그를 지켜봤다.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때 도하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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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거기 그렇게 서 있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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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미니바 위에 비치된 와인을 발견한 마시려 했던 것도, 떨어진 곳에 지금처럼 홀로 멍하니 서 있는 것도 그의 눈에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투명한 잔 속에 붉은 포도주가 반쯤 채워지자, 지안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다셨다.

그녀처럼 채워진 잔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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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우리가 처음 함께 마시는 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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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지안도 괜스레 감상에 젖어 들었다.

다신 깨어나지 못할 줄 알았던 남자와 마주 앉아 이렇게 미니바 위에 비치된 와인을 마시게 되다니.

도하가 먼저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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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건배할까?”

지안은 말없이 와인잔을 들어 그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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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입안으로 들어간 보디감 좋은 와인이 식도를 따라 부드럽게 넘어갔다.

지안은 처음에는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마실 생각이었다. 하지만 달콤하고 풍부한 향이 혀끝에 닿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아껴 마신 잔의 바닥이 보일 즈음.

그의 말처럼 온몸에 기분 좋은 열기가 감돌면서, 스르르 몸의 긴장이 풀렸다.

와인과 함께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며 말랑말랑해지려던 순간 훅, 하고 날아든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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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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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말에 지안은 동그랗게 뜬 눈을 연신 깜빡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도하가 멋쩍은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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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난 후 당신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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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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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안, 당신 덕분에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어.”

갑작스러운 고백에 지안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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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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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쑥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신이 나를 깨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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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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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쁜 여자를,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를 못 보고 죽는 건 억울하다고. 아마도 내 영혼이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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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

깊고 그윽한 남자의 눈동자가 진심을 가득 담아 투명하게 빛났다.

그 눈빛에 빠져들듯 지안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도하는 가만히 잔을 내려두고 단숨에 그녀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한 손으로 그녀의 붉어진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다른 손으론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살포시 받히며 천천히 고개를 붙여왔다.

순식간에 맞닿은 입술에서 은은한 포도주 향이 났다. 달콤 쌉싸름한 그 맛을 더 깊이 느껴보려는 듯 집요하게 빨아당기는 입술.

그 사이를 드나드는 달콤한 숨결이 점점 더 가빠졌다.

더 깊고 뜨겁게 파고들어 오는 입술이 그녀의 것을 완전히 먹어 치우고 있었다.

쿵쾅쿵쾅.

지안이 가빠진 숨을 내쉬려 살짝 입술을 벌렸을 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짐승 같은 뜨거운 감각이 아찔하게 밀려 들어왔다.

예고 없이 밀려와 곳곳을 휘저어 놓는 붉고 뜨거운 존재감에 심장이 터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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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자, 도하는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자기 쪽으로 더 가까이 당겼다.

서로의 몸이 더 가까이 붙자,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잠시 입술을 뗀 그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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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로 가고 싶어.”

와인이라는 연료를 부어 더 활활 타오르는 까만 눈동자.

짐승처럼 거칠어진 숨소리가 위태롭게 들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잠시 브레이크를 잡고 허락을 구했다.

이대로 멈출 수 없게 만들어놓고, 뒤를 돌아볼 수 없게 심장을 마구 흔들어 놓고, 이제 와 묻는 건 무슨 소용일까.

지안은 요동치는 심장을 어찌하지 못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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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그 한마디가 도하의 가슴에 남아 있던 마지막 고삐를 완전히 풀어헤쳐 버렸다.

단단한 두 팔로 그녀를 들어 안은 도하는 단숨에 침대로 가 그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은은한 스탠드 조명 아래, 지안의 달뜬 얼굴이 아슬아슬하게 비쳤다.

도하는 그녀의 작은 몸 위로 천천히 올라가 다시금 입술을 붙였다.

다시 시작된 입맞춤은 원점이 아닌, 조금 전 멈췄던 속도, 그 뜨거움으로부터 다시 이어져 피어올랐다.

진한 입맞춤과 함께 그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여 그녀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침대 아래로 지안이 걸치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떨어진 다음, 그 위로 도하의 샤워가운이 떨어졌다.

한참을 돌려도 하나의 시야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어깨.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 몸을 보자, 처음 마주한 게 아닌데도 지안은 심장이 철렁했다.

제 위로 다가온 남자의 몸에 압도된 그녀의 눈이 겁먹은 듯 파르르 떨렸다.

지안의 눈동자에 드리운 두려움을 읽은 그가 나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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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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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안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낱 두려움 때문에, 이 뜨거운 감정을, 터질 것 같이 부푼 심장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만큼이나 그녀도 이 순간을, 이 시간을 원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녀의 두 번째 허락에 도하의 눈빛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배려와 자비는 거기까지.

그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눈빛이 되어, 짐승처럼 그녀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녹아내릴 듯 뜨거워진 입술은 잠시 놓아주고, 아직 탐험하지 못한 많은 곳을 향해 뻗어 나갔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을 하염없이 쓸어내리다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 듯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때마다 앙다문 지안의 입술 사이로 아찔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내는 낯선 소리가 그에겐 더 큰 자극제가 된 듯 도하는 더 거칠고 집요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굵디굵은 힘줄이 돋아난 손으로 그녀의 구석구석을 쓸어내리고 끌어안았다.

지안은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선 느낌에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점점 더 그의 몸이 가까워지고, 온몸으로 서로를 완전히 느끼게 된 순간, 지안의 눈가에 뜨거운 이슬이 맺혔다.

흐려진 시야로 올려다본 객실 천장은 밤새도록 위태롭게 흔들렸다.

3년을 잃은 남자의 밤은 쉬이 그칠 줄을 몰랐다.

어두운 밤이 푸르스름한 새벽이 되도록 그녀는 수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길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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