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배신자의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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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배신자의 배신자
2022.08.29.
도하의 집무실은 자기과시를 위해 각종 언론 기사와 상패를 전시해둔 세준의 집무실과는 완벽히 다른 분위기였다.
노 실장은 주인을 닮아 프로페셔널하고 깔끔한 느낌의 집무실을 말없이 둘러보고 있었다.
책장에 꽂힌 오래된 원서와 전문성이 느껴지는 경영 서적을 눈으로 훑던 그가 나직이 뱉었다.
“저 영문 원서는 절판된 지 오래라 국내에선 구하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
도하는 노 실장의 시선이 머문 곳을 확인하곤 나직이 대답했다.
“미국 유학 시절 오래된 북 스토어에서 구한 거로 기억합니다.”
노 실장은 유행하는 베스트셀러만 가득하던 세준의 책장을 떠올리며, 근본부터 다른 두 사람이 한때 절친한 사이였다는 사실이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하는 그런 그의 작은 눈짓, 몸짓을 경계 어린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비서가 커피를 내어주고 나가자, 도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게 있다고 하셨나요?”
노 실장은 도하의 단단한 눈동자를 마주 보다 슬그머니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
“……속도를 중시하는 산업에 종사하는 분답게 바로 용건부터 찾으시는군요.”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급한 마음에 불쑥 찾아왔다고. 급한 용건이 있다면 어서 말씀하셔야죠.”
“…….”
빈틈없는 도하의 말에 노 실장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도하에 대해선 워낙 숱하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대면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잠시 방심하고 있었다.
제 말 몇 마디에 쉽게 현혹되던 세준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바로 그라는 걸.
상대의 머릿속을 투시하듯 철저히 이성적인 눈빛부터, 단단한 목소리와 표정 없이 서늘한 분위기까지. 그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 앞에서 다른 꼼수는 통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자, 노 실장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권 대표님을 찾아온 건…….”
“…….”
“3년 전 사고, 그러니까 권 대표님이 긴 시간 의식불명으로 살아야 했던 그 사고에 관해 제가 알고 있는 바를 말씀드리려고 온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도하의 낯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3년 동안 잠잠했던 그 날의 사고에 관한 제보가 갑자기 빗발치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안의 친부인 영식을 비롯해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세준의 비서실장, 노형근까지.
하지만 도하는 크게 동요하지 않으려 애써 평정심을 잡았다.
어둠 속에 묻힌 진실을 건져 올리기 위해선 수많은 거짓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노 실장은 도하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늘 뉴스를 보셨을지 모르지만, 지세준 대표님은 권 대표님이 아시던 소싯적 그 친구가 아닙니다.”
“…….”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기본이고, 그러다 보니 급기야 사람을 사람 아닌 사물처럼 생각하시더군요.”
“……그래서요?”
“비단, 직원들만 그렇게 부속품 취급한 건 아닙니다. 가까운 친구도, 제 앞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3년 전 당시, 지 대표님은 그 걸림돌이 바로 권도하 대표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요.”
“……!”
도하는 영식을 통해 3년 전 사고에 세준이 깊이 관여해 있다는 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준의 최측근에게 그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날 새벽, 그분을 끝까지 말리지 못한 제 불찰이 큽니다. 지 대표님이 직접 운전대를 잡으신다고 하셨을 때, 이성을 잃은 그분 눈빛을 보고도 말리지 못한 제가…….”
노 실장의 말을 듣던 도하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 말은 그날 사고 차량을 세준이 직접 운전했다는 거였다.
세준이 3년 전 사고에 관여했다는 걸 짐작했으면서도, 직접 운전했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도하가 아는 세준은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제 손으로 직접 벌일 용기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 머릿속이 제멋대로 뒤엉켰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나가자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보였다.
세준이 직접 운전을 했다면, 영식이 모를 리 없었다. 영식은 세준의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뉴스에 나온 세준을 보고 자신에게 피로 회복제를 건넨 남자라고 바로 알아보았듯. 분명 당시 운전자는 세준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차에 올라타자마자 피로 회복제를 먹고 바로 정신을 잃었으니, 동행한 운전자가 바뀌었다 한들 몰랐을 거다.
조수석에 있던 본인이 운전석에 옮겨질 때도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정말 노 실장의 말이 사실일까. 정말 세준이 직접 운전대를 잡은 것일까.
생각이 그쯤 이르자, 도하의 가슴 속에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경계심이 발동했다.
그가 한 얘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노 실장은 대체 왜 이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고 있는 것일까.
이 비밀을 털어놓아 노형근이라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인이자, 비즈니스에 익숙한 도하는 낯선 사람과 만남에서 꼭 이 질문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 전 노 실장이 책장에서 가리켰던 절판된 경영학 원서에 나오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했다.
도하는 동굴처럼 울림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노형근 실장님.”
“……네.”
“갑자기 그날 일을 고백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가 있으십니까?”
예상치 못한 도하의 질문에 노 실장은 당황한 듯 굳은 입술을 허공에 뻐금거렸다.
“전 비서실장이라고 하셨으니, 이젠 지 대표와 함께 일하지 않는 거겠지요. 혹시 해고를 당해 분한 마음으로 진실을 밝히시려는 겁니까?”
“……!”
도하가 뾰족하게 추궁해오자 노 실장은 말문이 턱 막혔다.
소싯적 절친한 친구였던 친구가 저를 3년이나 의식불명으로 만든 사고의 주범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침착할 수 있다니.
아니, 침착하다 못해 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을 도리어 의심하듯 추궁하다니.
“지 대표가 그날 운전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조사하면 금방 밝혀낼 수 있겠지요. 다만 제가 지금 궁금한 건…… 노 실장님이 무슨 심경변화로 그날 일을 제게 털어놓게 되었는지 입니다. 그걸 알아야, 조금 전 제가 들은 고백에도 진정성과 신빙성이 실릴 것 같고요.”
말 그대로였다.
오랜 세월 세준의 수족으로 살아온 그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인지 도하는 저의를 알고 싶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상사와 갈라섰다고 곧바로 상사의 라이벌을 찾아온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도하는 세준과 노형근이라는 남자의 알력다툼에 괜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의 사고가, 3년의 길고 지난했던 고통의 시간이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혼자 감당한 3년이라면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겠지만, 지난 3년은 지안의 희생과 정순의 눈물로 얼룩진 시간이었다.
무엇이 진실이든, 이런 식의 더러운 싸움에 그날의 사고를 물고 늘어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말씀하시죠. 왜 갑자기 찾아와 이런 이야길 하는 건지.”
“저는 그저, 이제라도 진실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
도하는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을 하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진실은 노 실장님이 애쓰지 않아도 곧 드러날 겁니다. 진실이 드러나면, 그땐 알게 되겠죠. 대체 무엇을 감추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계시는 건지도.”
“……!”
한 음절 한 음절 뼈가 담겨 있는 도하의 목소리에 노 실장의 얼굴이 바짝 굳어갔다.
***
“뭐? 노형근이 누, 누굴 찾아갔다고?”
비서의 보고를 듣던 세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마저 끊긴 듯 세준은 거칠게 소리쳤다.
“당장, 당장 차 대기시켜!”
그가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복도를 지날 때, 빗발치는 벨 소리와 전화 응대를 하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성 파일 유출 건은 말씀드렸듯 사실무근입니다. 공개된 녹음 파일은 짜깁기된 조작 파일로, 저희 대표님과는 무관하다는 점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급하게 열린 임원진 회의에서 대다수는 세준이 잘못을 인정하고 대표직에서 잠시 내려오는 편을 권했지만, 세준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면 그동안 어렵게 일궈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그가 독불장군처럼 강구한 방법은 또 다른 거짓말이었다. 공개된 파일은 CTM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퍼뜨린 조작 파일로, 저는 그런 폭언을 한 적이 없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빠르게 끓어오르고 그만큼 또 빠르게 식는 대중들의 냄비근성을 생각하면, 이 고비만 넘기면 금세 잊힐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로비에 서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로비에 대기하고 있던 십수 명의 기자들이 그에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며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지세준 대표님! 공개된 음성 파일이 짜깁기되었다고 입장을 밝히셨는데요, 너튜브 소리 공학 연구 채널에서 분석한 결과, 이 파일은 절대 짜깁기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말씀 해 주시죠!”
“CTM 사옥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졌다는 추가 증언도 나왔는데요! 이게 사실인가요! 지세준 대표님! 대표님!”
갑자기 기자들이 소 떼처럼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세준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경호원에 둘러싸여 건물을 빠져나갔다.
겨우 세단 뒷좌석에 몸을 실은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쓸어올리며 뇌까렸다.
“……노형근! 감히, 감히 네가 나를 배신해?”
세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은하초등학교로 갑시다, 지금 당장!”
***
영식은 태블릿 화면 속 누군가의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화면을 뚫어지게 보던 그의 눈동자에서 순간 섬광이 일었다.
“그래. 이 얼굴! 이 얼굴이었어!”
영식의 격한 음성에 도하의 눈이 따라 커졌다.
태블릿 화면 속 노 실장의 얼굴이 영식의 손이 떨릴 때마다 함께 가늘게 흔들렸다.
“기억이…… 나십니까?”
“…….”
영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나도 심부름센터에 출근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아직 직원들 얼굴을 다 못 외웠었는데. 그날 새벽 운전한 양반 얼굴은 그중에서도 이상하게 낯설었어.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
“피부도 매끈하고 주름도 얼마 없는 게, 몸 쓰는 심부름센터 일보다 회사원 같은 직업이 어울려 보였거든.”
“……혹시 그자와 대화도 나누셨습니까?”
“그럼. 그 양반이 까만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길래, 시야가 잘 안 보일 것 같아서 내가 벗으라고 했었지. 근데 이 양반이 말을 안 듣길래 내가 억지로 벗겼는데. 모자를 줍다가 그 양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떨어진 거야.”
“……그래서요?”
“휴대폰 화면에 웬 어린 여자애 사진이 있길래 딸이냐고 물었지. 딸이라고 하더군. 일곱 살이라던가. 아무리 말을 시켜도 한마디도 안 하던 양반이, 딸 이야기할 땐 잠시 풀어지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