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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내 전부인 사람 (79/110)


79화. 내 전부인 사람
2022.09.02.


영식은 자신이 기억하는 그날의 운전자에 대해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도 딸이 하나 있다고 하니까, 그제야 그 양반도 경계심을 푸는 게 보이더군. 어쩌다 아내 이야기가 나왔는데, 안색이 어두워지는 게, 아마 애 엄마 없이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 같았어.”

“……!”

이야기를 듣던 도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영식을 만나기 전 알아본 노 실장의 가족관계와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사고 현장에 회사 대표가 왔을 때, 내가 운전한 양반에 대해 말했는데, 자기 직원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거야. 내가 술에 취해 환각이라도 본 것처럼 취급하더군.”

“……그랬었군요.”

“잘 알겠지만, 사고가 났던 곳이 얼마나 외진 곳이던가. 깜깜한 새벽 시간에 그 흔한 CCTV 하나도 없이, 지나가는 차도 없는 그런 곳에서 사고가 났으니. 후우.”

영식의 한숨이 깊어지자 도하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고 당일 차를 운전한 건 노 실장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세준이 있다는 것도 심증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 와 그들의 혐의를 밝히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노 실장은 그날 운전을 한 게 세준이라며 죄를 뒤집어씌우고 혼자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정황을 알게 된 이상 도하는 멈출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직접 운전대를 잡아 생명을 위협하고 소중한 시간을 앗아간 노 실장과 그 모든 일을 뒤에서 지시한 지세준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뿐이랴, 그들은 지안의 친분인 영식을 억울한 범죄자로 만들기까지 했다.

친부인 영식이 3년 전 사고의 범인으로 낙인찍혀 있는 이상, 지안도 불편한 마음을 안은 채 살아갈 게 분명했다.

이 일이 아니어도 여린 가슴에 상처가 많은 여자를 더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도하의 눈동자에 뜨거운 의지가 솟아나던 그때 문밖에서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도하는 몸에 밴 습관처럼 대꾸했다.


“네.”

작은 인기척과 함께 천천히 대표실 문이 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를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다, 당신.”

반쯤 열린 문틈으로 제법 큰 3단 도시락 하나를 품에 안은 지안이 보였다.


“도시락 가져다주려고 왔어요.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바쁜 거 보니까, 아마 점심도 못 챙겨 먹었을 것 같아서요.”

제법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지안이 열다 만 문을 모두 열어젖히자, 문에 가려 보이지 않던 대표실 안의 또 다른 존재가 드러났다.


“……!”

도하가 혼자 있을 거로 생각했던 그녀는 뜻밖의 불청객을 발견하곤, 놀란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스물여덟, 인생의 기억을 모두 끌어와도 그려지지 않던 아버지라는 사람의 얼굴.

할머니가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둔 사진을 통해 본 게 전부인 사람.

하지만 제 몸에 끓고 있는 뜨거운 피가 쓸데없이 강력하게 그를 알아보게 했다.

지안을 알아본 영식의 눈동자 또한 세차게 흔들리긴 마찬가지였다.


영식은 붉어진 눈망울을 그녀에게서 떼지 못한 채 나직이 읊조렸다.


“지…… 지안이 맞지?”

영식이 조심스레 묻자, 초점 없이 흔들리던 여린 눈동자가 어느 순간 사늘한 빛을 띠고 단단해졌다.

지안의 눈빛이 삽시간에 차갑게 변하자 도하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 내가 먼저 뵙자고 연락드렸으니까.”

“……!”

“3년 전 그날, 사고 차량 운전자에 대해 증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셔.”

“…….”

“그날 운전대를 잡은 진짜 범인을 본 사람도 서영식 씨뿐이고.”

도하가 해명하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지안의 눈매가 서서히 누그러졌다.

하지만 뼛속 깊이, 혈관 깊숙이 박인 경계심은 누그러짐 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지안은 영식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끔 몸의 각도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사뿐히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끼니 거르지 마세요. 다 나았다고 방심할 때가 가장 위험할 때니까.”

“그래. 잘 먹을게.”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소리 없이 몸을 돌렸다.

미련 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서더니 다시 몸을 돌려 영식에게 말했다.


“끝나고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시겠어요?”

 

***

회사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지안과 영식 앞으로 찻잔이 서빙되었다.

두 사람 사이로 감도는 끝없는 적막 때문인지 찻잔이 받침대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먼저 적막을 깬 건 영식이었다.


“잘 커 주었구나. 예쁘고 빛나는 숙녀로.”

“…….”

영식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애써 살가운 목소리를 내어보았지만, 지안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기만 했다.

영식은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나직이 뱉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더 미안하구나.”

“…….”

지안은 가만히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한참이 지나 말했다.


“미안하실 필요 없어요.”

“…….”

"그 어떤 부모한테도 받지 못할 사랑을 할머니한테 다 받고 자랐으니까. 자식을 쉽게 버릴 부모라면, 같이 살았더라도 큰 사랑 같은 건 주지 못했을 거예요.”

“……지안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부모 사랑은 몰라도, 그보다 더 큰 할머니 사랑을 받았어요. 그 부분에 대해선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정, 미안할 상대를 찾는다면 제가 아니라 할머니한테 미안해하셔야죠.”

“…….”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주면서도 항상 저한테 죄인처럼 사셨어요. 당신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며 자책하시면서.”

“……!”

“그러니까 저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우리 불쌍한 할머니. 할머니께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세요.”

“……그래. 내가 여러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았어.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 내가.”

영식이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자, 지안은 눈을 잠시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뵙자고 한 건, 부탁할 게 있어서예요.”

“…….”

영식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가만히 들자 지안은 나직이 뱉었다.


“한땐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부모한테 버림받은 대신, 나를 누구보다 사랑해주는 정말 고마운 가족이 생겼거든요.”

“…….”

“이전에 저한테 어떤 상처를 줬든 다 상관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그 사람들을 아프게 하면 그땐 정말 용서가 안 될 것 같아요.”

“…….”

“제 남편 권도하 씨, 시할머니 황정순 씨. 이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전부예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고요.”

“…….”

“무슨 이유로도 그 사람들을 아프게 하거나 힘들게 하면, 그땐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게 더더군다나 나를 버린 사람이라면…….”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번 일만 해결되면 멀리 떠나서 조용히 살도록 하마. 너희 친할머니 소원이자, 내 어머니 유언대로.”

“……네.”

“지안아, 미안하고 고맙다.”

“…….”

“이렇게 당당하고 씩씩하게 커 줘서.”

“……어쨌든 진실이 밝혀질 수 있게 잘 부탁드려요. 딸이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그 정도 부탁은 할 수 있는 거죠?”

“그럼. 할 수 있고말고. 더한 것도 부탁해도 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뭐든 못할까.”

지안이 처음으로 표정을 풀고 엷은 미소를 짓자, 영식도 눈썹 사이를 좁히며 힘껏 눈물을 참았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지안이 천천히 가방을 챙기자, 영식은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마음 같아선 28년 만에 만난 딸과 조금 더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붙잡을 자격도 없는 아비였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지안이 고개를 작게 끄덕여 인사하고는 홀연히 뒤로 돌아섰다.

말없이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영식의 눈이 어느 순간 갑자기 커졌다.


“……!”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지안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그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이따금 멎더니 지안이 나직이 속삭였다.


“어디에서 뭘 하든, 아프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고 싶어서요.”

“……!”

“미리 말하지만, 아버지 아프단 소식 들려오면 저 못 들은 척할 거거든요. 평생 할 간병이란 간병은 이골이 날 만큼 다 해서. 그리고 날 버린 아버지 간병해 줄 만큼 그리 속이 넓지 못해서.”

영식은 그렁그렁한 눈물을 눈가에 매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단 소식을 못 들은 척한다는 엄포보다, 아프지 말라는 걱정 어린 마음이 더 크게 와닿았다.


“……그래.”

“절대 아프지 마세요. 절 두고 나가셨을 때처럼 건강하게, 그렇게 사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 편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래, 절대 안 아플게. 약속하마.”

“……”

“지안아, 나도 하나만 부탁하마. 지안이 너도 절대 아프면 안 된다. 네가 아프면 꼭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이 죄인은 살 수 없어. 그러니 꼭 건강하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가 건강하게 잘 키워주셔서 여태껏 잔병치레 한번 없이 건강했으니까.”

“그래. 그래.”

“……그럼. 이번엔 정말 가 볼게요.”

지안은 전보다 가벼워진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영식은 긴 여운에 젖은 듯 지안이 떠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도하는 긴 통화연결음에 초조한 듯 입술을 말아 감았다.

28년 만에 아버지라는 존재와 대면한 그녀가 괜찮을지 걱정되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28년 만에 성인이 되어 만난 상황.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을 헤아리려 하면 할수록 가슴속에 걱정이 번졌다.

누구보다 강단 있고 당당한 그녀이지만,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속내엔 여린 마음과 꼭꼭 감춰둔 상처가 있었다.

그걸 알기에 도하는 그녀 혼자 영식을 만나게 한 게 잘한 일인지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 순간 휴대폰에서 이전과는 다른 신호음이 들렸다. 애타게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기적처럼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서지안!”

-깜짝이야. 도하 씨, 왜 그래요.

“지금 어디야?”

-방금 막 카페에서 나오는 길이에요.

“그럼 아직 우리 회사 근처겠네?”

-네. 지금 사옥 보면서 걷고 있어요.

“그럼 거기 있어! 내가 지금 갈 테니까.”

-네? 지, 지금요?

“그래. 지금 당장 당신 얼굴 봐야 할 것 같아.”

도하는 급하게 휴대폰을 내렸다.

휴대폰 스피커 너머에서 ‘도하 씨’ ‘도하 씨’ 부르는 목소리가 에코처럼 울렸다.

도하는 대표실을 나가 미친 듯 복도를 내달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시간을 기다릴 여유조차 없었다. 비상계단을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간절해 보였다.

회전식 로비 문을 빠져나와 주변을 살피던 그의 시선 끝에 저만치 가로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지안이 보였다.

도하는 미친 듯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지만, 지금은 그녀 곁에 있어 줘야 할 시간이라는 걸, 커다란 품으로 한껏 안아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서지안!”

숨이 턱 끝까지 찬 남자의 목소리에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단숨에 달려온 도하는 거칠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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