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지옥의 임기응변
(83/110)
83화. 지옥의 임기응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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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지옥의 임기응변
2022.09.16.
뉴스 속 도하를 발견한 지안은 하던 일을 멈추고 커다래진 눈을 화면에 고정시켰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남자인데, TV로 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낯선 사람처럼 생경하기만 했다.
선이 또렷하고 빚어낸 듯 완벽한 이목구비만으로도 여느 배우 못지않은 화면장악력을 지닌 남자.
대수롭지 않게 채널을 돌리다가도 그의 얼굴을 본다면, 자석에 이끌리듯 멈춰 설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자신이 그러했듯.
카메라를 올곧게 응시한 시선에서는 거짓 같은 건 눈곱만큼도 섞일 수 없는 순도 100퍼센트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는 저런 눈빛을 띤 채 카메라 앞에 선 것일까.
화면을 응시하던 지안의 눈이 한껏 깊어져 갔다.
울림이 좋은 단단한 목소리가 TV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 공개하는 블랙박스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 아내입니다.]
블랙박스 영상이라면…….
2주 전, 저를 향해 돌진해오던 두 대의 차량이 추돌한 사고.
그날의 기록이 담긴 영상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날 우연인지, 고의인지 사고를 낸 두 차량 모두 블랙박스가 꺼져 있었다고 했다.
하필 그 무렵 저택 주변 CCTV의 노후화로 인한 교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사고 며칠 전 기계가 모두 제거된 상황이었다.
지세준과 민하린이 지안을 타깃으로 양쪽에서 돌진해오다 자기들끼리 추돌했다는 사실을 밝혀낼 만한 증거가 없었다.
경찰도 일찍이 포기한 증거를 그는 대체 어떻게 찾아냈을까.
지안은 빠르게 흘러간 지난 2주를 되돌아보았다.
외상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었지만, 온몸의 털끝이 바짝 설 정도로 두려웠던 그 날의 기억은 불시에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잠을 자다가도 반복되는 악몽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기 십상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누구보다 넓은 품으로 그녀를 가득 안아주었다.
짙은 두려움으로 황량해진 가슴이 그의 품 안에서 비로소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던 숱한 밤.
도하는 제 손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돌보듯 지안을 애지중지 보살폈다.
그녀보다 두 배는 더 클 듯한 커다란 손으로 섬세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는 모습은 영락없는 간병인의 모습이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가슴에 크게 와 닿았다.
기약 없이 잠든 그를 3년 동안 간병했을 때, 그리고 기적처럼 그가 눈을 떴을 때.
깨어난 그가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냉혈한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막막함.
권도하라는 남자에게 따듯함이나 안락함 같은 감정을 느낄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는데.
지난 3년간의 제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만큼, 그는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돌봐주었다.
괜찮다고 마다하는 손을 붙잡아 병원에 데려가고, 매시간 약을 챙겨주고, 가끔은 기분이 나아질 거라며 달달한 팬케이크를 구워주기도 했다.
팬케이크보다 그걸 먹는 저를 지그시 바라봐주던 그 시선이 더 달았다는 말은 미처 아직 전하지 못했지만.
힘들었지만, 도하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던 지난 2주를 떠올리던 지안의 입가로 저도 모르는 사이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따듯한 양지가 되어주던 그가 조금 이상해진 건 며칠 전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다가도 어디선가 전화가 오면 부리나케 통화를 하러 나가곤 했다.
휴대폰을 꾹 쥔 채 달려나가던 그의 진지하던 눈빛.
요 며칠 그런 일이 부쩍 잦아졌고, 엊그제는 그의 얼굴에서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미소를 보기도 했다.
혹시 그게…… 이 블랙박스 영상 때문이었을까.
생각에 잠긴 지안의 귓가로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어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두 죄인이 엄격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준열한 그 눈빛이, 그 안에 담긴 커다란 마음이 TV 너머까지 전해져 왔다.
지안은 가슴이 먹먹해져서 입술을 꾹 물고 있다가 결국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귓가로 끼어들었다.
“당신을 울리려고 한 일이 아닌데 말이야.”
“어, 깜짝이야!”
TV 속에 있던 배우 뺨치던 남자가, 마치 순간이동을 한 듯 그녀의 바로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지안은 TV 화면 속 도화와 눈앞의 그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인터뷰 화면은 미리 녹화해둔 거야.”
“녹화요?”
“그래.”
“…….”
“간병인이 환자를 혼자 두고 시간을 너무 오래 쓰면 안 되니까. 당신 잠든 틈에 가서 촬영해두고 왔다고.”
그가 TV 속에서 순간 이동한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서야, 지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물음이 떠올랐다.
“……블랙박스 영상은요? 경찰도 오래 전에 포기했잖아요.”
“사고 시간 전후로 저택 주변을 통과한 차량을 모조리 뒤졌어. 놓치기 쉬운 사각지대까지 전부 다 샅샅이.”
“……!”
“경찰이 놓친 차량이 딱 한 대 있더군.”
놀란 지안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도하의 기억 속으로 하나의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바빠 죽겠다는 사람을 왜 자꾸 이렇게 귀찮게 하는 겁니까! 난 그런 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다니까! 막말로 내 차 블랙박스에 뭐라도 찍혔어 봐. 경찰서에 개처럼 불려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 싫다니까! 나도 개인 프라이버시가 있지! 싫어요, 싫다고!’
끝까지 블랙박스 공개를 거부하는 차량주의 단호한 태도 앞에서 도하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빌었다.
‘이렇게 무릎 꿇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 아니 생명과도 같은 사람. 그 사람을 위해 꼭 그 영상이 필요합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태어나 살면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녀를 지킬 수만 있다면 무릎 아니라 심장이라도 꺼내 바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여전히 유효했다.
도하의 눈동자에 촉촉이 젖어 든 지안의 커다란 눈망울이 보였다.
“당신, 눈물 하루라도 빨리 마르게 하려고, 모든 걸 걸고 간병했는데, 그새 또 울면 나는 어떡하지?”
“……도하 씨.”
도하는 한쪽 팔로 지안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숨에 감아 부드럽게 당겼다.
“이제 곧 벌 받게 될 거야. 당신 놀라게 한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
“……도하 씨.”
“울지 마. 서지안.”
“…….”
“네가 울면 내 가슴이 무너지니까.”
지안을 감싸 안은 도하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숨 막히게 저를 사수하는 남자.
그 강한 힘이, 더운 온기가 싫지 않은 듯 지안은 커다란 품속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
***
하린은 변호사를 대동한 채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전문 변호사의 지도를 받은 듯 그녀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불리한 질문엔 침묵으로 일관했다.
기나긴 마라톤 수사에도 진척이 없자, 수사관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마른 입술을 다셨다.
그때, 조사관 옆으로 급히 다가온 경찰 하나가 그에게 귓속말하고선 조용히 서류 하나를 건넨 뒤 사라졌다.
동료가 건넨 서류를 살피던 조사관의 눈이 일순 묘한 빛을 내며 번뜩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하린은 연신 입술을 짓씹으며 조사관의 눈치를 봤다.
서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조사관이 테이블 위로 서류를 내려놓는 순간, 큼지막한 글씨의 기사 헤드라인이 어렴풋이 보였다.
[연쇄 추돌 뺑소니 사고, 고의적 추돌 정황 담긴 영상 공개돼]
종이에 적힌 글자를 똑똑히 본 하린의 두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전세가 역전되자, 여유를 찾은 수사관이 나직이 뱉었다.
“민하린 씨. 계속 술이 웬수라고 본인은 심신미약이었다고 주장하셨는데, 술 말고 진짜 원수가 따로 있으셨던 건 아니고요?”
뼈 있는 수사관의 말에 하린이 당황한 듯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변호사와 눈이 마주치자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수사관은 불안에 휩싸인 그녀의 눈동자를 비웃듯 끝까지 보며 답했다.
“고의적으로 서지안 씨를 치려고 한 정황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됐다 이 말입니다!”
“……뭐, 뭐라고요?”
하린이 죽상을 쓰며 변호사에게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듯 바톤을 넘겼다.
변호사도 난처한 듯 잠시 이마를 구기다가 침착한 척 말했다.
“블랙박스라고 하셨습니까? 경찰 조사 결과 확보된 게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다. 경찰공무원으로서는 난처한 일이지만, 가끔은 경찰 수사보다, 피해자 가족들의 물불 가리지 않는 열혈 수사가 더 큰 성과를 낼 때가 있단 말이죠.”
수사관은 말을 맺기 무섭게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했다.
“뭐야, 이게 벌써 인기 급상승 영상에 올랐잖아.”
그러곤 하린과 변호사의 시야 아래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살짝 노이즈가 섞였지만 도로와 차, 사람의 움직임까지도 육안으로 또렷이 확인 가능한 영상이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하린이 운전대를 잡은 빨간색 스포츠카가 지안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지안을 타깃으로 달려드는 세준의 차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리고 하늘의 장난처럼 두 차가 폭발적인 굉음을 내며 부딪치는 장면까지.
하린은 미간을 힘껏 좁히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누가 봐도 사람을 치려고 고의적으로 달려가다가 재수 없게 차끼리 부닥친 장면이었다.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변호사도 눈으로 본 것을 부인하기 힘든 듯 잠시 시선을 딴 곳으로 피했다.
수사관이 여유로운 눈빛으로 자백을 추궁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애써 매만지며 숨을 골랐다.
머릿속으론 이 궁지를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 동안 시간을 끌던 하린의 뇌리로 번쩍 무언가가 떠올랐다.
마른 입술을 짓씹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블랙박스 영상에 찍힌 그대로예요.”
“민하린 씨!”
“고의로 그런 거 맞다고요!”
기나긴 마라톤의 결승점을 본 듯 수사관의 낯빛에 생기가 돌았다.
“진즉 솔직하게 털어놨으면 서로 덜 힘들었을 건데.”
하린은 경직된 두 뺨을 억지로 떨며 흐느끼듯 말했다.
“……고의로 돌진한 건 맞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네?”
“저도 협박받고 있었으니까요.”
처음 듣는 소리에 하린과 함께 온 변호사의 눈썹이 순간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지세준. 제 약혼자. 그 사람이 다 시킨 짓이에요. 권도하 대표의 아내를 차로 치라고. 그래야 권도하가 무너지고, 그래야 CTM이 케이원을 이길 수 있다면서.”
이제 끝나나 싶었던 수사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자, 수사관은 지친 안색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민하린 씨 말은 지세준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에 가담했다?”
“네. 세준 씨와 저. 한때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나중엔 세준 씨의 집착과 폭력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였어요. 이별범죄 아시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무서운 사람이니까. 헤어지지도 못하고. 그 사람 말을 거역하는 것도 두렵고.”
“그래서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저랑 예전에 찍었던 수위 높은 애정행각 영상을 인터넷에 퍼뜨릴 거라고 협박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고요. 근데 차로 사람을 치라니. 어디 그게 맨정신으로 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술을 먹고…….”
하린의 말을 듣던 수사관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근데 민하린 씨 말대로면 지세준 씨는 왜 반대편에서 돌진해 나타난 겁니까?”
“그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저를 믿지 못하고 감시하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거기서 그 타이밍에 세준 씨가 돌진했는지는 제가 그 사람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죠.”
“하아. 이거 참 복잡하게 꼬이네. 민하린 씨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 대표가 깨어나 봐야 알 수 있는 건데. 지세준 씨는 아직도 의식이 없다고 하고.”
난감해하는 수사관의 안면을 살피던 하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속으로 속삭였다.
‘세준 씨. 이왕 잠든 거 더 오래오래 푹 잠들어 있어. 아니, 가슴 졸일 일 없도록 영영 사라져 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