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용서 못 해 (82/110)


82화. 용서 못 해
2022.09.12.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로 잠든 지안을 보는 도하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반쯤 이성을 잃은 그는 성마른 목소리로 강 박사를 재촉했다.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깨어나지 않는 겁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쇼크로 인한 일시적 의식소실이니까요. 본인을 향해 돌진해오는 차를 두 대나 보았으니, 충격과 공포가 매우 컸을 겁니다.”

강 박사의 말에 도하의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크게 일그러졌다.

쓰러진 그녀를 보고 힘없이 떨구었던 팔.

그 아래, 크고 단단한 손가락을 무섭게 말아쥐었다.

화상의 통증마저 잊은 듯 굳게 쥔 주먹이 붉은빛을 내며 부들부들 떨렸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녀린 여자를 향해 광속으로 돌진해오던 두 대의 차량.

시꺼먼 연기와 위험한 파편을 흩뿌리던 사고 차량 속에서 구조되던 남녀를 도하는 똑똑히 보았다.

피 칠갑을 한 모습이었지만, 실루엣만으로도 그들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세준 그리고 민하린.

그들을 알아보기 무섭게 몸속 깊숙한 곳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살의가 끓어올랐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짓을…….

도하의 눈에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잘못된 욕망과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어리석은 짐승.

당장이라도 달려가 간신히 매달려 있는 짐승의 남은 숨통을 기꺼이 끊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짐승을 응징하는 건 나중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지안 때문이었다.

도하가 처음 굉음을 듣고 뛰어나왔을 때, 그녀는 육신과 영혼이 모두 공포에 잠식된 듯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어서 피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고체계조차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그를 발견하더니, 소스라치게 팔을 뻗었다.

처음엔 무엇을 하려는 건가 싶었다.

저보다 20센티 이상이 작은 여자가 안간힘을 쓰고 팔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리려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희고 작은 손이 힘겹게 가리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눈앞의 처참한 사고 현장을 목격하지 않게 막아보려는 마음.

사고로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떠오르지 않도록, 그때의 트라우마가 떠오르지 않게 지켜주려던 마음.

자기도 많이 두려웠을 텐데, 그 와중에 낑낑대며 그녀는 팔을 뻗었다.

그러다 오래 지나지 않아, 겁을 뒤집어쓴 투명한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지안이 힘없이 쓰러졌다.

마지막 그 마음이, 저를 지켜주려던 그녀의 눈빛이 자꾸만 생각나 도하는 끝없이 가슴이 저렸다.

지난 긴 세월을 그녀의 보살핌 안에서 살아왔기에, 이제는 자신이 그녀의 쉴 곳이 되어주고 싶었다.

따뜻한 양지가 되어 따사롭게 안아주고, 때론 서늘한 그늘이 되어 기분 좋은 바람을 쐬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는데.

오늘도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커다란 마음만 받고 이렇게 가슴 먹먹해하고 있을 뿐, 창백하게 잠든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안이 쓰러진 순간, 저의 시간도 모두 멈춰버렸다고.

그녀도 그랬을까.

잠든 남자의 곁, 그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서 함께 가슴 아파하며,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던지며, 그렇게 묵묵히 견뎌왔던 것일까.

도하는 가만히 잠든 그녀의 손을 잡고, 하얀 손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직이 뱉었다.


“이젠 내가 당신 간병인이 될 거야. 당신 몸도, 마음도. 다신 아플 일 없게 내가 평생 보살필게.”

온기 없이 차가운 손을 녹여주려는 듯 손등 위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살결에 맞닿았던 입술을 다시금 살포시 떼어내는 순간.

꿈틀.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리고 가지런히 포개어져 있던 속눈썹이 거짓말처럼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순간 도하의 까만 눈동자에 커다란 빛이 일었다.


“서지안!”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지안은 이따금 천천히 시선을 돌려 도하를 바라봤다.

도하를 보는 순간, 잊고 있던 몇 시간 전의 일이 되살아난 듯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한바탕 파도가 헤집고 지나간 듯 공허해진 눈동자로 그녀는 도하를 훑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도하 씨?”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이 상황에서도 자기보다 저를 더 걱정해주는 마음이 이젠 예쁘기보다 아프게 느껴졌다.

도하는 움푹 팬 것처럼 아린 가슴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그 몹쓸 직업병은 이제 나한테 다 넘겨.”

“…….”

“이제부턴 내가 당신 몫까지 염려하고 걱정할 거야.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

“그러니까 서지안은 건강히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절절한 마음이 배어 있는 뜨거운 목소리에 지안의 눈동자가 금세 깊어졌다.

도하는 다시금 그녀의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많이 두려웠을까.”

“……!”

“내가 더 빨리 달려왔어야 했는데. 미안해.”

전신에 드리워져 있던 공포라는 감정이 그의 진심 어린 걱정을 듣자, 얼음이 녹아 흐르듯 흘러내렸다.

지안은 처음 겪은 극도의 공포감을 그제야 흘려보내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공허하던 눈망울 속에 뜨거운 눈물이 금세 고여갔다.

도하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가녀린 고개를 가만히 제 품 안으로 이끌어 안았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

따스하게 등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세상 가장 든든한 방패 뒤에 숨은 것처럼 안락한 마음을 안겨 주었다.

다독다독.

도하는 지안이 다시 잠들 때까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곤히 잠든 지안의 평온한 얼굴을 확인하고서, 그제야 허공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돌처럼 단단한 눈동자, 그 어딘가에 잠시 미뤄두었던 뜨거운 응징의 빛이 다시금 서늘하게 드리웠다.


‘절대 그냥 두지 않을게. 당신을 위협한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

먼 곳을 응시한 도하의 다부진 턱선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났다.

***

2주 후.

심박 수 모니터 소리와 각종 의료기기 소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나오는 병실 안.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산소 호흡기를 쓴 남자가 소리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 앞에 중년의 간병인이 TV 리모컨을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보는 이 없는 TV 화면에서는 뉴스 전문 채널이 흘러나왔다.

뉴스 채널 속, 앵커와 패널들이 둘러앉아 떠드는 소리가 적막한 병실 안을 공연히 흔들었다.


[얼마 전, 만취 상태로 연쇄 추돌 뺑소니 사고를 내고, 역주행 운전까지 해 또 다른 추돌사고를 낸 30대 여성 운전자 소식을 전해 드렸는데요. 그 운전자가 딜리버리 그룹으로 유명한 CTM의 지세준 대표 약혼녀로 밝혀졌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충격적인 건, 마지막 추돌 사고 때 마주 오던 차량에 타고 있던 운전자가 다름 아닌 지세준 대표였다는 것입니다. 약혼녀의 차와 약혼남의 차가 추돌한 사건에 대해 대중들은 여러 추측을 하였는데요. 근래 잦아진 이별범죄가 아니냐는 의견부터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던 중, 오늘 또 다른 주장이 나왔습니다.]


[또 다른 주장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CTM을 제치고 동종업계 최강자로 떠오른 노크맨, 네. 케이원 그룹의 권도하 대표가 블랙박스 영상 하나를 공개했습니다. 자료 영상 함께 보시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뉴스 스튜디오를 비추던 화면이, VCR 화면으로 바뀌었다.

TV 화면 정중앙으로 그 어느 때보다 준열한 눈빛을 한 도하의 얼굴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지나치듯 TV를 봤다면, 인기 드라마에 출연 중인 배우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우월한 비주얼과 자태로 도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본사고는 이별범죄나 단순한 연인 간의 다툼으로 말미암은 사고가 아님을 밝힙니다. 오늘 공개하는 블랙박스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 아내입니다. 사고 현장 또한 저의 자택 앞이고요. 돌진하는 지세준 대표의 차량과 역주행해 달려오는 차량이 노렸던 게 서로가 아닌, 제 아내였다는 사실을 이 영상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두 죄인이 엄격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차분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도하의 이야기가 끝나자, 비교적 선명한 블랙박스 화면이 흘러나왔다.

영화보다 잔혹한 장면이 온 세상에 신랄하게 밝혀지고 있었다.

화면을 지켜보던 뉴스 패널들의 놀란 신음이 중간마다 TV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끼어들었다.

지이이잉.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간병인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어휴, 깜빡 졸았잖아.”

멋쩍은 듯 괜스레 혼잣말을 뱉곤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응, 우리 아들! 그래. 엄만 밥 먹었지. 우리 왕자님은 밥 먹었고?”

간병인은 전화를 받기 위해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갔다.

의식 없는 환자와 보는 이 없이 흘러나오는 TV만이 있는 병실 안.

TV 화면 속 패널들은 전보다 심각해진 얼굴로 의문이 추돌사고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화면 아래 빨간 바탕의 머리기사에는 ‘연쇄 뺑소니 추돌사고, 결정적 블랙박스 영상 공개’라는 자막이 떴다.


[네. 전에 보도해 드렸듯, 사고 차량 운전자인 30대 여성 운전자 민 씨는 병원 치료를 마치고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연쇄 추돌 뺑소니라는 것만으로도 실형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보이는데요. 오늘 공개된 블랙박스 영상을 통해 또 한 번 사건의 판도가 달라질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블랙박스 영상을 본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고의성을 확신하고 있는 만큼, 사건이 다른 국면을 맞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또 다른 차량 운전자인 CTM 지세준 대표는 중상을 입고 현재 의식불명 상태라고 하는데, 새로운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된 만큼 지 대표가 얼른 의식을 되찾아 철저한 조사를 받았으면 좋겠군요.]


[네. 블랙박스 영상을 함께 보셔서 아시겠지만, 정말 섬뜩하지 않습니까. 보는 저희도 충격적인데, 직접 눈앞에서 피해를 본 피해자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살인미수는 단순한 추돌사고와는 완벽히 다른 무게의 범죄이기 때문에, 이대로 묻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때 화면 하단 헤드라인이 다른 자막으로 바뀌었다.

[단순 추돌 사고 아닌 살인 미수 혐의 의심]

그때, 병실 안 일정하던 심박수 모니터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

띠띠띠띠-.

그리고 얼마 후, 송장처럼 잠들어 있던 남자의 한쪽 검지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