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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86/110)


86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022.09.26.



 
룸미러 너머로 세차게 요동치고 있는 세준의 동공이 보였다.

도하는 처참히 무너지는 악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민하린을 조사 중인 수사관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

불현듯 예리한 촉이 그를 세준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이끌었다.

하린은 이번 사고의 모든 책임을 의식 없는 세준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가스라이팅, 데이트 폭력, 성적 동영상 유포 협박.

그녀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 숱한 경험과 본능으로 알았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씻을 수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녀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고 있을 일이 무엇일지도 도하는 잘 알았다.

지세준이 깨어나는 일.

깨어난 지세준이 그녀의 거짓말에 반박하는 일.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하린의 그다음 행보 또한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도하가 아는 하린이라면 불안한 미래, 그 가능성의 싹을 자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거였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만드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은 제 거짓에 반박할 대상을 세상에 두지 않는 것, 없애버리는 방법일 것이다.

하린의 시각에서 생각했을 법한 결론에 도달하자, 도하는 지체하지 않고 세준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도하가 세준의 병실 부근에 도착했을 때, 그보다 먼저 그 앞에 와 서성이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익히 봐왔던 간호사 유니폼을 입은 한 여자.

복장은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과 긴장한 듯 연신 침을 삼키는 모습이 여간 수상쩍었다.

게다가 그녀가 전화를 받으러 휴대폰을 든 순간, 유난히 길고 번쩍이는 손톱이 보였다.

이상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도하는 얼른 시선을 돌려 복도를 지나치고 있는 간호사들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자세한 건 몰라도, 세준의 병실 앞 간호사처럼 길고 화려한 장식의 손톱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촉을 좀 더 객관화하려 그는 복도를 지나는 간호사 한 명을 붙잡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혹시 이 병원에는 간호사분들 손톱 규정 같은 게 없습니까?’


‘손톱 규정이요?’


‘네. 네일 아트 같은 거 말입니다.’


‘아. 저희 병원은 위생상 문제와 환자분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어서 의료진 네일 아트를 전면 금지하고 있습니다.’

간호사의 친절한 대답을 듣던 도하의 눈이 순간 매섭게 번쩍였다.

그렇다면, 조금 전 그 여자는…….


‘감사합니다.’

도하는 매너 있게 인사하곤 얼른 조금 전 그녀가 서 있던 병실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새 병실 안에 들어간 것인지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도하는 부리나케 병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잡이를 향해 팔을 뻗는 순간, 병실 안에서 누군가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놀란 도하가 재빨리 병실 문을 열려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민하린 그 교활한 여자 때문이지.]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

평소보다 낮게 잠겨 있을 뿐, 그가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지세준!’

기가 찼다. 의식불명이라던 사람이 버젓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니!

대체 언제 깨어났단 말인가.

혹시 애초에 의식불명이었던 적이 없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찼다.

안개처럼 흐리멍덩한 진실 사이로 단 하나 확실한 것이 보였다.

하린의 계획대로 세준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일은 없다는 것.

그건 도하 또한 바라는 바였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누구 마음대로 함부로 사라진다는 말인가.

그리고 본인이 지은 죄를 남에게 떠넘겨 멋대로 죄의 무게를 줄이려 하는 것도 용서할 수 없었다.

지세준도, 민하린도.

자신이 뿌린 그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도하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매서운 빛을 띠고 빛났다.

당장 문을 부수고 들어가 세준을 끌어내고 싶었지만, 도하는 차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감정적인 방법 말고, 좀 더 이성적이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도하는 세준의 병실이 보이는 곳에 머무르며, 두 사람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세준의 병실 문이 열렸다.

네일 아트를 한 여자가 마스크와 털모자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환자를 휠체어에 태워 밀고 있었다.

탈. 출. 시. 도.

도하의 머릿속에 네 음절의 말이 각인되듯 새겨졌다.

절대, 무슨 일이 생겨도 그렇게는 안 둬.

도하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힘껏 제어하며 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여자가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걸 확인한 도하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조용히 주차장에 진입했다.

그리고 차 뒤에 몸을 감추며, 천천히 그녀의 뒤를 밟았다.

까만 세단 앞에 멈춰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어…… 하린아.’

여자의 입술 끝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도하는 자신의 예감이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냐. 아무 일 없었어. 지세준은 잘 처리했어.’

지세준은 잘 처리했어.

합리적인 의심에 쐐기를 박듯 들려온 한마디.

여자는 민하린이 지세준을 처리하라고 보낸 사람이었고, 지세준이 의식불명인 줄 알고 접근했다가 작전이 실패하자, 지세준의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탈출을 돕고 있었다.

짐작은 했지만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통화를 마친 여자가 차 문을 열기 일보 직전, 도하는 단숨에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어!’

도하를 본 여자는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도하는 준열한 눈빛으로 그녀를 압도시키며 말했다.


‘차 키. 내놓으시죠!’


‘……!’


‘지금 직접 차를 몰아 지세준을 태우고 떠나면, 당신은 범인 도피, 은닉죄로 처벌받겠지만, 나한테 차 키를 넘기면 의도했든, 아니든, 범죄자 검거에 공을 세우는 게 될 겁니다.’


‘…….’

도하는 더 이상의 말 대신 태양보다 뜨거운 눈빛으로 여자를 재촉했다.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던 여자는 도하와 다시금 눈이 마주치자, 용수철에 튕겨 나가듯 힘없이 뒷걸음쳤다.

그러곤 손을 부들부들 떨며 차 키를 넘겼다.

긴박했던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던 도하의 시선이 다시금 룸미러에 가닿았다.

자신이 왜 감옥에 가야 하냐며, 조금 전까지 발악해대던 세준은 금세 지친 듯 병든 짐승처럼 거친 숨소리만 쉭쉭거리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지 2주 만에 깨어나 무리한 신체활동을 한 까닭인지 세준은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정신도 맥없이 무너졌다.

무엇보다 도하의 손아귀에 붙잡힌 이상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권도하.

끝까지 너는 너구나. 네 앞에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야.

세준은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듯 텅 빈 눈동자로 창밖을 응시했다.

***



“지세준한테 데이트 폭력과 협박을 당했다는 증거요?”

하린의 날렵한 눈썹이 하늘 방향으로 솟구쳤다.


“그렇습니다. 민하린 씨 주장대로 지세준의 협박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어야 더 수사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리던 하린은 애써 침착한 척 입술을 뗐다.


“증거라면 차고 넘치죠.”

일단 뱉고 본 뒤 수습을 위해 머리를 쥐어짜던 하린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 저게 뭐야!

충혈된 두 눈이 무섭게 흔들렸다.

소리 없이 켜져 있는 경찰서 모니터 위에 빨간 헤드라인의 굵은 글씨가 보였다.

[살인미수 혐의 지세준 대표 도주 중 검거]

누…… 누가 검거됐다고?

하린은 잠시 사고체계가 멎은 듯 머리가 멍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조금 전 휴식시간,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어 지세준이 잘 처리되었다는 이야길 분명 들었는데.

죽었어야 할 사람이 어떻게 도주를 하고, 또 검거돼!

잠깐. 그럼 지세준이 깨어났단 말이야?

변호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지세준의 상태는 여전하다고 했었다.

한데 어떻게 하필 오늘! 어떻게 이 타이밍에 깨어났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혹시 그럼 혼자 살려고 의식불명인 척하고 있었던 건 아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덩이처럼 부풀어가는 순간.

저만치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수사실 바로 앞까지 쫓아온 기자들이 한 남자를 향해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지세준 씨! 한 말씀 해 주시죠!”

“지난 2주간의 의식불명도 모두 가짜였던 겁니까?”

“살인미수 혐의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시죠!”

“민하린 씨를 협박해 추돌 사고를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처럼 수사실로 들어서던 세준이 우뚝 걸음을 멈추는 게 보였다.

그러곤 마지막 질문을 던진 기자를 향해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자는 마이크를 세준의 앞으로 들이밀며 분주히 말했다.


“민하린 씨가 지세준 씨에게 오랜 기간 데이트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했고, 성적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아, 이번 추돌 사고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하셨습니다. 정말 민하린 씨에게 협박과 각종 폭력을 행사한 게 맞나요?”

세준은 분노가 들끓는 목소리로 낮게 내뱉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그래!”

세준의 필터링 없는 거친 반응에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눈부신 카메라 불빛에 눈살을 구기던 세준의 시선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 창백한 낯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선 멈춰 섰다.

세준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미, 민하린……!”

경찰서 수사실 안에서 조우한 오래된 연인.

세준이 긴 다리로 저벅저벅 빠르게 다가오자, 하린은 벽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그 모습만큼은 긴 시간 폭력과 협박에 시달린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린은 알고 있었다.

지금 제가 두려워 떠는 건, 세준의 폭력성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곧 세상에 들통이 날 거란 것 때문임을.


 

***

수사관의 연락을 받고 나간 도하가 무소식이자, 지안은 근심이 깃든 눈으로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멍하니 휴대폰을 만지다, 하릴없이 인터넷 아이콘을 눌렀다.

익숙한 포털사이트 화면을 가만히 살피던 지안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번쩍였다.

[병원 탈출 후 도주 중이던 지세준 씨 검거 2보]

상상도 못 했던 기사 제목에 휴대폰을 든 손끝이 떨렸다.

지안은 빠르게 기사를 누른 후, 기사에 포함된 동영상 뉴스를 재생시켰다.


[오늘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던 지세준 씨가 병원을 탈출해 도주하다 경찰에 검거되었습니다. 고의적 추돌 사고로 살인미수를 비롯해 각종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지 씨는 그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알려졌었는데요. 지 씨가 의식을 되찾고 도주를 시도할 정도로 회복한 만큼, 각종 혐의에 관한 조사도 박차가 가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화면에 집중한 지안의 미간 사이로 한껏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어디선가 커다란 손이 홱 날아와 휴대폰을 가로챘다.


“어!”

도하는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 영상을 끄며 말했다.


“이젠 세상이 심판할 시간이야.”

“도하 씨.”

“그러니까 이제부턴 골치 아픈 뉴스 말고, 행복한 드라마 주인공만 해. 서지안.”

“……!”

“나 좀 안아줄래?”

“…….”

“경찰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더니, 꽤 힘들군.”

“……도하 씨.”

“빨리 안 오면 내가 간다.”

도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와락 지안의 허리를 단숨에 감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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