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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그녀의 꿈 (87/110)


87화. 그녀의 꿈
2022.09.30.



 
2주 후.

케이원 그룹 대회의실 안.

회의 시작 10분 전, 각기 모여든 직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케이원에 남길 정말 잘했어. CTM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몰락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그니까요. 몇 달 전만 해도 CTM에서 개발팀 직원들 연봉 두 배 주고 데려갔잖아요. 그땐 마냥 부러웠었는데.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이 딱이라니까요.”

“내 말이. 김 대리, 오늘 뉴스 봤지? 지세준이랑 민하린. 서로 폭로전 하는 게 완전 개싸움이 따로 없던데.”

“가까운 사이가 더 무섭다니까요. 폭로에도 성역이 없으니. 둘 다 같이 죽자고 싸우던데. 쯧쯧.”

세준이 검거된 지 2주째.

세준과 하린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서로의 머리채를 끌고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전에 밝혀지지 않았던 여죄가 하루가 다르게 추가되었고, 이제는 추가 혐의가 나와도 놀랍지 않을 지경이었다.

CTM과 세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직원들의 눈빛에서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때 매혹적으로 보였던 시한폭탄을 걸러냈다는 안도감, CTM으로 이적한 옛 동료에 대한 걱정과 사뭇 솟구치는 케이원 그룹에 대한 애사심.

그때, 닫혀있던 회의실 문이 열렸다.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수다를 멈추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도하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직원들이 도하의 절도있는 손짓에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괜찮습니다. 이 회의실 안에서만큼은 모두 수평 관계여야 합니다. 그러니 편하게들 앉아 계십시오.”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서 더 위엄이 느껴지는 오너.

단단한 목소리와 총명한 눈빛, 게다가 빛이 나는 훤칠한 외모까지.

직원들이 가지는 애사심의 팔 할은 도하에게서 비롯되고 있었다.

도하가 회의실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안도 도하의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각 부서별로 함께 논의해야 할 안건을 내놓았고, 도하의 주재하에 회의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지안은 회의에 나온 안건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기록했다.

부서별 시급한 안건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자, 도하는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도했다.


“자, 지금부터 남은 30분간은 부서, 직함 같은 사사로운 것들은 모두 내려놓고 자유 토론을 했으면 합니다. 평소 회사에 건의하고 싶었던 사안이나, 이 자리에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든 편하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도하의 목소리에서 회사 대표의 권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직원들과 진솔하게 소통하고자 하는 젊은 경영인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직원들은 평소 자기들끼리만 나누던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털어놓았다.


“사내 식당 위탁 업체를 바꾸는 건 어떨까요?”

“사내 피트니스센터 기기가 노후화되어 교체가 시급한 것 같습니다.”

“사내 어린이집 교사 수를 늘리는 부분에 대해 건의 드려 봅니다.”

하나둘 평소 마음에 안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자, 회의장 분위기는 더욱 활력을 찾아갔다.

생기있는 회의장 분위기가 흡족한 듯 주변을 살피던 도하가 습관처럼 지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안이 회의장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온 신경과, 마음이 자꾸만 그곳을 향했다.

그게 회의에 방해되었다면 문제이지만, 도하에게는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그녀에게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

언젠가 자기 일에 몰두한 사람의 모습에서 매력을 느낀다고, 스치듯 그녀가 했던 말이 도하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한데 오늘 좀 이상하다. 서지안이.

좀 전까지 분주히 회의록을 기록하던 그녀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연신 입술을 말아 감았다 풀었다 반복하는 모습이 뭔가 꼭 할 말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도하가 생각하는 사이, 지안이 번쩍 손을 들었다.

이윽고 작은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저도……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생각지도 못한 지안의 행동에 도하는 잠시 멍해져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서지안 씨.”

지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경쟁업체였던 CTM이 크게 기울어지면서, 저희 케이원의 노크맨이 업계 1위로 올라섰다는 기사를 봤어요.”

차분하면서도 전달력 좋은 음성에 회의장 안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주문율이 단기간에 눈에 띄게 늘어난 만큼, 배달 근로자분들의 사고율도 많이 늘었다고 들었고요.”

지안의 말에 도하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노크맨이 배달 근로자의 복지 부분에 타 회사보다 힘쓰고 있다는 걸 알지만, 좀 더 전문적인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다 전문적인 보살핌이라면?”

도하가 낮게 묻자 지안은 얼른 말을 받았다.


“배달 근로자분들의 복지와 사고 후처리를 담당하는 전문 부서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달 근로자 복지 담당 부서 말입니까?”

도하가 그녀의 말을 곱씹듯 되묻자, 지안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회의장 안 직원들이 일리 있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제 가족, 제 사랑하는 남편도 배달 사고를 당한 적이 있거든요.”

지안의 말에 도하의 동공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몇 해 전, 깊은 새벽.

딜리버리 사업 시험차 배달 차에 함께 몸을 실었던 그 날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 갔다.


“사고 후 회복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요. 가족이 그런 사고를 당하면,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의 시간까지 함께 멈춰버려요.”

지안의 말에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도 둔중한 뭔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얼해졌다.

배달 사업의 특성상, 사고는 불가피한 영역이라 믿었다. 사람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영역.

가능한 높은 보수와 처우로 보상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안의 시선은 달랐다.


“목숨을 걸고 달리는 그분들에게 가족 같은 회사가 되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담당 부서에서 근로자의 휴식 지원은 물론이고, 사고 시 생계 지원부터, 심리 상담치료 등 다양한 지원과 보살핌을 주었으면 해요. 그들은 배달 근로자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고, 소중한 한 사람이니까요.”

지안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진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울림을 느낀 건 도하였다.

지세준의 CTM과 다르다고, 케이원의 노크맨은 속도보다 마음을 중시한다고 자부하면서도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배달 근로자의 교통사고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고를 줄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고가 났을 때, 지안의 말처럼 좀 더 섬세하고 체계적으로 보살펴주는 것도 회사의 몫이었다.

오랜 기간, 아픈 누군가의 곁에서 함께 아파본 그녀이기에.

진심으로 누군가를 보살펴본 그녀이기에 알고 있었다.

케이원이 업계 1위로 발돋움한 이 시점에 마냥 기뻐하기보다 숙연하고, 진지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도하는 말 대신 박수로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회의장 안에 있던 모두가 한마음으로 손뼉을 쳤다.

오너가 치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치는 박수가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공감하며 치는 박수였다.

한동안 우렁찬 박수 소리가 회의장 밖까지 오래도록 흘러나왔다.

***

회의장을 나와 대표실로 가는 길.

도하는 벅참과 뭉클함으로 가득 찬 가슴을 안고, 옆자리에 걷고 있는 지안을 가만히 살폈다.

저 작은 체구로, 저 작은 입술로 당당하게 말하던 여자.

보이는 건 작고 여리나, 그녀 안의 세상은 저보다 크고 위대했다.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여자.

그런 여자가 제 곁에 와 주었다는 것이. 평생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도하는 대표실에 도착하면 곧장 지안을 끌어안고 잠시라도 그녀의 세상을 깊이 느껴보고 싶었다.

서지안이라는 세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만의 세계.

회의실에서 대표실까지, 평소에는 가깝기만 하던 거리가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붙들고, 대표실에 도착한 그는 힘껏 문을 당겼다.

그러곤 문을 닫기 무섭게 지안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어!”

그렇지 않아도 동그랗던 지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도하는 인내심이 바닥난 짐승처럼 지안의 곁으로 거칠게 다가섰다.

놀란 듯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이 오늘따라 미치게 아름다웠다.

누누이 말했듯,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는 아니지만.

아니, 오늘부로 그냥 구분 못 하는 남자가 되기로 했다.

이런 여자를 눈앞에 두고, 공과 사를 구분하느라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있을까.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성의 싸움에서 결국 감성이 승기를 들었다.

불붙듯 뜨겁게 맞닿은 두 입술.

작고 여린 입술이 익을 대로 익은 뜨거운 남자의 입술에 거칠게 빨려 들어갔다.

영원히 식지 않을 것 같은 더운 열기가 숨 쉴 수 없이 그녀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두 팔로 단단한 남자의 몸을 붙잡고 밀어내봐도 소용이 없었다.

연약한 힘으로 뜨거워진 남자를 떨쳐낼 방법은 없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뜨겁게 만들었을까.

현기증이 돌 정도로 아찔한 키스 끝에 도하가 속삭였다.


“미치겠다. 서지안.”

“…….”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당신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보여서.”

도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뜨거운 눈빛으로 지안의 투명한 눈동자를 사수했다.


잠시 말없이 있던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응?”

“아까 말씀드린 배달 근로자 담당 복지팀…….”

“그 건은 빠른 시일 내에 팀 꾸릴 수 있도록 얘기해 뒀어. 걱정하지 마.”

“무리가 아니라면…….”

지안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무리가 아니라면?”

“저를 복지팀으로 보내 주시겠어요?”

생각지도 못한 지안의 말에 도하의 눈썹이 하늘 방향으로 높게 솟구쳤다.


“뭐?”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서지안.”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전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꿈이 뭔지 조차 모르는 그런 애송이였는데. 도하 씨를 알게 되고, 잠든 도하 씨를 돌보면서, 그리고 회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깨달았어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 뭔지를요.”

“…….”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는 일. 그게 제가 가장 자신 있고 하고 싶은 일이에요.”

“……!”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쓸데없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의지가 깃든 어투로 말하는 야무진 목소리가 쓸데없이 감미로워서.

도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너를 아무 곳에도 보내고 싶지 않다고.

가장 가까운 곳, 그저 옆에 두고 온종일 보고 싶은 남자의 마음을 왜 이리도 몰라주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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