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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사랑의 숫자 (99/110)


99화. 사랑의 숫자
2022.11.11.



 
이…… 입술로?

어디선가 스며든 달빛에 비친 지안의 두 뺨이 잘 익은 열매처럼 붉게 빛났다.

잠시 굳어 있던 그녀는 도하의 말을 못 들은 척 휴대폰을 꺼내 다시 무작위로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계속 오류가 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이 안타까운 듯 지켜보던 도하가 나직이 뱉었다.


“그렇게 해선 밤을 새워도 절대 못 풀 텐데.”

지안은 듣는 둥 마는 둥 불퉁한 표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기회를 마저 소비하고 있었다.

다시금 먹통이 된 휴대폰을 보는 그녀의 얼굴로 허탈함과 분함이 가득 피어올랐다.


“도하 씨!”

굵고 짧은 한마디의 말에서 짙은 항의가 묻어났다.

지안이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하는 쉽게 가르쳐줄 생각이 없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푸는 법은 벌써 알려줬을 텐데.”

그러면서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두어 번 툭툭 건드렸다.


“숫자 한 개에 한 번씩.”

이런 몹쓸 협상가를 보았나.

지안은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외근을 나가 이상한 남자의 집에 휴대폰을 떨어뜨렸던 게 문제일까, 다짜고짜 휴대폰을 내놓으라던 그의 요구에 쉽게 응한 게 문제였을까.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이 문제를 타파할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지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생각했다.

그깟 입맞춤쯤이야.

이미 법적으로는 정식 부부에, 두 번째 결혼식을 준비하는 사이에 가벼운 입맞춤쯤이야 애교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미 둘 사이엔 그보다 훨씬 친밀하고 뜨거운 스킨십도 있었다.

하지만…….

맨정신에 그의 입술로 다가가 입맞춤을 해야 한다니.

그건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최 기사가 룸미러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 좁은 공간에서는 더더욱.

복잡한 심경이 교차하는 지안과 달리 도하는 비밀 열쇠를 손에 넣은 자 특유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할래?”

“…….”

지안은 아랫입술을 살짝 문 채 고민하다가 나직이 답했다.


“여기선 곤란해요.”

도하는 그녀의 말을 음미하듯 잠시 곱씹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

차에서 내린 도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지안은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등교하는 아이처럼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 도하는 말없이 몸을 돌려 느릿하게 걸어오는 지안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스민 미소가 왠지 모르게 두려워서 지안은 평소와 달리 방문을 닫지 않고 들어왔다.

도하는 그 모습조차 귀엽다는 듯 피식 웃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오픈된 공간에서 하는 스킨십을 더 선호한다는 뜻이었나?”

“……네?”

“차 안은 곤란하다고 했잖아. 밀폐된 차 안은 시시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해야 더 짜릿함을 느끼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과감하게 문을 열어두길래. 드나드는 메이드만 해도 여럿인 집안에서.”

지안은 얼른 뒤를 돌아보며 괜한 오해를 사기 싫다는 듯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을 닫는 순간, 또 한 번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도하가 그녀를 포위하듯 두 팔을 뻗어 그녀의 양어깨 위를 막아섰다.


“……도, 도하 씨.”

“이제 풀어볼까.”

짙어진 눈동자가 뜨거운 열기를 머금고 다가왔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긴장 어린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때 도하가 나직이 속삭였다.


“도와줄 수도 있는데.”

“…….”

“말만 해. 내가 갈 테니까.”

분위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끈적하고 야릇했다.

차라리 차 안에서 할 걸 그랬나.

최 기사를 의식해서라도 가벼운 입맞춤 이상이 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하지만 둘 뿐인 방안은 되돌리기 힘들 만큼 은밀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그에게 이제는 주도권을 뺏길 순 없었다.

지안은 결심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풀며 시선을 그의 붉은 입술로 조준했다.

그러곤 숨을 꾹 참으며 단숨에 다가갔다.

쪽.

그의 입술에 빠르게 부딪히고는 도망치듯 물러선 입술.

도하는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빤히 지안을 보며 말했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건가.”

“……도하 씨!”

“다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숫자 얼른 알려 줘요.”

“진지하게 하지 않으면 무효야.”

도하는 그 말을 뱉기 무섭게 두 손으로 그녀의 턱선을 감싸 쥐고는 단숨에 고개를 기울였다.

쪽, 하고 맞닿은 입술이 얼마간 포근하게 겹쳐졌다.

그의 입술 온기가 그녀의 입술로 옮겨 오기에 충분한 시간.

도하는 비밀번호는 이렇게 푸는 거라고 한 수 보여주곤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첫 번째 숫자는 1.”

도하의 말에 지안의 눈동자가 순간 빛났다.

이렇게 된 이상, 어서 남은 입맞춤을 마치고 비밀번호를 풀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보다 과감하고 진해진 입맞춤.

그녀의 입술이 날아와 한동안 머물다 떨어지자 아쉬운 듯 도하는 거칠게 숫자를 뱉었다.


“0.”

그러곤 거칠게 그녀의 고개를 당겨 제 입술에 포갰다.

나중엔 누가 입맞춤의 주체인지 알 수 없게 순서가 뒤엉켰다.

점차 짙어져 가는 분위기와 불이 붙은 입술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도하는 더는 감질나는 장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나머진 한꺼번에 다 알려 줄게.”

“……!”

“대신 남은 숫자만큼 내 맘대로 한다.”

“……도하 씨.”

“1010235.”

평정심을 잃은 그는 짐승처럼 거칠어진 숨소리를 토해내며 그녀의 입술로 달려들었다.

기념일도 아니고, 의미 있는 숫자의 조합도 아닌 숫자에 관한 궁금증을 채 해소하기도 전에 뜨거운 소용돌이가 입안으로 자비 없이 들이닥쳤다.

정신이 아뜩해질 정도로 아찔한 키스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거친 호흡이 겨우 제자리를 찾아갈 즈음, 일곱 개의 숫자를 유심히 보고 있던 지안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의미예요?”

“……뭐가?”

“비밀번호 말이에요. 1010235. 생일도 아니고, 기념일 같은 것도 아니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모르겠는데.”

그녀의 말에 도하는 깊어진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난 세기의 유물.”

“……네?”

“지하에 오래된 서재가 있는 거 알지?”

지안은 당연하다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4, 5년 전쯤이려나. 거기에 들어갔다가 재미있는 걸 하나 발견했지.”

“……그게 뭔데요?”

지안은 사뭇 아련해진 도하의 눈빛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기다렸다.


“부모님이 우리처럼 젊었을 적에 주고받았던 연애편지.”

“……정말요?”

“응. 편지 끝부분에 서로 부적처럼, 암호처럼 저 숫자를 꼭 남기셨더라고.”

“……!”

“아무리 해독해보려 해도 도저히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더라고. 두 분 생일도 아니고, 기념일도 아니고. 그래서 몇 날 며칠 고민만 하다가 포기하려던 순간이었어. 그제야 보이더라고.”

“……정말요?”

“단순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봐야 보이는 숫자였지.”

지안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였는데요?”

“숫자 그 자체에 메시지가 있더라고.”

지안은 휴대폰에 입력해둔 숫자를 다시 눈에 담았다.

[1010235.]


“알겠어?”

도하가 묻자, 지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전 순수하지 못한가 봐요.”

“……둘씩 묶어 봐.”

지안은 눈으로 얼른 숫자를 묶어보았다.

[10 10 23 5.]


“십 십 이삼 오.”

지안이 혼잣말처럼 읽어내리자 도하가 피식 웃으며 정정해주었다.


“아니. 십 말고 다르게.”

“아. 열열 이삼 오. 어?”

무언가 깨달은 듯 지안이 눈썹을 하늘 방향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혹시…… 열렬히 사모?”

“응.”

“와.”

단순하면서도 오묘한 숫자에 담긴 메시지에 지안은 감탄한 듯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촌스럽고 유치한 숫자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더라고. 엄마 아빠의 젊은 시절 추억이라서 그런가.”

“…….”

“그래서 이 숫자를 수첩에 적어뒀었어. 언젠가 진짜 열렬히 사모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도 이 숫자를 써볼 날이 있겠지, 하면서.”

그 말을 하는 도하의 눈이 바다처럼 깊고 은은해서 지안은 눈을 뗄 수 없었다.

휴대폰을 잠시 잃어버린 것도, 그 흔한 비밀번호조차 걸어두지 않은 것도 모두 잘못이라 여겼는데, 어쩌면 이 가슴 벅찬 숫자를 만나기 위해 돌아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휴대폰을 닫았다가 다시 터치해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창이 나오는 순간부터 지안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누군가의 마음이 보이는 숫자, 비밀스럽고 소중한 메시지가 담긴 숫자.

[1010235.]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까먹지 못할 비밀번호였다.

***

다음 날 아침, 회사 로비에 들어서는 지안의 입가로 달뜬 미소가 걸려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할 때마다 번거로운 새 창이 생겨 시간은 조금 지체되었지만, 행복한 숫자를 누르는 손길은 악기 연주자처럼 리드미컬했다.

열렬히 사모.

요새 흔히 쓰는 표현이 아니라서, 게다가 그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옛 감성이 느껴져서 왠지 더 특별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지안은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입구로 들어서던 그녀는 순간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침 안에서 나오고 있던 두 명의 여직원들과 부딪힐 뻔했기에.


“죄송합니다.”

지안이 먼저 인사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여직원들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자기들끼리 난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안은 이상한 느낌에 여직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대면한 적 있는 얼굴들이었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생각나진 않지만, 오다가다 마주친 게 분명했다.

그때 머뭇거리던 여직원 하나가 속사포 랩처럼 빠르게 말했다.


“……전지현보다 더 예쁘세요!”

느닷없는 얘기에 당황한 지안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네?”

전지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잊고 있었던 오래전의 기억이 빠르게 소환되었다.

회사에 출근한 지 얼마 안 돼 화장실에서 우연히 듣게 된 여직원들의 뒷담화.

도하가 결혼했다는 소문에,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 배우인 전지현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면 용납할 수 없다던 여직원들의 시기 어린 목소리가 조금 전에 들은 듯 생생히 살아났다.

그리고 그녀들을 향해 따끔한 일침을 날렸던 제 목소리도.

근데 전지현보다 더 예쁘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지안은 잠시 사고체계가 뒤엉킨 듯 그대로 멈춰 있었다.

오래전 자신이 날린 일침에 겁을 먹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걸까?

하지만…… 굳이 전지현을 언급하며 뜬금없는 칭찬을 할 리는 없었다.

아니면 그날 겪은 수모에 대한 보복으로서 비꼬는 소리를 하는 걸까?

그렇다기엔, 그녀들은 마치 상사에게 하듯 90도 인사를 정중히 하곤 자리를 떴다.

지안은 조금 전 나눈 대화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지 생각에 잠긴 채 한참이나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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