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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대낮에 저지른 (101/110)


101화. 대낮에 저지른
2022.11.18.



 
밀린 결재 서류를 검토하느라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쌓여 있던 파일 중 마지막 결재 철을 닫은 도하는 긴 팔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후유.”

프러포즈부터 결혼 준비까지.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위해 정신을 쏟느라, 천하의 완벽주의자인 그도 일을 몰아서 처리해야 하는 날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입가에선 은은한 미소가 가실 줄을 몰랐다.

1010235.

모든 걸 걸고 열렬히 사모할 존재가 있다는 건…….

지안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떠올리자, 어서 빨리 청량한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서류 검토에 파묻혀 있던 삭막한 정신을 말끔히 정화해줄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도하는 다급한 손길로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던 두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뭐지.’

온갖 지인들로부터 걸려온 부재중 전화와 쏟아지는 축하 메시지.

하나같이 하는 말이 ‘기사를 잘 봤다’는 인사였다.

기사?

도하는 모니터 전원을 켜고 한껏 예리해진 눈으로 포털 사이트를 살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익숙한 이름이 시야에 걸렸다.

[케이원 그룹 황정순 회장, 손자 권도하 대표 결혼 계획 밝혀]


“할머니……!”

이번만은 남부럽지 않게, 세상 떠들썩한 결혼식으로 만들어주고 싶다던 정순의 발 빠른 실행력이 발휘된 게 분명했다.

도하는 빠르게 기사를 클릭했다.

지안과 그의 러브스토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기사를 읽어내리던 도하의 눈이 처음 보는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오래도록 멈추어 섰다.

처음 보는 지안의 앳된 얼굴.

자연스러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증명사진 특유의 딱딱함. 그 딱딱함을 단숨에 녹이는 귀여운 두 볼과 풋과일처럼 싱그럽고 상큼한 에너지가 모니터 밖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스물여덟의 그녀가 가지고 있는 차분하고 단단한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매력에 매료된 그는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영구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매일 꺼내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3년이라는 긴 기다림 없이도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가슴을 스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네.”

그가 짧게 대답하자 문 너머에서 신입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용건을 말했다.


“대표님, 대표님과 통화를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그게 누굽니까?”

비서의 이야기를 듣던 도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분이 나를요?”

“네. 꼭 연결될 수 있게 해달라고 몇 차례 부탁하셨습니다.”

의외의 곳에서 걸려온 전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 바로 연결해 주십시오.”

 

***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던 지안은 낯선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에서 화장을 고치던 직원이 거울로 그녀를 유심히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파우더를 급히 닫았다.

그러곤 어색하게 90도 인사를 하더니 후다닥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게 지안은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그제야 도하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다니는 모두가 아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들의 모든 관심과 소문의 중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런 남자의 옆자리에 서게 된다는 건…….

알 수 없는 무게감과 책임감이 작은 어깨를 무겁게 했다.

하지만 저를 열렬히 사모하고 있다는, 자신 또한 열렬히 사모하는 그를 생각하면 어떤 무게라 할지라도 감당할 용기가 있었다.

다만, 갑자기 등장한 제 존재에 당황하고 불편해할 직원들이 걱정이었다.

우선은 직원들이 좀 전처럼 불편해하지 않게, 최대한 존재감 없이 다닐 생각이었다.

화장실을 나온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땅에 고정하고 걸었다.

평범한 체구에 특별할 것 없는 몸매라서, 얼굴을 정면에서만 보이지 않으면 크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좁은 시야를 따라 걷던 그녀의 앞으로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그림자가 훅 들이닥쳤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채 비상구 쪽으로 이끈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엇!”

“쉿.”

도하가 지안의 작은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속삭였다.


“도, 도하 씨!”

놀란 지안이 토끼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보자, 도하는 그마저도 사랑스러운 듯 씩 웃으며 말했다.


“걷는 법부터 다시 가르쳐 줘야 할까?”

“……네?”

“앞을 보고 걸어야지. 땅만 보고 걷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지금처럼.”

“……뭐예요, 이게.”

“납치하려고.”

“……네?”

평소같지 않은 도하의 짓궂은 미소가 낯선 듯 지안은 연신 눈을 깜빡였다.


“납치는 너무 했나. 그럼 땡땡이라고 해 두지.”

“……땡땡이요?”

타고난 완벽주의자인 그의 입에서도 ‘땡땡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지안은 신기하기만 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이기에.


“가자. 늦기 전에.”

“……어디 가는 건데요?”

“땡땡이라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갑자기 땡땡이는 왜? 그리고 대표가 이래도 돼요? 직원 데리고 땡땡이라뇨.”

“괜찮아. 당신 말대로 내가 대표이니까.”

권위와는 거리가 먼 남자가 지금 이 순간은 세상 모든 권력을 짊어진 듯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도하 씨, 이런 사람이었어요?”

“응.”

“……!”

“중요한 순간에 어떤 과감한 결단을 내려서라도,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게 오너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거든.”

무슨 뜻인지, 그게 지금 이 ‘땡땡이’라는 것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눈빛과 무엇보다도 강력한 악력이 이미 그녀의 손목을 쥐고 바쁘게 비상구를 내려가고 있었으니.

***

대낮에 저지른 땡땡이.

지안이 아무리 애타게 물어도 도하는 목적지에 대한 일말의 힌트도 주지 않았다.

때문에 지안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방을 주시했다.

한참을 달려 차가 도착한 곳을 둘러보던 지안의 두 눈이 말없이 흔들렸다.


“설마…… 여, 여기예요?”

“응.”

뻔뻔하다 못해 당당한 도하의 대답에 지안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평소와 달리 짓궂어 보이던 미소가, 왠지 모르게 거칠던 손길이 어딘가 급해 보인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설마 대낮에 땡땡이까지 치며 이런 곳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안은 믿기지 않은 듯 다시금 창밖을 유심히 살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있는 한 고급 호텔.

산속에 자리한 탓에 프라이빗하고 보안이 철저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여기서 뭘 하려고.

순간 잊고 있던 한 장면이 불쑥 피어올랐다.


‘아까 할머니 말씀 잘 들었지. 다 준비해주신다고. 그러니까 당신은 하나만 준비하면 돼.’


‘……하나요?’


‘응. 요새 유행하는…… 혼수.’


‘……!’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어. 우리의 2세는.’

주체할 수 없이 뜨겁게 차오르던 그 밤의 감각과 터질 듯 뛰던 심장박동까지 모두 되살아나자, 덜컥 겁이 났다.

서, 설마 지, 지금 혼수 준비를 하려는 건가?

낯 뜨거운 장면이 머릿속에 펼쳐져 가자, 지안은 본능적으로 팔짱을 끼고 방어적인 태세를 갖췄다.


 
그런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보던 도하가 나직이 뱉었다.


“뭐 해. 내리지 않고.”

그의 재촉에도 지안은 앞일이 왠지 눈에 그려져서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지안이 동상처럼 뻣뻣한 자세로 버티고 있자 도하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서지안?”

“……내, 내려서 뭐 하려고요?”

“뭐?”

“그렇잖아요. 대낮에 갑자기 납치, 아니 강제 땡땡이까지 시켜가며 호텔에 온 목적이.”

“……!”

그제야 지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도하는 헛웃음을 쳤다.


“왜 웃어요?”

“짐승남이 취향인가. 밤낮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네? 제, 제가 언제요!”

“말만 해. 당신 로망이라면 못 되어줄 이유도 없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차에서 내린 도하는 냉큼 조수석으로 다가와 차 문을 열어줬다.

그럼 상상하던 게 아니라는 소리인가.

지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호텔에 들어선 도하는 망설임 없이 어딘가로 향했다.

객실 체크인 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지안은 호텔 프런트 쪽을 힐끔 보고는 얼른 뒤따라 걸었다.

한 걸음 앞서 걷던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어 그녀를 돌아보며 낮게 속삭였다.


“실망한 거 아니지?”

“……네? 시, 실망은, 누가요!”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식은땀이 삐질 나는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선 곳은 5층 미팅룸이었다.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

“……?”

“굳이 따지자면, 나보다 당신을 더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그게 누군데요?”

“…….”

도하는 말 대신 눈짓으로 바로 앞 대형 미팅룸을 가리켰다.

우리를,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미팅 룸 문 앞에 선 도하가 정중히 노크를 건네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거대한 미팅 룸 안에서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중년 여성이 걸어 나왔다.

실크 재질의 블랙 원피스와 길게 파인 목 위로 두른 은은한 빛깔의 스카프가 고상함과 우아함을 자아냈다.

긴 생머리와 과감한 화장법에서 교포 느낌이 물씬 나는 여자는 하얀 이를 훤히 드러내고 웃으며 인사했다.

도하와 영어로 인사를 나눈 여자는 도하의 옆에 서 있는 지안을 스캔하듯 보고는 다가와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베라 안이에요.”

베라 안.

지안은 익히 들어본 이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전 세계적인 유명 패션 디자이너였다.

국내 톱스타들이 결혼할 때 베라 안이 디자인한 값 비싼 웨딩드레스를 입어 지안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유명한 디자이너가 대체 왜 저를 보고 싶다고 했을까.

지안이 커다란 눈망울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보고 있자, 베라 안은 씩 웃으며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미팅 룸 안에 들어선 지안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여러 개의 마네킹에 아름다운 드레스가 줄지어 전시되어 있었다.

베라 안은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시즌 신상 드레스 트렁크 쇼를 진행차 한국에 왔답니다. 그러다 우연히 두 분의 기사를 접했죠.”

“…….”

도하는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두리번거리는 지안에게 나직이 말했다.


“베라 안은 신상 드레스 트렁크 쇼를 위해 전 세계를 투어 중이야. 사실 그 투어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지.”

“……다른 목적이요?”

지안의 두 눈이 깊은 호기심을 머금고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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