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대, 환, 장, 파, 티…….’
그 시각에 클레어는 소파에 가로누워 검지에 걸고 있던 인장 반지를 손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테이블에는 신문이 쌓여 탑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 로텐부르크의 모든 신문사에서 일제히 호외를 띄웠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기세가 유지되었다.
신문은 불이 나게 팔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기 있는 헤드라인은 이것이었다.
《클라우제너 공작,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 해?”》
헤드라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현대판 신데렐라!》
보통선거권도 없는 주제에 현대 같은 소리 한다, 진짜.
끼리끼리 결혼하는 법이라는 세상 이치를 넘어서서, 귀천 상혼이 남아 있는 세상이다.
신데렐라는 신데렐라다. 어찌 보면 남작가의 딸이 전통 있는 지배 가문의 주인과 결혼하게 생겼으니 현대판도 아니라 진짜 신데렐라였다.
클레어는 골을 싸맸다. 아무도 그녀가 에리히의 청혼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어떻게 감히 클라우제너 공작의 청혼을 거절한단 말인가? 그는 늙은이도, 재혼도, 삼혼도 아니고 든든한 아들이 이미 네 명쯤 있는 사람도 아니라 젊고 아름다운 미혼의 청년이기까지 했다.
클레어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불행한 것은 그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에리히밖에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혔다. 기레기와 신문은 정녕 뗄 수 없는 사이란 말인가?
“그렇게 화가 날 정도면, 소송을 하시죠?”
그녀가 드러누운 소파 뒤에 서서 불난 머리에 부채질을 하고 있던 로저가 말했다.
“없는 소리 지어내서 한 거잖습니까? 셔우드 씨라면 한재산 털어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흥분하는 티를 내면 더 덤벼들 게 뻔하잖아.”
클레어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설령 신문사 몇 개를 폐간시키는 것에 성공하더라도, 그 사실 자체가 스캔들이 되어 진실을 캐겠다느니 속사정이 있을 거라느니 하면서 벌떼처럼 달려들 미래가 보였다.
물론 클레어는 빡침을 해소하기 위해 일상을 갈아 넣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면, 욱해서 루이자에게 되는대로 쏘아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공작 대부인이 자신에게 찻잔을 던지지 않았을 거고, 에리히가 거기에 반응해서 공개적으로 청혼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으리라.
아버지가 언젠가 그녀에게, 넌 그 욱하는 성질을 고치지 않으면 큰일 날 거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왜, 뭐 어쨌다는 건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11년 전에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에리히가 말을 걸었을 때부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아렌의 남작 영애답게 조용히 쭈그러져서 에리히의 얼굴을 보고 감탄이나 하고 있었더라면, 오늘의 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누굴 탓하겠는가? 결국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었다.
[너는 성격이 비틀렸어.]
에리히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클레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만은 그 말에 공감했다.
아니다.
더 생각해 보니 억울해서 클레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우.”
반지 모양이라고 해서 인감도장으로 청혼하는 작자가 문제지, 자신이 문제인 게 아니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는 서슬에 로저가 조금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러면, 결국 그 공작님의 청혼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이걸 돌려보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클레어는 검지에 끼워 빙빙 돌리고 있던 에리히의 인장 반지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자 로저가 씩 웃었다.
“그걸 왜 돌려보냅니까?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은 빼먹어야지 않겠습니까?”
클레어는 웃어 버렸다. 그래도 로저가 낫긴 나았다.
마사나 다른 사람들이라면, 공작 부인이 되어 에리히를 구슬리면 공작가가 전부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는데, 왜 갈등하느냐고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클레어는 도로 털썩, 소파에 앉았다.
“어차피 거절 못 하게 됐지.”
자신은 문제가 아니다. 구설수에 오르는 건 상관없었다. 여기서 백날 비난해 봐야 위빙 상단의 자산은 증가할 테고, 델포드 남작령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대중은 슬그머니 이 청혼 스캔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너 공작을 닮은 남자아이’의 존재까지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이대로 어딘가 시골로 꺼져서 숨만 쉬고 조용히 살면 안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클레어와 엘리엇은 이미 눈에 띄었다.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방어벽, 곧 ‘아무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물론 위빙 상단이 아주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돈을 벌었고, 벨프 후작가와 다툴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기껏해야 하급 귀족이 돈 좀 벌었다는 이야기였다.
자본주의가 퍼지고 있는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힘과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혈통이었다.
그리고 클라우제너 가문이 관련되었으니, 제국의 진짜 권력자들은 이미 그녀와 그녀 등 뒤에 있는 델포드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엘리엇의 생부를 죽인 자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리라.
그녀는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선배가 알고 한 건 아니겠지만, 정확한 유효타였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편두통 체질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로저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마사지라도 해 드릴까요?”
“마사지?”
그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클레어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만둬. 이걸 아부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저는 남작님의 정부가 될 각오가 되었습니다. 셔우드 씨는 몰라도, 클라우제너 공작님과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어이가 없어, 진짜.”
클레어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피식 웃었다.
“왜 그걸 남자들과 싸워서 이기려고 해? 내 이성과 싸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승산이 아예 없는 게임이잖습니까? 전 승부사지, 패배를 즐기는 변태가 아닙니다.”
“승부사 같은 소리 한다.”
클레어는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허튼소리는 됐고, 지난번에 맡긴 일은 제대로 처리된 거야?”
“그게 말이죠…….”
그때 하녀가 열려 있는 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전력질주로 오르기라도 한 듯, 새액새액 빨개진 얼굴로 하녀가 외쳤다.
“남작님! 큰일이에요!”
“왜 그래? 무슨 일인데?”
하녀의 상기된 얼굴은 어쩐지 기뻐 보이기도 했다.
“지금 클라우제너 공작님과 셔우드 변호사님이 싸우고 계세요!”
“뭐?”
클레어는 입을 벌렸다.
“와아아앙!”
클레어가 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찢어지는 듯한 아이 울음소리가 제일 먼저 들렸다.
상황은 종결된 다음이었다. 장식용 콘솔이 엎어지면서 그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화병이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흩뿌려지고, 그 위에 물과 꽃잎 조각들이 떠다녔다.
“이모, 이모오!”
엘리엇이 서럽게 울면서 클레어에게 팔을 뻗었다. 에리히가 황급히 엘리엇에게 손을 뻗었지만, 엘리엇은 에리히의 손을 탁 밀어내고 클레어에게 매달렸다.
클레어는 먼저 엘리엇을 안아 올리고 사람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보모로 고용한 하녀와 호텔 종업원, 지배인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이들 입장에서는 에리히는커녕 그레이도 함부로 붙잡아 뜯어말릴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하.”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을 내쉬면서 두 남자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엉망진창이었다. 그레이의 얼굴에서는 안경이 날아가 있었고, 언제나 칼같이 단정하게 갖춰 입는 라운지 슈트의 타이와 단추도 너덜거렸다.
에리히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은 온통 흐트러진 채 젖었고, 실크로 만들어진 셔츠의 옷깃과 소맷자락이 찢어져 드러난 피부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바지는 양쪽 모두 물에 젖었고, 에리히의 구두는 짓밟혀 엉망이 되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둘 다 미쳤어요?”
“클레어, 저놈 내보내.”
“공작 각하, 그 입 좀 다물어 주실래요? 지금 둘 다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클레어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차분하게 말했다. 엘리엇이 아직도 그녀에게 안겨서 엉엉 울고 있었다.
로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짐짓 심각한 얼굴이었으나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끌어 내리는 것이 역력했다.
“어후, 점잖으신 분들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어린 도련님이 놀라시지 않았습니까?”
“…….”
“도련님만 우시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차라리 장갑을 던지시지.”
에리히의 눈에서 새파랗게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장갑이 있었어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저 카슨은 그 정도 상대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그 전에 클레어가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지배인, 조용한 방을 하나 내줘요. 어쨌든 가서 그 옷차림 좀 어떻게 해요. 아주 호외로 산맥을 만들어서 나를 압사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셔츠와 베스트, 타이를 부탁하고 싶군. 바지는 말리면 되겠고.”
에리히도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흘려보내고, 태연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클레어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몸단장을 다시 하고 올라갈 테니 기다려. 우리, 아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누가 할 소린데 그래요.”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