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63)

20화

에리히가 지배인을 따라갔다. 클레어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가 몸을 구부려 바닥에서 반지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클레어는 그게 무엇인지 보지 못했다.

“넌 나랑 같이 올라가자.”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그래 가지고 그냥 간다는 소리 하지 말고.”

클레어는 몸을 홱 돌렸다. 그레이의 발소리가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리엇의 울음은 이제 훌쩍거리는 소리가 되어 있었다.

“많이 놀랐어?”

“흐응, 흐으응, 아저씨가, 막 주먹 들고…….”

엘리엇이 더듬거리며 호소했지만, 울먹거리면서 끊어지는 말로 두서없이 하는 말은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괜찮아. 이모가 둘 다 두 번 다시 못 싸우게 혼내 줄 테니.”

“응.”

이모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안심한 듯이 웅얼거리다가 잠에 떨어졌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집사와 하녀들이 그레이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클레어는 집사에게 지시했다.

“그레이 옷에 단추 좀 달아 줘. 망가진 거 수선도 좀 해 주고.”

“예.”

“드레스룸에 보니 남자용 가운이 비치되어 있던데, 잠깐 그거라도 걸치고 있어.”

클레어는 그레이에게 그렇게 말하고 우선 엘리엇을 침실 쪽으로 데리고 갔다.

뒤늦게야 소식을 들은 마사가 허둥지둥 달려왔다가 그레이의 몰골을 보고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니, 그레이! 이게 다 무슨 일이니?”

“엘리엇 님은 침실 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레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사는 지극히 보통의 제국인이었다. 그녀는 원래부터도 클레어가 그레이를 택한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대로 전문직에 종사하며 귀족을 모시던 중류 계급도 아니고, 부유한 자영농 출신도 아니다.

50년만 더 옛날이었다면 농노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잘해 봐야 몸종이었겠지.

당연히 그런 상대보다는 클라우제너 공작의 청혼에 월등히 기뻐했다.

그레이는 이미 그녀가 자신을 논외로 여기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그녀를 빨리 엘리엇에게 보내는 편을 택한 것이다.

침실 쪽으로 들어간 마사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얼른 죽였다. 그레이가 그 소리를 듣고 돌아섰을 때, 집사가 가운을 가지고 왔다.

“…….”

그 가운은 숙박객을 위해 준비된 품위 있는 물건이었다. 클레어의 실내 가운 옆에 걸려 있었으리라.

그는 선뜻 가운을 받아 들지 못했다. 집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재킷은 이쪽으로 주십시오, 셔우드 씨. 베스트도 벗으시는 쪽이 좋겠습니다. 다림질을 새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레이는 집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겉옷을 벗었다.

씻을 물을 준비해 주어서 소매를 걷고 막 세수를 했는데, 클레어가 침실에서 나왔다. 그레이는 서둘러 가운을 찾았다.

클레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셔츠 입었는데 뭐.”

그래도 드레스셔츠 한 장 차림새로 그녀 앞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레이는 얼굴도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가운을 걸쳤다.

“……엘리엇 님은 어떠십니까?”

“잠들었어. 좀 놀란 것 같기는 하지만, 경기를 일으킬 나이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클레어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까치발을 들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레이는 멈칫 반걸음쯤 뒷걸음질 쳤지만, 클레어가 하는 일에 저항하지 못하고 고개를 구부려 얌전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뺨에 열이 오르려는 것을 느끼고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클레어가 그의 눈가와 관자놀이 쪽을 살피고, 콧날 쪽에 손을 댔다.

“조금 찢어졌네. 안경 쓴 사람 얼굴을 치는 건 살인미수라고.”

“아닙니다.”

“법 이야기가 아니잖아.”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가의 상처 언저리를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고 물러섰다.

그제야 그레이는 숨을 천천히 세 번에 걸쳐서 나눠 내뱉었다.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레어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저 사람, 복싱과 레슬링을 어릴 때부터 배웠어. 지배 가문들은 지금도 로멜 귀족의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저를 묵사발 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레이의 무뚝뚝한 대답에 클레어가 약간 웃었다.

“그러게. 이왕 한 대 치기로 한 거 네가 박살을 내 버리지 그랬어. 그랬으면 저 높은 콧대도 내려앉았을 텐데.”

“…….”

“왜 그랬어? 어리석은 일인 줄 알잖아.”

클레어가 다시 물었다. 그레이는 그녀의 손이 스쳤던 언저리가 왜인지 간지러운 듯한 느낌이 들어서 거기에 자기 손가락을 댔다가 도로 내렸다.

그리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레이…….”

“노총각이 눈앞에서 결혼 기회를 놓친 겁니다. 그 정도는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께서도 양해해 주셔야죠.”

그레이가 어울리지 않게도 농담처럼 말했다.

클레어는 그가 농담하는 것을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는 진중한 성품이었고, 클레어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웃지 못했다. 가볍게 웃어넘겨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일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아직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레이.”

“하지만 결정을 하셨죠?”

클레어는 멈칫했다. 그레이가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합리적인 분입니다, 클레어. 그리고 저는 당신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표현까지는 감히 덧붙일 수 없을지 몰라도,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을 거라고 그레이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만큼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려고 되짚으며 늘 생각해 왔으니까.

한때는 미래의 주인을 위한 것이었고, 지금은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마 상황과 조건이 운 좋게 자신을 가리키지 않았다면 한 번도 헤쳐서 들여다보지 않았을 감정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 반지는 영원히 서랍에서 잠자고 있었으리라.

“그냥 묻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소문이 커지지 않았습니까? 지금에 와서 저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자들은 오히려 이런저런 헛된 극본만 써 댈 겁니다.”

“그렇지.”

그레이까지 끌어들여 지저분한 이야기가 되는 것 정도는 양반이다. 엘리엇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소문은 그야말로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계승법이니 호적법 같은 것을 따지며 귀족 전체의 질서를 훼손했다고 소송을 걸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엘리엇 님에게도 분명히 상처가 될 겁니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나서서 직접 정리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실 분이죠, 당신은.”

클레어는 이번에도 가볍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전 같으면 쓴웃음을 지으며 ‘어쩔 수 없지’라고 한숨을 쉬고, 제멋대로인 진짜 귀족 나리에 대해 실컷 불평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었다. 클레어는 자신에게 청혼한 남자에게 우정을 요구할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

그가 반지를 주고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그 결혼 계약서는 가문을 함께 이끌어 갈 동업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진짜 결혼과 반려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그레이가 말했다.

“저와 쓰시려던 계약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배려였을 것이다. 클레어는 난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한 일이지.”

“계약이라는 건 원래 서명하여 성사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신중하신 것은 좋은 일입니다.”

“……미안해.”

클레어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별말씀을. 애초부터 제가 당신에게 청혼했던 건,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제가 최상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상황은 에리히 클라우제너를 가리키고 있다. 어떤 문제는 힘으로만 풀어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느냐, 행운을 기다릴 수밖에 없느냐가 그와 자신의 차이일 것이다.

“애초부터 엘리엇 님을 지키기 위해서 결정하셨던 결혼이잖습니까? 그러니까 뜻하던 대로 하십시오.”

“그레이…….”

“제가 언제나 충실한…… 델포드의 가신이라는 것만 기억해 주시면 됩니다.”

그레이가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클레어는 그에게 순순히 손을 맡겼다. 그레이는 공손한 태도로 그 손등 위에 입술을 눌렀다.

“고풍스럽네.”

클레어는 씁쓸하게 웃었다. 인장 반지에 이어 그레이까지. 그녀는 악수하듯 그레이의 손을 한번 힘껏 잡았다가 놓았다.

“가신보다는 믿을 만한 변호사와 친구가 더 필요한데.”

“말씀하신 사람도 언제든 남작님 곁에 있을 겁니다.”

그레이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웃음인지 무표정인지 좀처럼 분간할 수 없는 그것은 클레어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어가 대답했다.

“들어와.”

얼굴을 내민 것은 로저 카슨이었다. 그레이는 습관적으로 가슴 포켓을 더듬었지만, 안경은 없었다.

클레어가 그걸 보고 말했다.

“변상받아. 비싼 걸로.”

그레이의 맨얼굴과 가운 입은 모습을 본 로저가 휘익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역시 미남은 안경을 벗으나 쓰나 미남이군요. 이걸 그 공작님이 좀 봐야 하는데.”

“허튼소리 하지 말게. 무슨 일인가?”

“별건 아니고, 호외가 나왔습니다. 잉크도 안 마른 놈인데요.”

로저가 신문 두 장을 휘휘 허공에 흔들었다.

결국 셔우드 씨 이야기까지 나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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