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방 안으로 뛰어드는 루이자를 뒤따라온 하녀들은 감히 잡지 못했다. 지배인도 반사적으로 그녀를 잡으려다가 공작 대부인의 몸에 함부로 손대지 못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클레어의 앞을 막아선 것은 케이시였다.
루이자가 과감하기는 했으나 몸 쓰는 실력이 유별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클레어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대신에 케이시의 옷깃을 움켜쥐는 꼴이 되고 말았다.
투둑.
약한 셔츠깃이 뜯어졌다. 타이가 풀리면서 쇄골 아래까지 드러나는 바람에 루이자가 깜짝 놀라 물러섰다.
“실례합니다만, 공작 대부인.”
케이시가 클레어를 몸으로 가리듯이 하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비켜요, 케이시.”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비켜서게 했다. 케이시는 염려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는 않았다.
클레어는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루이자에게 차갑게 말했다.
“무례하시군요.”
“무례? 얘 말버릇 좀 봐!”
“기별도 주지 않고 방문하신 것도, 노크 없이 문을 손수 여신 것도, 인사를 받기도 전에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신 것도 숙녀다운 행동은 아니죠.”
클레어가 케이시를 흘깃 돌아보며 덧붙였다.
“거기다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옷을 뜯어 내다니. 이거야말로 대부인께서 경멸하실 만한 천박한 짓 아닌가요?”
루이자는 움찔했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깟 게 그래 봤자 결국 남작이다. 공작가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는 낙혼이었다.
게다가 감히 에리히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던 주제에 뭘 잘했다고 남을 지적질하는 건가.
“이게 왜 이리 뻔뻔해? 너 지금 약혼을 하고서도 딴 남자와 단둘이 밀회하다 잡혔어!”
“세상의 그 누가 이런 곳에서 밀회를 해요?”
클레어는 공간을 쓱 둘러보았다.
둘이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홀은 아주 넓었다. 만찬이 아니라 파티도 할 수 있었고, 아주 환한 데다가 공적인 업무로 쓸 작정이었기 때문에 그에 맞도록 건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남자랑 단둘이 만난 걸 부정해 보겠다?”
“사람 이상하게 만들지 마세요.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뿐이에요.”
“그래, 너 말 잘했다. 안 그래도 내가 그 이야기를 하러 왔어. 네가 뭔데 다이아몬드 광산에 손을 대?”
루이자가 언성을 높였다.
“지금까지야 가난해서 장사치 짓에 손댔어도 어쩔 수 없었겠지. 그래도 이제 공작가에 들어올 몸이 되었으면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고 신부 수업을 하면서 가문의 안살림을 배울 준비를 해야지, 어디서 땅 파는 남정네들이랑 몸 비비며 일을 하려고 해!”
“아.”
클레어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결국 돈 문제였나.
갑자기 루이자를 상대하는 것이 전부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사람에게 변명 같은 것을 왜 해야 하는가. 에리히라면 그런 소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처럼 혈통으로 평판을 전부 깔아뭉갤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지만, 애써 변명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신문사를 전부 장악한 이상 추문을 퍼뜨릴 자도 없었다. 루이자는 자기 생각만큼 사교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도 못했다.
에리히의 계모라는 신분만 아니었으면, 다섯 문장을 말하기도 전에 내보냈을 것이다.
“역시 난 귀족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니까.”
클레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루이자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고 날카롭게 말했다.
“그래도 네가 천하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구나.”
“클라우제너의 후계자를 천출로 만들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그런 발언은 조심해 주시겠어요?”
“뭣?!”
클레어의 말에 루이자가 반박은 하지 못하고 혈압 오른 소리만 질렀다.
“어쩌겠어요? 기정사실이 있는데.”
클레어는 차분하고 조곤조곤하게, 다정하게 말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은 에리히가 제게 맡기기로 한 거니까, 반대하실 거면 그이한테 가서 하세요.”
그녀는 평소에 에리히를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않았다. 내내 선배라고 불러 왔는데, 결혼하기로 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호칭이 쉽게 바뀌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자의 혈관에 부담을 주기 위해서라면, 조금 더 간지럽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이가 들어줄지 모르겠네요. 그이는 제 사업 감각을 아주 신뢰하고 있거든요. 아시잖아요, 어머님.”
“누가, 누가 네 어머님이야?!”
“아, 제가 실수했나요? 설령 성이 바뀐다 해도 모자의 인연을 끊지는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클레어는 짐짓 입술에 손을 얹으며 몹시 당황했다는 듯이 말했다.
루이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격분으로 새빨갰던 얼굴에서 천천히 핏기가 빠져나갔다.
“너,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크로지크 가문의 영식에 대해 말씀드리는 거예요. 설마 어머님 같은 숙녀 중의 숙녀이신 분이 남편감도 아닌 남자와 단둘이 만나고 계신 건 아니실 테고.”
클레어가 상냥하게 말했다.
“전 어머님 재혼에 대해서 완전히 찬성이거든요. 그이가 반대하면 제가 잘 설득할게요.”
싸대기라도 칠 것처럼 부들대던 루이자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하녀가 얼른 부축했다.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휴게실로 모셔요.”
클레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건 틀림없이 명령이었다.
“너, 너, 감히……!”
루이자는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발작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지만, 하녀들은 겁에 질리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클레어에게 위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끌려 나가고 나자 클레어가 지배인에게 말했다.
“미리 연락하지 않은 사람은 들여보내지 마세요. 난처한 처지라고 봐주는 것도 이게 세 번째예요.”
“죄송합니다, 남작님.”
지배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9. 수레국화 열쇠
에리히의 앞에 상자 다섯 개가 놓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맡고 있는 대리인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색 중에 좋은 것은 대부분 대부인께서 가져가시거나 그분을 통해 판매되었습니다. 이것들도 품질은 아주 좋습니다. 단지, 색상이 없는 것은 저렴한 편이라, 공작가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본인이 그게 좋다고 하니까.”
다이아몬드는 희귀한 보석이 아니다. 산출량이 풍부하고, 가공 도중 손실되는 비율은 낮았다.
클라우제너 공작령에서 두 번째 광산이 발견된 뒤로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계속 하락세였다.
아주 아름답고 선명한 빛깔을 띤 핑크나 블루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최고의 보석이었지만, 무색 다이아몬드는 루비나 에메랄드보다 훨씬 저렴했다.
에리히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뚜껑을 열자 물을 머금은 듯 맑고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빛을 산란시켰지만, 역시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숙녀가 원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지. 원래 보석을 잘 착용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마음에 드실 겁니다. 내포물 하나 없이 완벽한 다이아몬드입니다. 색상도 제가 경영을 맡은 이후로 가장 흰 것입니다.”
품질이 너무 좋아 쉽게 내보내기는 아까워서 따로 빼 두었던 것이라고 대리인이 말했다.
“이것을 반지로 하지. 디자인화를 그려 둔 것이 있다고 하니, 델포드 남작가로 사람을 보내 받아 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결혼 날짜까지 잡아 놓고 약혼반지를 의논하여 만드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서 대리인이 어색한 얼굴을 했다.
“예물로 이것 하나만은 부족하지. 준비된 것이 더 있겠지?”
“아, 예. 본래 대부인의 목걸이로 만들려고 모아 놓은 다이아몬드가 좀 있습니다. 물론 모두 최상품입니다. 메인이 될 만한 무색 다이아몬드도 있고요.”
“한 달 안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을 전부 계획해서 가져와.”
“결혼식에 착용하실 보석 전부를 새로 만드실 예정입니까?”
“그건 신부가 결정할 일이 될 것 같군. 가문의 보석은 지금 대부분 어머니 손에 있어서.”
“외람되지만, 대부인께서는 절대 내놓지 않으실 겁니다.”
“음.”
에리히도 그 문제로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루이자에게서 안주인의 열쇠를 받아 오긴 해야 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클레어는 오래된 가문의 전통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고, 에리히도 특별히 본받을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닌 관습에 굳이 얽매일 마음은 없었다.
‘다이아몬드 사업을 하겠다고 했으니, 뭐, 계획이 있겠지.’
클레어의 말마따나 세기의 결혼, 그것도 연애결혼이다. 신문사까지 사 달라고 한 걸 보면 스스로 간판 노릇을 하려고 할 텐데, 아마 착용할 보석에 대해서도 생각이 따로 있으리라.
에리히는 그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전면에 나서서 광고 같은 것을 해야 할 만큼 클라우제너 공작가는 부족하지 않다.
클레어를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그것은 좀 이상한 느낌이라 에리히는 잠시 자신의 마음을 살폈다.
자신은 항상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묻혀 살려고 하는 게 불만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반갑지 않다니.
“각하?”
“음. 가문의 보석을 쓰더라도 한 벌 새로 만들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준비할 수 있는 만큼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예물로 쓸 수준의 보석이다. 그걸 세트로 한 벌, 한 달 안에 과연 완성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공작의 명령이다. 에리히는 ‘할 수 있는 만큼’이라고 했지만, 반드시 해내야 했다. 대리인은 창백해진 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똑똑.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큰마님께서 외출에서 돌아오셨는데 편찮으십니다. 선대 공작님의 존함을 부르시면서 계속 울고 계시고요.”
“…….”
“마리아 양의 말로는, 델포드 남작님을 만나고 오셨답니다.”
에리히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