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어떻게 나한테 그딴 소릴 할 수가 있어. 어떻게……!”
이불을 뒤집어쓴 루이자가 흐느꼈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제 목이 다 쉬어 있었다.
침대 가에 앉은 요한은 고양이를 어르듯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달랬다.
“그만 우십시오. 내일 되면 고운 뺨이 엉망이 될까 봐 제 마음이 다 아픕니다.”
“넌 몰라. 그 영악한 것이,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 수가 있어?”
루이자가 웅얼거렸다.
지리멸렬하여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요한은 짜증을 숨기고 애써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대체 무슨 말씀을 들으셨기에 이러십니까?”
하녀에게 캐물어 클라우제너의 다이아몬드 광산에 관한 문제로 루이자가 급히 나갔다는 소식까지는 알아냈다.
그 이상의 정보가 필요했다.
클레어 델포드가 본격적으로 공작 가문의 자산을 떼어 사업체로 만든다는 것은, 무리수처럼 보이는 이 결혼이 그저 치정 문제가 아니라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향후 진로에 대한 중대한 결단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작의 생각을 남들보다 적어도 반보는 빨리 알아야 해.’
황후가 관심을 보인 일이다. 모두가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첩자는 자신 혼자가 아니리라.
그리고 그는 황후의 직접 지시로 루이자의 곁에 붙었다. 소식이 늦으면,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라도 정보가 필요했다. 다이아몬드라면 크로지크 백작가와도 완전히 무관하지 않았다.
‘위빙 상단주가 다이아몬드에 손을 댄다는 건데.’
하지만 루이자는 흐느껴 울면서 도무지 말 같은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요한은 이불 위로 그녀를 토닥이며 슬그머니 하녀들을 살폈다. 매수한 하녀 중 하나가 살짝 손가락 두 개를 까닥거렸다.
만나지 않는 게 좋을 사람이 오고 있다는 뜻이다.
‘차라리 하녀에게 묻는 게 빠르겠군.’
요한은 결론을 냈다. 내실에는 자주 드나들었으나, 안주인의 침실은 또 다른 문제였다.
“흑, 프란츠, 아아, 프란츠! 내가 이런 수치를 당하고도 살아야 하나요!”
루이자가 죽은 선대 공작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는 통곡이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차라리 날 같이 데려가 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신 공작님께서 더 슬퍼하실 겁니다.”
요한은 의식적으로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슬며시 이불 옆으로 손을 밀어 넣어 널브러진 루이자의 손에 깍지를 끼어 잡았다.
“이제 그만 눈물 흘리십시오. 눈물 때문에 부인의 눈동자에서 보석 같은 빛깔이 빠져 버리면 저도 슬플 겁니다.”
“흑…….”
슬그머니 이불을 걷어 내자 루이자의 얼굴에 설움 때문에 생기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벚꽃빛 홍조가 돌았다.
그녀가 한쪽 팔을 뻗었다. 포옹과 어리광을 원하는 태도에 요한은 응해 주기로 결정했다.
스킨십은 선호하지 않지만, 루이자를 진정시키고 마음을 붙잡아 두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다.
빨리 달래 놓고 나가야 한다.
그때였다.
“주인님께서 오십니다.”
한발 먼저 당도한 하인이 알렸다.
요한은 루이자의 머리를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울먹였지만, 요한을 다시 잡지는 않았다.
선을 넘는 일이 아니다, 우정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도 결국에는 찔리는 마음이 있는 셈이었다.
요한은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침실 문 쪽으로 물러섰다.
침실 근처에 모여서 말도 함부로 못 하고, 그렇다고 마음 편히 뜨지도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던 하녀들이 벌써 문간에 도열해 있었다.
마치 정문 앞에서 가주의 귀가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할 때 같은 자세였다.
요한이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가기 전에 에리히가 복도에 나타났다.
우르르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요한은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섞였다.
남들의 예의와 긴장은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편안한 태도로 방으로 들어선 에리히가 흘깃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요한은 그가 자신을 알고도 무시하는 건지, 진짜로 모르는 건지 영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몰래 출입하고 있었지만, 집안의 주인인 공작이 아예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하지만 크로지크 백작 영식 따위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또는, 어쩌면 황후와 어느 정도까지는 협상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 요한은 어금니를 물었다.
에리히는 그를 무시하고 침대 가로 다가갔다. 요한은 자연스럽게 침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루이자의 하녀 하나가 살그머니 그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루이자의 마부가 또 그랬다.
요한은 쪽지를 폈다.
『노이 다이아몬드.』
『3일 후 오후 8시, 위빙 상단 본점에서.』
이건 델포드 남작의 쪽지다.
노이 다이아몬드라는 것은 크로지크 백작가에서 매점하고 있는 광산의 이름이었다.
이걸 두 개의 쪽지로 보낸 것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크로지크 내부 사정은 이미 꿰뚫고 있고, 루이자의 주변 사람은 여럿 매수되었으며…….
그리고 자신도 매수할 작정이라는 뜻이다.
에리히는 여전히 흐느껴 울고 있는 루이자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집사가 얼른 의자를 가져왔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클레어에게 서운한 소리를 들으셨다지요.”
“히끅. 내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너, 걔가 뒤로 무슨 짓 하는지 모르지?”
루이자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울먹거리는 눈으로 에리히를 바라보며 말했다.
“걔가 세상에, 다른 남자 만나고 있던 거 알고 있니?”
“어머니.”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클레어는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사람 만날 일이 많죠.”
“에리히!”
루이자는 대체로 언제나 에리히에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설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로 다이아몬드 광산을 그 여자에게 주려고? 말이나 되는 소리니? 여자가 광산업이라니!”
“클레어는 위빙 상단의 주인입니다.”
“그건 베 짜는 일이잖니?”
직물은 인정할 수 있다. 베 짜기부터 바느질, 자수에 이르기까지 천을 다루는 것은 전통적으로 여자의 일이었으니까.
실제로 도는 돈의 규모나 친정인 벨프 후작가의 실패와 상관없이 루이자는 그것을 귀부인의 부업으로 여길 수 있었다.
물론, 자기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귀부인이란 초라하기 그지없는 존재라는 것을 별개로 하고 말이다.
하지만 광산? 그게 될 법한 소린가? 땅을 다스리는 것은 영주의 일이었고, 광업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남성적인 분야로 여겨졌다.
게다가 보석이다. 그런 귀한 것을 남작 영애 따위가 다루겠다고? 그 광산에서 나오는 것 중 최상품이면 그깟 시골구석의 남작령을 통째로 사 버릴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에리히는 차갑게까지 보이는 무덤덤한 얼굴로 루이자에게 말했다.
“채굴량이 너무 많은 까닭에 다이아몬드 광산의 수익률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맡아 준다면 저로서는 고마운 일입니다.”
“걔가 진짜 그걸 할 수 있다고 믿는 거니? 보석을 볼 줄이나 알겠어? 사교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여자야.”
“클레어가 사업을 한다는 건 어머니가 가끔 하시는 것처럼 귀품을 살 사람을 소개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조차 못 하면 뭘 한다는 거야?”
여자가 그런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루이자의 생각에는 그랬다.
“광산을 예물로 주는 건 좋아.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관리인은 제대로 된 사람을 네가 직접 고용해서 단속해야지.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짜고 클라우제너의 재산을 빼돌리게끔 그대로…….”
“억측은 그만두십시오, 어머니. 기껏해야 누굴 만나고 있는 걸 보신 게 전부 아닙니까?”
에리히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러날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자가 움찔했다.
“제가 결정한 일이고, 제가 선택한 여자입니다. 이 이상 관여 마십시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네 어머니인데!”
“전 어머니를 존중해 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 어머니도 그만큼 품위를 지켜 주십시오.”
에리히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발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였다.
루이자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내가 너 잘못되라고 하는 말도 아닌데. 흐흑. 걱정되어서, 그러는, 건데…… 흑.”
“…….”
에리히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릴까 했지만,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기다렸다가 말한다고 해서 진정하고 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수레국화 열쇠를 주십시오.”
“뭐?”
루이자가 멍하게 되물었다가 입을 손으로 막았다.
에리히가 말한 것은 내실 금고의 열쇠였다. 머리 부분이 수레국화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
그건 실질적으로 내실에 있는 귀중품을 꺼내기 위한 열쇠인 동시에 공작가의 안주인에게 배정되는 예산을 다루는 권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보통은 시어머니 손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지는 것이지만, 루이자의 상태로 보아 제대로 전달될 것 같지 않았다.
“지내실 장소는 지금 이대로 이 침실을 쓰셔도 됩니다. 클레어도 별달리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게 불편하실 것 같다면 어머니를 위한 저택을 새로 짓게 하겠습니다. 예산도 따로 책정할 거고요.”
에리히가 말했다.
“하지만 안주인이 바뀔 거라는 걸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루이자는 대답이 없다가 도로 쓰러지듯 누우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프란츠, 아아, 프란츠……. 어떻게 살라고 나만 남겨 두고 갔어. 흑.”
에리히는 루이자가 우는 것을 내버려 두고 일어섰다. 루이자의 직속 가정부가 수레국화 열쇠가 들어 있는 상자를 가져왔다.
소속이 어디든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사람들에게 에리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대부인과 공작 사이에 유의미한 싸움이 성립할 일은 없었다.
에리히는 집사에게 열쇠 상자를 챙기게 하고, 마지막으로 루이자에게 말했다.
“너무 울지 마십시오. 건강을 해치십니다.”
루이자의 울음소리가 심해졌다. 에리히는 그것을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다.
‘정리가 늦은 탓인가.’
자신이 늦게 결혼하는 바람에 루이자는 너무 오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미리 받아 두었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때는 마음에 비탄이 가득 찬 상태라 빨리 아내를 들여 공작 부인의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조차 괴로웠었다.
결혼 예정조차 없으면서 루이자에게서 열쇠를 빼앗아 가문을 안주인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고.
돌이켜 보면, 그때도 클레어 외의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줄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이건 받아 가겠지.’
인장 반지는 거절당했지만.
내실에서 나오는 에리히의 입가에 약간 웃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