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클레어가 의상실을 싹쓸이한 것은 기사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소문이 되었다.
에델바이스를 비롯하여 가장 인기 있는 의상실들이 그날 예약을 취소하며 정중한 사죄와 선물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에델바이스의 사장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으므로, 직원 중 몇 사람을 시켜 그날 온 귀한 손님이 누구신지 은밀히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 클라우제너 공작이?”
“사람 참 모를 일이야. 사람 다 있는 곳에서 인장 반지로 청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안 믿었는데.”
“늦바람이 무섭죠.”
“생각해 보면 선대 공작도 재혼한 부인을 얼마나 아꼈었나요? 그것도 다 핏줄이라니까요.”
“약혼녀가 무슨…… 남작이라고 했죠? 운이 좋은 거죠, 정말.”
티파티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날아다녔다.
“남작이라면 귀천 상혼인데, 그러면 공작 각하께선 계승권을 포기하실 생각인 건가?”
“에이, 그건 또 경우가 다르지요. 로멜-아렌 계승법이 있으니까.”
“하긴, 그러고 보면, 로멜과 아렌의 결합으로 태어난 황족에게 계승권을 준다고 했지, 꼭 아렌 왕가의 혈통이어야 한다고 지정하지는 않았지.”
“이건 황제 폐하와, 그 누님이신 빅토리아 대공께서 직접 의견을 확실하게 하셔야 해요.”
하지만 결국 정치적인 이야기는 뒷전이었다. 리누스 황자만이 아니라 황제의 형제자매인 두 로멜 대공이 모두 건강한 이상, 에리히 클라우제너의 계승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옛일을 캐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딸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5년 기다렸다는 게 영 허튼소리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아카데미 시절에도 조금씩 소문이 있었다나 봐요. 그렇게 델포드 남작을 눈에 들어 했다고.”
“어머. 전 완전히 반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복도에서 언성 높이고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대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까르르 웃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 보세요. 그 클라우제너 공작이, 후배 여학생과 싸움을 한다고요? 그것도 복도에서요?”
“그때부터 보통 사이는 아니었던 거죠.”
“안 그래도 우리 딸이 델포드 남작과 아카데미 동기라, 초대장을 보내 보라고 했어요. 제법 친했던 모양이에요. 졸업하자마자 영지로 가 버려서 자주 소식을 전하진 못했지만.”
“아하, 그러시군요. 티파티에서 만난 적은 없으시겠어요.”
“그러나저러나 예사 여자는 아니네요. 오빠나 남동생이 없다고 해도, 여자가 직접 작위를 잇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위빙 상단의 주인이잖아요. 예사 사람이 아닌 건 당연하죠.”
아이의 출생에 대해서도, 대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것은 즐거운 스캔들이었다.
신분 차이가 나니 씹을 만한 거리였고, 그렇지만 황실에 아렌 남작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정치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또 반면 위빙 상단의 성장 속도를 생각하면 신분 차이 정도는 눈감을 수 있는 수준이기도 했다.
한창 발전 중인 방직 산업에 신기술로 끼어들어 완전히 판도를 뒤집고 있는 위빙 상단이 클라우제너의 재력을 등에 업으면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도.
“근데 그러면, 슈나이더 백작 영애는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다른 곳도 아니고 에델바이스에서.”
이리스 슈나이더는 울먹이면서 하녀가 들고 온 꽃바구니를 손으로 밀었다. 에델바이스에서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손에도 힘이 없어 제대로 뒤엎지도 못하고, 꽃바구니는 조금 밀려났을 뿐이다.
“아가씨, 그렇게 울지 마셔요. 세상에, 어쩌면 좋아. 아가씨 얼굴이 다 부었네.”
측근 하녀가 아이에게 하듯 이리스를 달랬다. 그리고 차가운 물수건으로 뺨을 닦아 주려 했다.
이리스는 그 물수건을 외면하고 침대에 풀썩 쓰러져 엎드렸다.
“어떻게 다들 나한테 이래?”
그녀가 그런 모욕을 당하고 호텔에서 울면서 나갔는데, 신문에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다. 잘 알고 지내던 기자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영애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사주의 비위를 거스를 순 없으니까요.]
[저에 대한 기사를 쓰지 말라고 하던가요?]
[딱히 그런 지시가 내려온 건 아니지만,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추켜올리지는 못할망정 복잡한 문제를 만들 수는 없잖습니까?]
그리고 다음 날 보란 듯이 에델바이스 의상실에서 그녀의 예약을 취소했다.
그녀에게 새로 들어올 최상품 진주 목걸이를 가장 먼저 보여 주겠다던 보석상도 이미 팔렸다며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런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에델바이스에서는 며칠 동안 매일 꽃과 선물을 보내왔지만, 그것으로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 여자가 가진 건 아이뿐이잖아. 운이 좋아서, 아기가 생겨서.”
“아가씨…….”
“내 탓이야? 내가 부끄럼을 던지지 못해서 그런 거야?”
숨죽여 우는 이리스를 보고 하녀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 공작님이 이러실 수가 있냐고 모두들 원망했다.
클라우제너 공작이 이리스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교계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가십이지만 슈나이더 백작가의 고용인들에게는 확고한 사실이었다.
이리스가 에리히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어린 시절부터 고운 감정을 어떻게 예쁘게 길러 왔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신분의 격차를 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도.
이리스는 기품과 교양을 기르고, 아름다움과 건강을 보살피고, 명성을 드높였다. 그러면서도 약간 애처로운 목소리로 늘 염려했다.
[내가 혹시라도 클라우제너에 누가 되면 안 되니까.]
제 일도 아니건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무척 서럽고 한스러웠다.
이리스가 뭐가 모자란가. 슈나이더 백작가가 클라우제너에 감히 미치지는 못할망정, 이리스는 공작보다 못하지 않았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황녀라도 그들의 귀한 아가씨보다 못했다.
게다가 두 가문의 관계는 또 얼마나 특별했던가.
선대 공작은 슈나이더 백작을 우정으로 대했고, 어린 이리스를 딸처럼 귀여워했다. 매년 백작 일가를 여름 별장에 초청하고, 에리히로 하여금 백작가의 자녀들과 어울리게 했다.
가문의 격차를 생각하면 이런 우정은 더욱 각별한 것이었다. 에리히도 부친의 뜻을 받들어 선대 공작 사후에도 슈나이더 백작가와의 교제를 지속했다.
그 우정은 실은 선대 공작과 슈나이더 백작이 모두 애정만으로 재혼 상대를 선택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같은 어려움을 겪은 탓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선대 공작은 클라우제너와의 우정이 슈나이더 백작의 후처와 그 소생인 이리스에게 보탬이 되기를 바랐다.
루이자는 슈나이더 백작 부인 같은 천한 몰락 귀족이 자신과 같은 입장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대 공작의 뜻은 그가 한 번도 직접 입 밖에 낸 적이 없기에 더욱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 아가씨가 선대 공작님께 그렇게 많이 사랑받았는데!’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이미 혼담이 있었을 거야. 아가씨도 그래서 기다리면서 더욱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셨던 거잖아.’
‘그 불여우 같은 아렌 계집이 뭘 어쩐 거야, 대체? 아이가 그 여자 자식도 아니라는 말도 있던데.’
‘돈밖에 모르는 데다가 결혼 전에 애를 가진 그런 천박한 여자가 아렌 출신이라는 이유로 우리 아가씨를 밀어내고 공작 부인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게 말이 돼요?’
하녀들은 눈짓으로, 때로는 소곤거림으로 그런 뜻을 나누었다. 그게 이리스를 편드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었다.
자기 일은 아니지만, 자기 일만큼이나 분하고 억울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우세요.”
하녀장이 이리스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달랬다.
“이렇게 우시면, 주인님과 마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이렇게 고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드시면 아가씨의 숭배자들은 또 어떻고요?”
“날 내버려 둬.”
이리스는 울면서 하녀가 움직이는 대로 힘없이 몸을 돌려 눕혔다. 하녀장이 조심스럽게 물수건을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는 이리스의 눈 위에 얹었다.
“공작님도 곧 돌아오실 거예요. 신문에서도 전부 허튼소리를 하는 거예요.”
“맞아요. 책임감이 강한 분이니까, 아이 때문에 그러시는 걸 거예요.”
하녀장 곁에서 다른 하녀 하나가 얼른 맞장구쳤다. 말하고 보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는지 다른 한 명이 또 얼른 나섰다.
“5년이나 시달리셨을 텐데 이제까지 물 위로 문제가 떠오르지 않게 하신 것도, 공작님이 전부 아가씨를 생각해서 그러신 게 틀림없어요!”
“워낙 기품 있는 분인걸요. 신문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세요. 공작님이 그런 이상한 기사에 일일이 해명하는 것이 더 이상하잖아요!”
“이 일이 전부 끝나면 아가씨 곁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어쩐지, 지금까지 청혼하지 않으신 것도 아가씨가 이 일에 휘말릴까 봐 염려해서 그러신 게 틀림없어요!”
“잠깐의 실수 때문에 두 분이 헤어지다니, 말이 되나요?”
하녀들이 와그르르 위로를 쏟아 냈다. 말하다 보니 저희들끼리도 납득되는 바가 있어서 점점 목소리에 활기가 돋아났다.
이리스가 울먹였다.
“그분이, 아이 엄마를 버리실 리 없어…….”
“아가씨…….”
“이럴 줄 알았으면, 아렌 여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정당한 후계자를 내가 낳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이리스가 흐느낌을 멈추려고 애쓰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서로 훌륭한 신사와 정숙한 숙녀로서, 마음만 통한 채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럼요! 공작님은 결국 돌아오실 거예요!”
조만간 에델바이스도, 보석상도, 모두 후회하며 빌러 올 거라고 하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리스는 그런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슬프게 흐느끼기만 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이 황급히 일어섰다. 들어온 것은 슈나이더 백작 부인 카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