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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152/263)

153화

그때까지는 얼굴을 구기긴 했어도 낯빛은 도자기처럼 하얗게 유지하고 있었던 에리히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클레어. 무서운 게 없나?”

그가 어금니를 악물고 클레어가 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틀어잡았다.

클레어의 눈이 달콤하게 휘어졌다.

“만지지 말고, 구경만 할까요? 여기서 해도 상관없는데.”

에리히가 으득 이를 갈았다.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나 지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그가 승산을 점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똑같은 방식으로 흥분을 부추겨 상대의 이성을 날리는 것뿐이지만, 오늘은 불가능한 일이다.

클레어의 손이 바지 단추를 풀었다.

“하아.”

결국 그는 굴복했다. 뜨거운 숨이 클레어의 입술 위로 쏟아졌다.

클레어의 숨이 그것을 따라 조금 가빠졌다. 아랫배는 여전히 욱신거렸고 몸은 나른했지만, 이 남자가 제 손 아래에서 떨고 있는 게 만족스러웠다.

에리히가 두 팔을 그녀의 얼굴 옆에 짚고 허리를 움직였다. 닿은 곳은 오로지 클레어의 손뿐인데, 가장 깊은 곳을 결합시키기라도 한 양 뜨거운 숨이 뒤섞였다.

“클레어.”

“나 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클레어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말했을 때였다.

콩콩!

작은 노크 소리가 났지만, 열중한 두 사람은 미처 그 소리를 인지하지 못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아빠!”

신난 목소리로 소리친 엘리엇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침대를 쳐다보았다.

“아, 왔니?”

클레어가 숨 가쁜 걸 애써 숨기려 했지만 잘되지 않아, 목소리가 가닥가닥 끊어졌다. 얼굴도 열이 나는 사람처럼 빨갰다.

“엄마, 아직 많이 아파?”

그러고 보니 아프다고 했었다. 엘리엇은 시무룩해지려다가 클레어의 저쪽 편에서 에리히가 시트를 뒤집어쓴 채 고통스럽게 끙끙거리는 걸 발견했다.

“아빠도 아파?”

“괜찮아.”

“진짜? 아빠 아픈 거 같은데.”

엘리엇을 뒤따라온 윌리엄이 ‘오’ 하는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클레어는 그야말로 끓는 솥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윌리엄이 엘리엇의 어깨를 잡아 보듬었다.

“자아, 엘리엇. 동생을 갖고 싶다면, 엄마와 아빠를 방해하면 안 돼요.”

“동생?”

엘리엇의 눈이 반짝 빛났다. 클레어의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문은 잠가라, 웬만하면.”

윌리엄이 그렇게 말하고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클레어는 아직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에리히의 어깨를 때렸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건 에리히가 아니라 편지를 가져다준 집사였고,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튼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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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비스마르항에서 출발하는 고급 여객선 한 대가 대여되었다. 사람들은 공작 부부가 거기 승선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보좌관을 비롯하여 공작가의 다른 일행들이 탔다.

클레어와 에리히는 막시밀리안을 비롯하여 호위 네 사람만 동반한 채 윌리엄의 배에 올랐다.

“우, 와!”

배에 올라타면서부터 이미 엘리엇은 입이 벌어져 있었다.

윌리엄의 배는 순수한 증기선이 아니라 기범선이었다. 엘리엇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돛대도, 망루도 있었다.

고개가 부러져라 올려다보자 망루가 조그맣게 보였다. 거기에서부터 늘어뜨려진 밧줄 사다리를 보고 엘리엇이 환호했다.

지난 며칠 동안 엘리엇에게서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친애의 표시를 받아 온 윌 아저씨가 새삼스럽게 우아한 자세로 절하며 말했다.

“스컬 파이러츠호에 승선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드 엘리엇.”

“환영합니다! 로드 엘리엇!”

뒤이어 선원들이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물론 이 배의 이름은 스컬 파이러츠 같은 것이 아니다. 화물선 나름대로 규율과 체계를 갖추고는 있지만, 선원들이 이런 군례 같은 것을 올릴 리는 없다.

진짜 해적이라면 더더욱 그럴 리 없다.

하지만 건장한 남자들이 모여서 우렁차게 내지르는 소리에 엘리엇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온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흥분했다.

“클라우제너의 엘리엇입니다!”

엘리엇이 경례를 똑같이 흉내 내려고 애쓰며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커다란 두 눈동자에서 푸른 별똥별이 튀어 나갔다.

처음에는 선주가 아무리 손님을 위해서라지만 자신들을 광대 취급하는 거냐고 욕했던 선원들의 얼굴에서 잔물결 같은 웃음이 피었다.

선장이 미소를 지었다.

“똘똘한 소년이군그래. 훌륭한 견습 해적이 될 수 있겠어.”

“진짜로요?!”

엘리엇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기뻐했다.

선장은 갈고리 손은 아니었으나 외다리였고, 근사한 구레나룻과 콧수염을 갖고 있었다.

“흐흐, 쓸 만한 신참이 들어왔군.”

“키는 돌려 본 적 있나?”

일등 항해사가 다가와 엘리엇의 어깨를 친근하게 감싸며 물었다. 엘리엇은 바짝 긴장해서 대답했다.

“아, 아니요!”

“그럼 그것부터 배우러 갈까?”

“넷!”

엘리엇이 바짝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로 선원이 되겠다고 말할 기세였다.

윌리엄이 미리 선장과 항해사에게 부탁해 두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 광경을 에리히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촌극이군.”

“참여형 아동극이죠.”

그의 중얼거림에 클레어가 반박했다.

“무엇이든.”

“재미있어하니 됐잖아요.”

막시밀리안이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엘리엇의 뒤를 따라갔다.

배는 증기의 힘을 빌려 항구 밖으로 나서더니 이내 돛을 활짝 폈다.

갈고리 손을 가진 가면의 남자가 갑판 위로 올라온 것은 배가 항구를 출발하고 1시간 이상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본디 이 배의 선원이 아니다. 윌리엄의 배 중에서도 가장 멀리까지 나가는 포경선의 이등 항해사였다.

그가 뭍에 오르는 날을 연중 전부 합쳐도 아마 일주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윌리엄은 그를 위해 원해의 무인도에 포경선이 기항할 수 있는 작은 부두와 술집, 여관을 만들었다.

겉으로는 인근의 어장이 훌륭하니 근거지를 만들어 제대로 확보하고, 잡아들이는 물고기의 보존 처리를 빨리하는 게 돈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게 진짜 목적이 아니었다. 보급을 위해 항구에서 기항하는 날에도 배에서 가능한 한 내리지 않는 그를 위해서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뭍에 올라 선원들이 자주 가는 술집에 좀 들른다고 해서, 누가 그를 알아볼 리는 없었다.

얼굴의 절반에 심한 흉터가 있다. 본래는 칼로 그어진 흉이었으나, 그물에 걸렸을 때 밧줄의 마찰로 생긴 흉이 그 위를 덮었다.

5년이나 험한 생활을 해 온 얼굴은 완전히 거칠어졌고, 거듭된 부상 탓에 허리와 무릎도 굽었다. 품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에서 내릴 수 없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를 알아본다면.

그의 입을 여는 데 성공한다면.

그러면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분을 위험하게 할지도 모르니까.

[엘리사는 5년 전에 죽었다는군.]

5년 전이라니.

무엇 때문에 얼굴을 그어 가면을 쓸 핑계를 만들고, 그러고도 불안해서 그 위에 또다시 상처를 만들었던가.

무엇 때문에 복수를 위해 칼을 쥐고 황궁으로 달려가는 대신 손을 버리고, 바다로 나가 뭍에 발을 대지 않았던가.

모든 게 그의 주군이 지키라고 명령한 고귀한 숙녀를 위해서였다. 그와 윌리엄만 입을 다물면, 그 누구도 비밀을 알지 못할 테니까.

그보다 더 그녀를 안전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죽었다니.

그는 반은 망연하고 반은 환희에 찬 채, 소리 지르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우와아아아! 엄마, 저거 봐요! 엄마!”

돛대 꼭대기에 달린 작은 해골기를 목이 부러져라 올려다보며 엘리엇이 환호성을 올렸다.

물론 그 깃발은 윌리엄의 장난이었다.

키를 돌려 보았을 때는 해적 선장이었던 장래 희망이 금세 해적 감시꾼으로 변했다.

엘리엇은 클레어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졸라 댔다.

“엄마, 나 쩌어기 올라가 보면 안 돼? 응?”

“안 돼. 저 밧줄 사다리를 네가 어떻게 타고 올라가?”

“이잉, 엄마아아!”

엘리엇이 떼쓰는 소리를 냈다.

금으로 조각한 태양 같은 금발에 유독 새파랗게 보이는 날의 하늘 같은 눈동자를 지닌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러나 가장 햇살 같은 것은 그 웃는 얼굴이었다.

꼭 부모를 반반 닮은 얼굴이다. 남자는 멍한 채 그렇게 생각했다.

고운 눈매는 어머니를, 웃는 입매는 아버지를 닮았다. 까르르 웃는 목소리를 들으면 아이가 얼마나 구김 없이 컸는지 알 수 있다.

버려 버린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아빠아아! 나 저기! 저기이이!”

엘리엇은 클레어에게 허락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이번에는 에리히에게로 달려갔다. 엄마는 아빠가 같이해 준다고 하면 허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리히는 매달리는 엘리엇을 보듬기는 했으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가면 쓴 남자는 흠칫 놀랐다. 에리히는 엘리엇을 가볍게 붙든 채 그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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