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남자는 굳어 버렸다. 설마 자신을 알아보고 부른 것일까?
반가운 사람의 몸짓은 그 무엇도 그리웠으나, 그보다는 두려움이 더욱 컸다.
손짓하여 불러 놓고도 에리히는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신 그가 명령한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챈 윌리엄이 자연스럽게 나섰다.
“선실 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작은 선실이지만, 창문이 있으니 그리 답답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지. 고맙군.”
에리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도 살짝 끄덕여 상황을 알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그가 제게 매달려 있는 엘리엇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윌리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랑어 낚싯대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낚싯대?!”
엘리엇이 해골기와 망루를 잊고 소리쳤다. 에리히는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은 사람 세 명을 합친 것만큼이나 큰 참다랑어의 제왕을 사투 끝에 끌어 올린 이야기를 에리히에게 여섯 번이나 했다.
빈도를 생각하면, 윌리엄이 해 준 이야기 중에 세 손가락에 꼽히게 좋아하는 이야기일 터였다.
윌리엄이 빙긋 웃었다.
사실 이 배는 화물선이지 어선이 아니라서, 엘리엇에게 말해 준 그 낚싯대는 없다.
그래도 대형 선박에 커다란 낚싯대 하나 없겠는가. 어린 소년의 혼을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확실히 빼놓을 수 있었다.
“어이, 도련님에게 낚싯대를 구경시켜 줘. 엘리엇, 볼 거지?”
“우와아, 볼래요! 만져 봐도 돼요?”
다녀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엘리엇이 순식간에 에리히를 놓고 선원에게 달려갔다.
막시밀리안이 웃는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윌리엄이 앞장서서 선창으로 내려갔다. 클레어는 엘리엇과 막시밀리안을 쳐다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윌리엄의 뒤를 따랐다.
좁고 낡은 선실이었다. 구멍 난 곳을 수리하고, 새 궤짝을 못질해 고정시켰으나 사실 귀족이 숙박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선배님이 쓰시기에는 영 그렇겠지만, 그래도 이 선실이 제일 큰 겁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하긴, 신혼이라 침대가 작다고 불평하실 것 같지 않긴 합니다.”
“…….”
에리히는 침묵했다. 클레어의 손이 공연히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으나 미동도 없었다.
클레어가 화기 오르는 뺨에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잠깐인데 뭐. 엘리엇을 여러모로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선장이 워낙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괜찮아. 공작가 도련님이 동경의 눈으로 쳐다봐 주니까 다들 좋은가 보던데.”
윌리엄이 웃으며 말했다.
달칵.
그때 문이 열렸다.
일부러 시간 차를 두고 뒤따라온 남자가 들어온 것이다. 윌리엄이 조용히 움직여 문을 닫고 그 앞에 섰다.
남자가 멍하게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한쪽만 초점이 살아 있는 갈색 눈동자에 파랑이 일었다.
격동이 지나쳐도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새액새액 힘겹게 숨을 내쉬는 그를 내려다보며 에리히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그 남자에게 건네는 말이라기보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지난 반년 동안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네.”
에리히는 흘끗 자신의 곁에 선 클레어를 바라보고, 윌리엄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힘을 가진 만큼 책임을 지고, 이끌고, 다스리고, 보호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 의무를 팽개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지. 나를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았으니.”
“……각하.”
“이 말을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네. 나를 찾아올 생각을 한 적은 없었나, 프란츠 알트마이어?”
남자가 흐린 얼굴을 하고는, 천천히 가면을 벗어 흉터를 드러냈다. 클레어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긁힌 듯한 쉰 목소리로 남자가 물었다. 에리히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공백 상태에서는 알아보지 못했을 걸세. 하지만 윌리엄이 아이를 확인하러 왔었지 않나.”
클레어조차 엘리엇의 친부를 알지 못했다. 5년 동안 아무도 델포드를 추적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러드 황태자의 연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라는 뜻이다.
“그 제한적 범위에서, 남몰래 우리를 만나야만 하고, 또 그날의 진실과 연관된 사람 중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었어.”
에리히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자네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신분 차가 컸기에 에리히는 그를 친구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실제로도 청소년기부터는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프란츠 알트마이어는 그의 배동으로서, 유년 시절 예법을 함께 배운 사이였다.
상처로 일그러진 프란츠의 눈매에 눈물이 고였다.
“황손께서 계신 줄 알았다면, 각하를 찾아뵈었을 겁니다. 몰랐습니다.”
“그랬나.”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쪽이 엘리사 님이 무사하실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에리히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면, 틀림없이 큰 분쟁으로 번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엘리사가 노출되었으리라.
에리히가 과연 엘리사가 가만히 숨어 있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물론 이제는 그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엘리엇을 제 아이라는 말로 숨겨서 보호하고 있다. 아이를 지키는 일을 혈통을 올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로 여긴 셈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엘리사를 내세워 설령 승리하더라도 희망이 없었다.
당시에는 리누스에게 맞서 내세울 황족이 없었다.
싸움 끝에 결국 황제가 되는 것이 리누스라면, 그 승리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황권을 꺾어 차기 황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 수는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후에 오는 것이 퇴보든 진보든, 프란츠에게는 똑같았다. 그 승리는 정치적인 것이다. 제러드 황태자를 위한 완전한 복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 일이 엘리사를 불행하게 할 따름이라면, 죽은 황태자가 바라던 대로 그녀를 숨겨서 안전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윌리엄이 희미하게 쓴 미소를 지었다.
“선배님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엘리사 님을 안전하게 본인의 삶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것이 전하의 마지막 부탁이셨습니다.”
프란츠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엘리사 님의 신원을 알고 있었던 것은 측근 호위와 시종, 극소수뿐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무사히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러면 정말로 아무도 모를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 그리고 살아남은 것은 자네뿐이고.”
“누군가는 엘리사 님이 탄 마차를 몰아야 했으니까요.”
“그날 죽은 시종 중에 자살이 있었네. 그 때문에 사건 수사에 혼선이 상당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예. 기꺼이 목숨을 던졌을 겁니다.”
프란츠가 목쉰 소리로 대답하고는 치받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에리히가 시선을 돌려 클레어를 바라보고,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클레어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가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한 슬픔이 신물이 되어 올라왔다.
그녀는 어둡게 물든 눈동자로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충혈된 눈은 약동하는 햇살처럼 빛나는 호박색이 아니라 물크러진 노른자처럼 보였다.
윌리엄은 그 시선을 피한 채 프란츠 대신 이야기를 이었다.
“알트마이어 경은 저를 찾아왔습니다. 곧바로 델포드 가문의 타운하우스로 가는 게 위험했으니까요.”
“그런가.”
“제가 알트마이어 경을 숨기고, 엘리사를 빼돌려서 마차에 태워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 다음, 알트마이어 경이 얼굴을 망쳤습니다.”
윌리엄은 그날까지 평범한 자작가의 오남으로서 하잘것없이 살아왔다.
자신의 인생은 제게는 큰 갈등으로 굴곡져 있었으나,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놀랍고 큰일은 에리히를 선배라고 부르게 된 일일 거라고 줄곧 생각해 왔다.
설마 그런 일에 휘말리게 될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프란츠와 엘리사를 구하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연고자가 없는 자들의 죽음이 쌓인 곳에서 프란츠와 비슷한 체격의 시신을 구했다.
손은 프란츠 스스로 잘라 냈다.
왜냐하면 그의 오른손에는 눈에 띄는 흉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신이 진짜 프란츠 알트마이어라고 속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손이 필요했다.
그 일을 하는 데 사흘의 시간이 걸렸다. 얼굴이 뭉개진 이유가 불분명해질 때까지 시신이 부패하기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윌리엄은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버지와 협상하여 어머니의 지참금 중 자신의 상속분을 먼저 받아 집을 나왔다.
그리고 프란츠와 함께 배에 올랐다. 모두가 잊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면서.
클레어가 발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서성이듯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에리히의 손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녀의 어깨를 꽉 쥐어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셔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프란츠가 이제 거의 공기를 떨리게 하는 게 전부일 정도로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언약서가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반대하셨을 때, 황태자 전하께서 농반진반으로 쓰셨던 것입니다만…….”
“설마…….”
“제가 교회에 제출했습니다. 혹 엘리사 님이 노출되었을 때, 합법적인 황실의 일원으로서 호위대를 꾸릴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언약의 말은 쓰인 당시에는 연인 간의 밀어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 프리드리히 대제 때 쓰였던 고전적인 자구와 양식을 가져다 쓴, 연서에 가까운 내용이었으니까.
그러나 교회에 제출된 이상 그것은 유효한 결혼 서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