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199/263)

200화

옌스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클레어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손대지 않고 황후에게 의심을 심어 주어 웨슬리 가문에게 보복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그의 눈동자 속에서 생각이 이리저리 구르는 것을 본 클레어가 차분하고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을 텐데요? 내가 지금 웨슬리가에게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렇지 않을 텐데.”

“델포드 남작님…….”

“어차피 의심을 받는 것은 기정사실이에요. 웨슬리 경 본인이 아니라 장남이 왔다고 해서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황후 폐하께서는 현명한 분입니다. 그런 의심을 심어 주기 위해서 남작님께서 아버지를 부르셨다는 것도, 그걸 염려해서 제가 왔다는 것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건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이다. 옌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허세를 부리는군요. 독선적인 사람이 의심을 거두는 일은 없어요. 이렇게 아버지 대신 뒤집어쓸 작정으로 찾아온 옌스 씨라면 그걸 알고 있을 텐데요.”

“송구스럽습니다만, 남작님. 저는 남작님께서 황후 폐하에게 승리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고, 남작님께서 저희 가문을 단숨에 손안에 쥐어 짜부라뜨리실 수 있는 것도 맞지만, 패배할 사람에게 운명을 거는 것은 장사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승리자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해도 보상으로 칼이 돌아온다면, 그게 어떻게 잘한 장사라고 할 수 있겠어요?”

클레어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이해하겠죠.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해해 줄 테고요. 웨슬리 경은 탁월한 관리 능력을 가진 분이니, 대체하기 어려운 인재죠. 하지만 그게 몇 년이나 갈까요?”

황후는 틀림없이 예리한 이성과 빼어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때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이끌 만한 카리스마가 있었을 것이며,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고 남의 충고를 듣는 귀 또한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야망을 품고 기어 올라가는 동안에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예리하게 갈고닦았을 터이나, 높은 곳에 올라서고 나면 밑에 선 자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착각에 빠지게 되는 법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으니 더더욱.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숭배를 받았든, 끌려 나와 목이 잘렸든, 마지막까지 현명함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없다.

“황후는 결국 언젠가 오늘의 일을 떠올리고, 그것을 핑계로 웨슬리가를 칠 거예요. 이유는 다양하게 있을 수 있겠죠.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했다거나, 혹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다거나. 아버지를 대신해서 여기까지 온 옌스 씨라면 이미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텐데요.”

옌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클레어가 추궁하듯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옌스 씨? 황후는 과연 클라우제너까지 모조리 잡아먹은 뒤에도 명징한 이성과 웨슬리가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있을까요?”

“…….”

옌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버지 웨슬리 경은 황후의 판단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옌스는 벌써 예전부터 아버지가 말하는 황후와 자신이 직접 경험하여 알고 있는 황후의 모습이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는 전부터도 황후를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클레어에게 설득되고 싶었으나, 동시에 그 때문에 감히 당신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굳이 선택의 고통을 줄여 주기까지 했는데. 웨슬리 경이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요.”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고, 미리 사이드 테이블에 놔두었던 작은 나무 상자를 옌스에게 건네주었다.

옌스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어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거기에는 마른 양귀비꽃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람스베르크 의원의 사무실을 방문하면서 웨슬리 경이 이것을 두고 간 것으로 알아요.”

“아버지가…….”

옌스는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디트마어 람스베르크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이용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미끼로서의 역할이라면,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

양귀비꽃을 넘긴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아버지는 그때 양쪽 모두에 발을 걸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지. 황제가 시해되고, 클라우제너 공작이 죽었으니까.’

그때 웨슬리 경은 클라우제너 공작에게 의탁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공작이 황후와 직접 맞서 싸울 작정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황제가 죽었다. 리누스 황자가 즉위할 것이며, 황후는 곧 완전한 황권을 손에 넣게 된다. 빅토리아 대공이나 맨프레드 대공이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실질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다. 황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땅에 묻어 버릴 것이다.

클라우제너에 공작 부인이 남아 있어, 이제 와 황후와 싸우려 한다 해도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배 속 아기의 황위 계승권을 주장한다?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즉위식이 끝날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계승법이 아렌인 배우자 소생의 후계자를 우선순위로 밀어 올린다 해도, 갓 태어난 방계 황족과 장성한 황자를 천칭에 올리면 결과는 명백했다.

그러나 웨슬리 가문의 사정도 달라졌다. 아버지가 양쪽 모두에 발을 걸쳐 두려 했다는 것을 황후가 알게 되면, 오늘처럼 편지로 불려 온 것 정도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문제가 될 것이다.

클레어가 상자를 내밀었다.

“뒤에 숨어 있던 두려운 주인이 사라져 버리면, 재산은 결국 명의자 거예요. 잘 고민해 보세요.”

옌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사우스랜드 곡물상을 진짜로 차지하느냐, 황후에게 숙청되느냐. 둘 중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이건 선택지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저희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양귀비 재배지의 위치부터 이야기해 보죠.”

클레어가 냉한 목소리로 말했다.

48. 연극

“부디……, 우리 아이를 부탁해!”

아리아가 끝났다. 가슴에 꽂힌 칼을 움켜쥔 채 독창을 끝낸 남주인공이 마침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무대가 어두워졌다.

환호와 박수에 섞여 분개한 소리가 객석 여기저기서 솟았다. 베일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맨 뒤의 객석에 앉아 있던 리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무대 장치는 아예 없었고 의상도 엉망이었으나, 벌써 수십 번은 합을 맞춘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아, 리나.”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연출자가 그녀를 보고 얼른 일어섰다.

“어땠어?”

“잘하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에만 노래가 있네요?”

“그게 워낙 인기니까.”

연출자가 대답했다. 리나가 ‘하긴.’이라고 중얼거렸다.

클레어가 준 극본은 생각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이야기 자체가 고전적이라서 딱히 걸러 낼 부분이 없는 데다가, 마음껏 욕할 악역과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아예 마음대로 하라고 각본가 이름도 붙여 놓지 않았으니, 천막 극단에서 각자 자기들 방식대로 고쳐서 공연하기 딱 좋았다.

어쩌면, 계엄령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흥행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극의 배경은 동화에 가까웠으나 숲에서 칼을 맞고 죽은 왕자가 누구인지, 그 명령을 내린 악독한 왕비가 누구인지 암시하는 바가 분명했다. 이 연극이 시작된 것은 의회에서 아편과 노예계 문제가 제기되었던 시점이었으니, 황후에 대한 적대감이 분출될 출구를 찾은 거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연극쯤은 웃어넘겼을 겁니다. 황후 폐하에게서 여유가 사라졌군요.]

디트마어는 리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계엄령과 동시에 모든 종류의 공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 연극의 중단 명령은 단순한 집합 금지령에 포함된 것이 아니다.

계엄군은 각본가를 찾고 있으며, 예전에 이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는 이유로 극단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까지 있었다. 왕비가 벼락을 맞아 산산조각 나는 결말을 낸 극단이었다.

체포된 이유는 다른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이 연극이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오히려 인기에 불이 붙었다. 그때까지 그저 진실한 사랑을 방해하는 악독한 계모의 이야기였던 통속극에 의미가 덧붙고 가치가 생겨났다.

예술 애호가가 관심을 가지고, 이런 극본은 길거리에서나 공연할 수준이라며 깔보던 예술 극단과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오페라 하우스의 관계자들까지 관심을 가졌다.

대본이 수정되고 곡이 붙었다. 그다음 악극 대본과 악보가 유출되면서 지하 극장에서 일부가 노래되기 시작했다.

음악은 언제나 호소력이 있는 법이다. 연극에서는 한순간에 끝나 버리는 죽음의 장면이 가극처럼 길어지면서, 비탄과 희망을 함께 고조시켰다.

모든 방향으로 모든 것을 유출한 장본인인 리나가 방긋 웃었다.

“요새는 시위대에서도 저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렇지. 얼마 전에도 하츠펠트 후작가에서 구빈원에서 애들을 백 명 가까이 데려갔다는 게 밝혀졌잖아.”

연출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부터 고아들을 그렇게 신경 썼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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