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급하게 사람이 필요한 거겠죠. 파업 때문에 공장이고 뭐고 거의 다 멈췄잖아요. 그나마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으니 다행인 거라고 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쪽에는 아예 식량 배급이 중지됐다면서요.”
“쯧. 언제부터 그랬다고, 사람들이 다들 구빈원 아이들 걱정을 해. 노래 때문에 감정 이입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아, 네 이야기는 아니야. 넌 항상 착했으니까.”
“마지막 곡이 참 귀에 잘 박히기는 해요.”
리나는 제 칭찬을 밀어 두고 평범하게 대답했다.
지금도 누군가가 건물 밖에서 이 마지막 곡인 ‘우리 아이를 부탁해’를 부르고 있었다. 그건 결국 내 아이와 내 미래를 지켜 내겠다는 노래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작곡자인 웨슨 씨 말이, 애초부터 일부러 가수 아닌 사람도 부를 만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별일이네. 구름 위에 사는 것처럼 굴던 예술가 양반이.”
“웨슨 씨가 원래 황태자 전하를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돌아가신 선황후 폐하도요.”
“아, 그런 사람들 많지. 꼭 아렌 사람이 아니더라도. 선황후 폐하는 아주 선량하고 좋은 분이셨거든. 무슨 일이 생기면 황후궁에서 자선을 베풀지 않은 적이 없었어. 그 전에는 아렌 왕궁에서 했었고.”
연출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제는 오래된 일이라, 나이 든 아렌인 말고는 그렇게 애틋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애정은 황태자에게 쉽게 이어졌다. 황태자는 외모는 선대 황제인 조부를 닮았으나 성품은 똑 그 모친을 닮은 듯 자상하여, 구빈원에 나와서 몸소 더러운 아이들을 씻기고 놀아 주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황태자의 최초의 정치적 행보 역시,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빈민가의 집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죽었을 때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황제에 대해서는 호불호도, 평가도 거의 없었다.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황제가 의회와 내각에 권한을 넘긴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지금까지 황제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이제 황후에게 분노하면서, 그가 제 역할을 다했다면 황후가 이렇게 횡포를 저지를 수 있었겠느냐고 욕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 죽은 황태자를 동정했다. 마치 제 자식이 죽기라도 한 듯이 슬퍼하는 자도 많았다.
연출자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미남이었거든. 사람들이 미남 얼마나 좋아하냐. 어릴 때도 진짜 예뻐서 초상화가 장식용으로 팔리기도 하고…….”
연출자가 말하다 말고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입을 손으로 가렸다.
리나는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아챘다. 똑똑한 사람이니, 이 연극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황색 언론에서 뿌린 그 수많은 쓰레기 같은 기사들이 덮어 숨긴 진실도.
하지만 일부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연출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무튼. 외출은 자제해. 조짐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요?”
“조만간 감옥을 부수러 간다는 이야기가 있어. 하비흐 의원이 끌려갔잖아. 지금까지 잡혀간 사람도 상당히 많고.”
연출자가 소곤거렸다.
“우선 무기고를 털 거래.”
“그게 가능해요?”
“총 가진 사람이 많으니까. 국상을 노릴지, 감옥부터 부술지로 싸우더라고.”
연출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이런 데 오지 마. 위험하잖아.”
“괜찮아요. 전 백작 영애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는 제가 훨씬 안전해요. 제가 죽으면 난리가 커질 텐데, 그걸 원하는 사람도 없을 거고요.”
“네가 엄청나게 성공하고 출세해 버려서 아무래도 현실감이 없긴 하네. 네가 웨슨 씨 같은 엄청난 작곡가와 아는 사이가 됐다는 것도 그렇고.”
“그러게요. 저도 가끔 현실감이 없어요.”
리나가 살포시 웃었다.
“그나저나 세상이 이렇게 되어서 어쩌냐. 네가 모처럼 모델로 대성공을 하려던 참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계약 기간 기니까 상관없어요. 설마 5년 10년 계속 이런 상태가 이어지진 않을 거잖아요?”
연출자는 약간 불안한 얼굴로 리나를 쳐다보았다.
“너무 염려 마세요.”
앙코르가 끝났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리나는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몸조심하세요.”
“너야말로.”
아마 관객들은 이대로 거리로 뛰어나가 시위대에 합류할 것이다.
리나는 그 전에 지하 공연장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1층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가 그녀를 휙 낚아채어 벽 속으로 끌어들였다.
“헉!”
비명을 지르기 전에 입이 틀어막혔다. 리나는 주머니 속에 숨기고 있던 권총을 움켜쥐었다.
“소리 지르지 마.”
하지만 아는 목소리였다. 리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스테판!”
초콜릿색 머리의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관은 높은 단상 위에 놓여 있었다.
상복을 입은 황후는 단상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 관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답답하군.’
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진짜 황제가 아니다. 홀쭉하고 마른 금발 머리 남자의 몸은 똑 황제처럼 보이긴 했으나 얼굴형이 달랐고, 몇 가지 신체적 특징도 없었다.
비록 그녀가 황제와 진짜로 결혼 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얼굴을 아예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연령이 비슷하며 지배 가문 출신의 공녀였으니, 사실은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내가 진짜 속을 줄 알았단 말인가. 어리석은 것.’
그녀는 속으로 냉소했다. 아니, 냉소당할 대상 중에는 그녀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시신을 황제의 것이라고 위장한 것이 자신의 수하인지, 근위대장 로건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전자든 후자든 치명적이었으므로, 이 시신을 황제의 것이라고 가져온 자를 이미 처형했으나, 그렇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근위대를 습격한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었어.’
지금은 그때 일을 되새기며 후회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봐도, 조용히 사그라지느냐, 기회를 잡기 위해 도박을 하느냐 중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자신은 후자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와 로건만이 아니라 에리히도 살아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붕괴된 건물의 구조 작업을 3주나 지연시켰다. 아무리 강건한 남자라도 살아남을 수 없도록. 이제 겨우 잔해를 헤쳐 내기 시작했고, 나오는 것은 모두 시체뿐이다.
하지만 황제가 빠져나가 지금까지 소식도 없이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 과연 로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럴 리가 없다. 살아서 달아난 것부터 계속 침묵하고 있는 것까지, 황제가 할 만한 일도, 로건이 할 만한 일도 아니다. 에리히가 개입했을 것이다.
‘아렌 공왕이 곧바로 남부로 간 것도 아마…….’
남부 아렌은 지금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사우스랜드에 있었던 대규모 양귀비 재배지가 발각되면서, 그때까지 파업과 집회에 집중하던 공인 길드가 사보타주를 시작했고, 반군이 조직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진압 명령을 받은 남방군은 엉덩이를 뭉개고 앉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국상 중에 군사 행동은 부적절하다든가, 남방군 사령관이 조문을 위해 수도에 올라올 작정이라는 말을 하더니, 이제는 출진 준비를 할 거라면서 뭉개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수송 열차의 석탄고가 텅 빈 것도 고의일 것이다. 어쩌면 반군 쪽에 탄약을 유출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아렌 공왕의 지시라는 것을 황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원 의원들이 연명하여 양귀비 재배지에 대해 조사하라는 청을 올렸다. 황후는 토지 소유주를 조사하되 밭을 모두 태워 버리라고 명했으나, 그러자 이번에는 전부 태워서 증거를 없애려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우스랜드 곡물상은 개답게도 먹이를 주는 자에게 꼬리를 치러 갔다. 웨슬리는 제멋대로 수도의 창고를 열어, 자선이라는 이름으로 전부 베풀어 버렸다. 이는 곧, 황후가 준비했던 군량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수도는 다소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차라리 무장봉기가 일어나 쓸어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던 황후로서는 불편해졌다.
한때 신뢰하던 자가 이런 식으로 배신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결국 장사치가 하는 짓거리란 그런 법이다.
그녀에게 지금 남은 수단은 황제가 돌아오기 전에 먼저 북방군을 장악하는 것뿐이었다.
황후는 이마를 짚었다. 국상 절차를 끝내야 즉위식을 치를 수 있다. 하지만 한 달의 조문 기간은 지켜야 한다. 그나마도 최소한이었다. 전례대로라면 각지의 영지에서 영주들이 올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 석 달은 걸렸을 테니까.
‘리누스가 황태자였으면, 긴급 사태라는 이유로 무시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보았지만, 답이 없는 이야기다. 역시 끝까지 방해밖에 되지 않는 작자다.
그녀는 좀처럼 생각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마음속이 복잡한 탓이다.
도박은 이어지고 있으며, 테이블 위에 던진 카드보다 손에 들어오는 카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황후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물었다.
“리누스는?”
“외출하셨습니다.”
“어디로?”
보좌관이 민망한 얼굴로 고개만 숙였다. 그걸로 답을 유추하고 황후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보나 마나 클라우제너 공작저에 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