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황후가 리누스가 시킨 일에 대해서 들은 것은 이 시점의 일이다. 야코프 장군이 출발하기 전에 서둘러서 황후에게 소식을 보냈기 때문이다.
황자의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황자가 아니라 황후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미래의 황제가 될 사람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황후와 황자가 썩 좋은 사이도 아니니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야코프는 이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클라우제너 공작가를 공격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그는 리누스보다 훨씬 다각도에서 곤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리누스라고 해서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감정적이었으며, 솔직히 성공을 바라는 마음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쯧.”
황후는 초조함을 가볍게 혀 차는 정도로 간신히 가렸다. 하원 의원에 이어 리누스까지.
“차라리 잘됐어.”
“예?”
동석하고 있던 하츠펠트 후작이 놀라서 되물었다. 황후는 냉혹한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클레어 델포드를 잡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황후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 클레어를 암살하여 처리했을 것이다.
막시밀리안의 보호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제법 자주 공적인 장소에 나타나곤 했었다.
연단 위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드러나는 방식으로 노골적으로 암살하면 아렌인과 클라우제너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싸움이 터질 것을 우려해서 참았다.
그러나 어차피 일은 터졌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클레어를 일찌감치 치웠다면…….
‘그래도 결국 에리히와 싸우는 건 피할 수 없었을까?’
적어도 로멜 귀족의 지지만은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발이 아주 심할 겁니다. 공작 부인은 임신 중입니다.”
에른스트 소공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하츠펠트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반발하는 자는 어차피 클라우제너를 지지하는 자들일 겁니다.”
“하지만…….”
“하원 의원이 거리에 나온 시점에서 이미 온건하게 마무리할 방법은 없어졌습니다. 불순분자들은 어차피 저기에 있겠지요.”
하츠펠트 후작이 창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로버 탑의 화재는 꺼질 기미가 없어서, 황후궁의 창밖으로는 하늘을 메운 화광이 보였다.
“오늘은 횃불이 필요 없겠어.”
황후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별 뜻 없는 말이었는데, 좌중이 송구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병력이 모자라. 북방군 소식은 들었나?”
“근처까지 내려와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에리히가 거기 있어.”
“예?”
에른스트 소공작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는 에른스트의 대표로서 이 자리에 불려 오기는 했지만, 기밀 정보를 실시간으로 보고받을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후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더군. 클라우제너의 행정관이 대거 북방군의 본영으로 이동했어. 의용군이 북방군에 합류하고 있더군.”
저쪽의 병력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반면 이쪽에서는 아직도 친위사단에만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다.
북방군 자체는 친위사단보다 강하다고 할 수 없지만, 병력 수가 크게 차이 나면 곤란해진다.
올덴부르크 후작이 말했다.
“염려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의용군 따위는 발목을 잡을 뿐이니까요. 고작해야 군량을 낭비하기나 하겠지요.”
“글쎄.”
황후는 부정적인 태도로 중얼거렸다.
저쪽에는 에리히가 있다. 클라우제너의 재력만이 아니라 에리히 개인의 행정 능력도 우습게 볼 수 없다.
황후는 그가 방계 황족으로서 의무 병역을 치르던 시기에 소속 사단을 모조리 뒤집어엎어 재편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에리히의 생존이 밝혀지면서 행정관들이 태업을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에리히의 황위 계승 순위는 4위, 결코 낮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는 리누스보다 에리히가 황제의 관을 머리에 썼으면 좋겠다고 내심으로 생각하는 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행정관의 대다수가 중류 계급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클라우제너 공작가는 선대 때부터 인기가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혈통이 문제였다.
‘내가 남자였다면.’
이렇게 아들의 권리를 빌릴 필요가 없었을 텐데.
에른스트 소공작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클라우제너 공작이 살아 있다고 해서, 임부를 사로잡는 것에 반발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에리히를 잡는 게 우선이야.”
도박 같은 수이긴 했다. 그러나 반대로, 공작 부부만 잡으면 전부 해결되리라고 황후는 확신했다.
무력한 황제와 늙은 아렌 공왕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그들의 권한이 살아 있다고 할지라도, 제국 전체를 아울러 통솔하여 자신과 맞설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철로를 따라 탄약을 깔고, 별동대도 매복시켜.”
“북방군이 열차로 오지는 않을 겁니다. 동력이 넉넉한데도 바우어부르크에서 멈춘 것에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전 차라리 철로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우제너 공작이 올 겁니다. 공작 부인이 공격당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할 테니까요.”
황후 대신 아우구스타가 설명했다. 좌중은 대부분 미심쩍은 반응이었다. 공작이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바우어부르크의 북방군이 진군하면, 제1 친위사단이 막도록 하지. 장군들과 의논해 보겠네.”
“알겠습니다.”
“하츠펠트 후작, 그리고 이제 모병은 포기하고 징집하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해야 했다.
고위 귀족의 권위와 막대한 재력으로도 원하는 만큼의 병력을 모아들일 수 없다는 건 모두 그들에게는 예측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수도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총알받이로 쓸 놈들이야. 불순분자부터 끌어내.”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츠펠트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52. 문이 열리다
야코프가 제3 친위사단을 이끌고 당도했을 때 공작저의 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이걸 몰랐나?”
야코프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먼저 보낸 정찰병이 죄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7분 전에 경비대가 전원 철수했습니다.”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모두 각자 흩어져 거리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몇 명에게 꼬리를 붙였습니다.”
아마도 수확은 없을 것이다. 경비대까지 철수할 정도라면, 주요 인사는 모두 벌써 몸을 숨겼을 게 분명했다.
부관이 당황을 숨긴 채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각하?”
“일단 확인은 해야지.”
매복이 있으면 있었지, 그들이 찾는 사람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야코프 입장에서는 성의를 보여야 했다.
“사람을 풀어. 공작 부인은 회임 중인 몸이다.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어.”
“예.”
부관이 명령을 받아 정찰대를 몇 개 더 분산하여 데리고 움직였다.
“넌 레이디 아우구스타에게 가서 클라우제너의 안가 목록을 받아 오도록 해.”
위치를 전부 다 확보하고 있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일부라도 찾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한번 건드린 이상에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그는 리누스가 진짜로 이 일을 책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움
직였으니, 황후조차 납득할 만한 결과물을 가져가야 한다.
그는 손수 부하를 거느리고 공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상아궁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귀중한 건물이다. 함부로 손상시킬 수는 없었다.
전령은 오래 걸리지 않아 아우구스타의 전갈과 함께 두툼한 목록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클라우제너가 합법적으로 소유한 부동산과 클라우제너 가신 소유의 부동산 목록이었다.
평소 같으면 좀 더 여과된 정보를 보내 주었겠지만, 오늘은 아우구스타에게도 그 정도 여유는 없는 모양이다.
“공작 부인을 모시고 있는 건 막시밀리안 경이야. 군인처럼 생각하는 게 옳겠지.”
그는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가 지도를 찾아 펼쳤다. 부하들은 집무실의 서류를 뒤졌으나, 쓸 만한 것은 치워 둔 지 오래인 것 같았다.
밖에서 소란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야코프는 신경질을 느끼며 밖으로 나섰다.
“황자 전하.”
그는 얼굴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리누스가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친위사단의 병사들은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황자를 직접 알현할 일은 흔치 않았으니까.
리누스가 발을 멈췄다. 야코프는 그를 달래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황송합니다만, 전하. 아무래도 공작 부인은…….”
“아니.”
리누스가 미지근하게 식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가 복도에 걸린 그림을 돌아보았다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전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괴로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