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야코프는 리누스의 곁으로 다가가 그가 보고 있는 그림을 함께 보았다.
그것은 에리히의 친모가 살아 있던 시절, 어린 그를 안고 그린 그림이었다. 죽은 헨리에타 황후와 제러드 황태자의 모습도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아이가 쏙 닮은 것을 남기고 싶어서 그렸을 것이다. 두 어머니는 그림 속에서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야코프는 그 두 사람이 성장기를 지난 다음에야 만났기 때문에, 기질적인 차이가 얼굴에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쌍둥이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릴 때를 보니, 나이 차이가 있어 형제처럼 보였다.
공작은 이때 다섯 살 전후였을 것이고 황후의 품에 안긴 황태자는 그보다 훨씬 어린 아기다.
야코프는 새삼스럽게 초상화의 두 사람이 리누스와 제러드 황태자보다 훨씬 더 형제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누스가 신경 쓰지 않았다면, 생각도 안 했을 일이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혈연이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그건 그렇습니다. 닮는다는 게 좀 재미있을 정도이지요.”
신경질적인 황자에게 야코프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황자 전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렇겠지.”
아비의 얼굴은 황궁의 그 누구도 모를 테니, 자신의 얼굴과 닮은 점을 찾아낼 수 있는 상대는 황후뿐일 테니까.
지배 가문과 황실 간의 오래된 통혼 관계를 생각할 때, 오히려 자신에게 그 피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에 새삼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그는 다른 것보다도 저 안에서 엘리엇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이 제일 신경 쓰였다.
엘리엇을 가진다고 해서 자신이 제러드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황자 전하.”
“딱히 용건이 있는 건 아니었어. 공작저의 저항이 극심하다면, 내가 있는 편이 나을까 싶어서 왔는데, 이미 놓쳤군.”
“황공합니다.”
“뒤에 물이 있는 곳일 거야.”
리누스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야코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클레어는 근본적으로 남을 못 믿는 여자야. 자존심도 세고. 포위되면 뛰어들 강이라도 있어야겠지.”
“말씀하시는 뜻을 알겠습니다.”
군대라면 배수진은 결사의 각오를 뜻하지만, 성이라면 포위당하더라도 배를 띄울 수 있다면 한쪽이 열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를 줄일 수 있었다.
* * *
누군가가 북을 쳤다. 음조 낮은 노랫소리는 웅웅거리고 하나로 뭉쳐져 도도한 강물처럼 길거리를 흘렀다.
하원 의원들이 방패처럼 막아선 앞에서 뒤로, 리나 슈나이더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파문이 퍼지듯 사방으로.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이 모두 같은 뜻일 리는 없다. 그러나 분열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모두 노래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제3 친위사단은 총구를 겨눈 채 긴장한 숨을 할딱였다. 이렇게 대기하고 있어 봐야 좋아질 일이 없었다.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나서, 이제 끝이 안 보였다.
전쟁에서는 보통 20에서 30%의 사상자만 발생해도 전멸로 취급하고, 그 전에 패배가 확실해지면 겁에 질린 병사들이 달아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 끝은 어디에 있을까? 대로를 가득 메운 것은 확실하지만, 꺾여서 건물에 가려진 바람에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저 중 20%를 확실하게 사살할 자신도 없거니와, 여기 몰려든 자가 전부인 것도 아닐 터이다.
바리케이드가 저 군중을 막을 수 있을까?
“반역자다. 흔들리지 마라.”
제2 친위사단장 그라이저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이 뭐라고 말하든, 황궁을 향해 무기를 들고 쳐들어오는 자들에 불과해. 우리는 자랑스러운 제국군의 정예로서, 황궁과 황실의 정통한 후계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어리석은 소리!”
맨 앞에 서 있던 노이만 의장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찢었다.
“여기 있는 건 프리드리히 대제께서 세우신 황법에 의해 비상시 황권을 대행할 자격이 있는 하원과 내각의 각료이며, 뒤에 선 것은 제국민의 뜻이오!”
“맞다!”
“우리가 제국민이다!”
한순간 노랫소리가 그치고 그런 말이 돌림 노래처럼 앞에서부터 뒤까지 파도치듯 이어졌다.
뒤에 있는 자들은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미 공동의 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기꺼이 그 선언을 따라 했다.
아우구스타가 나타난 것은 이때의 일이다.
“그라이저 장군, 잠시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 위험합니다.”
사거리가 닿는 범위였다. 하지만 아우구스타는 고개를 젓고, 앞으로 나섰다.
“황후 폐하의 명령이십니다.”
그라이저는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우구스타는 혼자서 바리케이드 바깥으로 나갔다. 나이 든 귀부인이 꼿꼿한 모습으로 혼자 나서자, 노랫소리가 앞에서부터 잠시 멈추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타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울렸다.
“노이만 의장 각하, 황후 폐하께서 이 탄원을 듣기로 하셨습니다.”
그건 사태의 규모를 순식간에 단순한 탄원으로 축소시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타의 당당한 태도에는 그것을 진짜처럼 느껴지게 하는 기백이 있었다.
“몇 분만 함께 가시지요. 이 모든 사람이 모두 다 함께 황궁으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작은 술렁임이 퍼졌다. 아우구스타는 동요를 느끼고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믿어 주십시오. 황후 폐하께서는 이미 아편과 노예 문제를 잘 인식하고 계시며, 이미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대응하고 계십니다.”
“하원 의원 두 사람이 암살당했습니다.”
노이만 의장이 말했다.
“이미 한번 이 문제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렸을 터입니다. 하원 의원을 공격하는 일은 제국법을 공격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어떤 자가 저질렀는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 범인도,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그로버 탑에서 불이 나자마자 범인을 찾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타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그래서 노이만 의장은 한층 곤란해졌다.
이게 유의미한 일일 리 없다. 평민이 이렇게 집단으로 항의하는 것을 황후가 용납할 리 없고, 지금 모여든 군중도 약속 몇 마디에 흩어질 리 없다.
무엇보다도 황후는, 지금 하원 의장인 자신을 비롯해서 구심점이 될 만한 사람을 시위대에서 분리한 다음, 강제 해산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아우구스타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양보하는 것처럼 보인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서 이게 다 책략 아니냐고 따지면, 오히려 자신이 싸움을 일으키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리나 슈나이더였다.
리나는 맨 앞이 아니라 거리 중간쯤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사람들이 모두 길을 비켜 주었기에, 손쉽게 나아갈 수 있었다.
아우구스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나는 구겨져 너덜거리는 후드 망토 위에 흐트러진 금발을 무심코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실 거라면, 지금 당장 들어주실 수 있는 것부터 하나 들어주세요.”
“그게 무엇입니까, 슈나이더 백작 영애?”
아우구스타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리나의 신분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킴으로써 시위대와 그녀를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리나는 맑고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의 폐쇄를 풀고 통행을 허락해 주세요.”
“…….”
“생업에 문제가 생긴 사람도 많지만, 적지 않은 수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든, 안에서 나가지 못하든. 수도에 머무르느라 돈을 전부 써 버리고 길에서 자다가 잡혀가는 사람도 있고, 집에 돈을 보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마 가족이 굶주리고 있을 테지요.”
“슈나이더 백작 영애,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공격당하신 상황에서…….”
“그 일이 수도에서 벌어진 것도 아니잖아요. 황궁을 이만큼이나 철저하게 지키실 수 있다면, 황후 폐하와 황자 전하의 안위도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리나가 말했다. 동의하는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올라왔다.
아우구스타는 긴 소맷자락 속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기차역까지 열어 달라고 청하지는 않을 거예요. 길 한쪽만 열어도…….”
그때였다.
피우우웅……!
멀리 수도 외곽 쪽에서 신호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기에, 노란 불꽃이 쏘아 올려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적군이 바로 앞까지 도착해 있다는 신호였다.
시위대에도 퇴역 군인이 섞여 있었기에, 그 신호는 금세 알려졌다. 아우구스타는 황급히 철책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전령이 미친 듯이 말을 달려왔다. 그리고 쓰러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렌 공왕이 남쪽 가도로 남방군을 이끌고 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