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가 분명해-215화 (216/263)

#215화

제2 친위사단의 장교 랄프는 망연한 기분으로 남방군의 군기와 그 옆에서 펄럭이는 아렌 왕가의 깃발을 보았다.

명령대로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하면서도 이게 무슨 소용인가 했었다. 남방군이 반역할 것도 아닌데. 하지만 이제야 명령의 참뜻을 알겠다.

상부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로 빠르게 진격할 줄은 몰랐을 테지만.

이건 철도를 이용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말로 하자면, 남방군의 주둔지부터 수도 위성 도시인 이곳까지, 역이 있는 지역을 모두 확보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즉위식을 서두르는 이유를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요새 밖으로 몸을 내밀고 남방군 사령관 제프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반역할 작정입니까, 제프 각하?!”

“반역이라니. 본디 아렌 왕가에 아렌 군 통수권이 있으니, 이는 정상적인 명령 체계라네.”

아렌 공왕이 느긋한 걸음으로 제프의 곁으로 와서 말했다.

결혼 합병을 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로멜 황실과 아렌 왕실, 양국의 귀족원은 합병에 동의했으나, 끝내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오래된 방식에 따라 행동했다. 대부분의 것을 묵시적인 관습 속에 묻어 둔 것이다.

아렌 왕가의 통수권도 마찬가지다.

통치권을 황실에 위임한 왕가가 다시 군에 손을 댈 일은 없었다.

아렌 지역에 주둔한 군대가 아렌군인가 아닌가도, 따져 보면 복잡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황제나 황태자, 둘 중 한 명만이라도 생존해 있었다면, 이 허락 없는 군사 행동은 반역이었을 것이다.

혹은 리누스 황자가 아렌 왕가 출신이기만 했어도, 아니 적어도 아렌 왕가의 지지를 얻고 있거나 이것이 로멜과 아렌 사이의 싸움처럼 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황제가 없다. 실제로 즉위하게 될 황자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제국에 대한 반역이 아니냐는 말 또한 의미가 없다.

황권을 대리하는 하원과 내각이 황자의 세력과 대치 중이기 때문이다.

“무장 병력의 진입은 불가합니다. 공왕 전하께서 들어오시겠다고 하면, 그것을 막지는 않겠습니다.”

“그런가.”

아렌 공왕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랍고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젊은 시절처럼 손발에 힘이 가득했다.

친위사단이 이 사태에 놀라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합병은 고작해야 백 년 전 일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아득히 옛날 일 같겠지만, 칠순이 훌쩍 넘은 아렌 공왕의 입장에서는, 그가 어렸던 시절만 해도 아렌 왕가는 아직 아렌의 군주였다.

아렌 출신의 배우자를 맞이하고, 그 소생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을 우선시하는 계승법은 오로지 아렌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두 나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단시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황후는 남부 아렌까지 모든 행정관을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실제로 봉급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출세하기 위해 누구의 줄을 잡았는지와 별개로 공왕의 부탁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지금처럼 대립이 첨예한 시점에서는 더더욱. 아니 오히려 출신지에 대한 의식이 흐려져 가던 시점에서, 로멜 우월주의가 생김으로써 도리어 다시 한번 아렌인으로서 자부심이 고취되었다.

공왕이 알던 ‘아렌인다움’과는 달랐으나, 로멜 황실과 다른 상징이 필요했으므로 왕가를 쉽게 받아들였다. 옛날 같은 충성심은 없었어도 말이다.

공왕은 황후의 방법이 비효율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수로 다수를 지배하려면, 다수가 분열해야만 한다.

아렌인이 낮아져야 로멜의 신분과 자본을 우위에 두고, 그 로멜을 다스리는 소수의 로멜 귀족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왕 전하, 어찌하시겠습니까?”

제프가 물었다. 아렌 공왕이 명령한다면, 내전을 일으키는 것 또한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그러나 아렌 공왕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의 손짓을 본 부하가 의자를 가져왔다.

“실례하겠네. 내가 늙으니 오래 서 있기 힘들어서.”

“아닙니다.”

“우리는 기다리도록 하지.”

아렌 공왕은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말했다.

내전을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는 없다. 그걸 막아 보자고 딸이 죽었을 때도 눈을 감았고, 외손자 때도 황제에게 분노를 표하지 않았다.

제러드가 원한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이 품었던 어떤 뜻에도.

복수를 하든 상징이 되든, 중심이 될 사람은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포위하고 있는지, 이제 황후도 알게 될 것이다.

* * *

클레어는 그때 안전 가옥에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리누스의 생각대로, 뒤에 강을 끼고 있는 조용하고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택한 것은 클레어가 아니라 막시밀리안이었다.

뒤에 강을 두고 있는 것은 호위팀에게는 배수진이 된다.

반대로 만약의 경우 요인들은 강을 타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비밀 통로와 작은 보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옛날 건물이군요.”

등불을 든 빌헬름을 따라가 비밀 통로를 확인한 클레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습하고 이끼 낀 돌벽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녀는 왜 이곳을 관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160년 정도 되었을 겁니다. 카르스텐스 공작가에서 지참금으로 주었던 저택이었는데, 원래 별저였던 이 건물만 남기고 나머지는 밀어서 개발했습니다.”

“이 건물만 남긴 게, 이 비밀 통로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외성 바깥까지 통하는 비밀의 길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도 자체의 규모가 확장된 지금은, 비밀의 길을 이용한다고 해도 수도를 벗어날 수 없다.

몇 차례의 자연재해를 겪고, 또 개발된 구역이 넓어지면서 외성 자체가 대부분 없어지기도 했다.

지금의 방어는 요충지에 세워진 소규모 성과 요새에 의지하고 있다. 애당초 여기까지 적이 들어오면, 제아무리 방어해 봤자 패전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비밀 통로 자체에는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수도 중심가는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으니까.

“비밀 통로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청소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보안부의 몇몇이 문이 제대로 열리는지만 관리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카르스텐스 가문이 사라진 지금은 이곳의 존재를 아는 외부 사람이 없지요.”

“리누스도?”

“물론 모르실 겁니다. 공작가의 직계와 보안부의 극소수만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들었고요.”

“대부인께서도 모르실까요?”

그 말에 빌헬름이 움찔했다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선대 공작 각하께서 대부인을 사랑하긴 하셨지만, 중요한 일을 의논할 상대로 여기시진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클레어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비밀 통로 밖으로 나왔다. 어둑하고 침침한 통로와 달리, 가옥 자체는 깔끔하고 단정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클레어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가스등을 켜는 대신 촛불을 딱 하나만 밝혔다. 가능하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빈집으로 보이기를 바랐다.

막시밀리안이 집 안을 모두 점검했다. 검은 옷을 입은 호위들이 총을 든 채 구석구석 배치되고, 저택 전부가 고요한 밤처럼 가라앉았다.

시위대와는 꽤 떨어진 곳에 있는데도,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동일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단조로운 곡조는 공연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클레어조차 벌써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쉽고 중독적이었다.

작곡가가 애초부터 이런 목적으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오페라에서 시작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많은 사람의 마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져 한마음이 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있는 미래의 형상도 각자 다르다.

아마도 끝에는 싸우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정말로, 이대로 괜찮으시겠어요?”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일부러 정보도 이 이상 듣지 않기로 했다. 정보를 들으려면 사람이 계속 출입해야 하는데, 그러다 자신의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무모한 짓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로 충분해. 걱정은 되지만……, 아기 생각도 해야 하니까.”

게다가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인 자신이 앞에 나선다 해도 더 나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제는 사람들을 믿고 기다릴 때였다.

“막시밀리안 경, 이제 부탁해도 될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은 모자를 쓴 채 혼자 훌쩍 밖으로 나섰다.

클레어는 망토를 벗지 않은 채 소맷자락 안에 갖고 있던 리나의 통행증과 위조 신분증을 만지작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