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가 분명해-221화 (222/263)

#221화

54. 황태손

빅토리아 대공이 수도 인근의 항구에 당도한 것은 나흘 전의 일이다.

모든 일이 전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것은 아니다.

예정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염려했지만, 그녀는 이제 북방 여러 항구 도시의 선주 연합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근위대를 전원 해로로 수송하면서도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항구에서 태세를 정비하며 에리히의 신호를 기다렸다. 남방군이 올라오고, 북방군이 전투를 시작할 때까지.

친위사단 병력이 모자란 탓에 그녀의 앞길은 환히 열려 있었다.

소수의 병력이 남아 있긴 했으나, 근위대가 직접 모시는 빅토리아 대공의 앞을 감히 가로막지 않았다.

황후는 반역을 천명한 적이 없고, 친위사단의 하급 간부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반역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전투 한 번 없이 근위대는 수월하게 두 사람을 수도 안까지 모셨다. 빅토리아 대공은 우선 자신의 저택에 들러 하원과 귀족원을 황실의 이름으로 소집했다.

계엄령으로 야단이 났으나, 귀족의 저택이나 중류 계급 이상의 자산가들이 거주하는 부촌은 상대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오히려 오늘 밤은 순찰하는 계엄군이 없었으므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때처럼 평화로웠다.

저택에서 숨죽이고 있던 자들은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르는 채, 다급히 의사당에 모여들었다.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빅토리아 대공이 소식도 없이 수도에 들어온 것도 놀라웠으나, 사라진 줄 알았던 근위대가 다시 나타난 것도 놀라웠다.

그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아마도 황제를 지키다가 죽었거나, 임무를 다하지 못하자 처벌을 두려워하여 이탈했을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위대는 말끔하게 제복을 갖춰 입은 채 의사당을 안팎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에른스트의 방계이자 에리히의 사촌이기도 한 헬무트 뢰제너는 의사당 앞에 귀족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왜들 들어가지 않고 계십니까?”

“아, 헬무트 경!”

“몸수색을 하겠다고 합니다!”

마치 그가 해결해 줄 수라도 있는 것처럼, 여러 명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원 의원 중에도 항의하는 자가 있었다.

“아무리 빅토리아 대공 전하라고 한들 하원 의원의 몸을 수색할 자격은 없네. 황제 폐하라고 해도 그러실 수 없어!”

“양해하십시오. 계엄령 중인 데다가 대공께서 황실의 대리인으로서 소집하신 의회입니다.”

근위대원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다.

여기 남아 있는 자들은 대부분 로멜파이거나, 아니면 어느 쪽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겁에 질린 소인배였으므로, 계엄령을 들먹이자 감히 따지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헬무트는 그냥 얌전히 손을 들고 몸수색에 협조했다.

‘대세가 기울었군.’

황후가 정보를 차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리히가 북방군을 장악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국상에 관한 전달을 보냈는데도 무시한 채 침묵하고 있던 빅토리아 대공이 이제야 갑자기 근위대를 데리고 수도로 돌아온 것이, 리누스를 지지하기 위해서일 리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살아 계신다는 소문도 사실인 것 같고.’

헬무트는 부친인 뢰제너 후작에게 눈치를 주었다. 뢰제너 후작도 숨을 죽였다.

황제가 살아 있다면, 이 모든 일은 반역이다. 에른스트 공작은 확실히 반역죄로 잡힐 것이고, 자칫하면 방계인 자신들도 위험했다.

그것을 알아챈 귀족과 의원들은 조용히 제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상하원이 다 모일 때만 열리는 대회의장의 자리가 절반 넘게 찼다.

숨죽인 침묵이 고여 들었다.

* * *

마차가 의사당 앞에 멈춰 섰다.

이런 밤에 외출해 본 적이 없는 엘리엇은 빅토리아 대공의 무릎 위에서 불안한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가로등이 환히 밝혀져 있었지만, 어딘가 불길한 비린내가 여기까지 풍기는 것 같았다.

“진짜로 우리 둘이 가요?”

엘리엇이 조심스럽게 빅토리아 대공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또 물었다.

솔직히 무서웠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싸움이나 총성과 마주친 일은 없었지만, 근위대의 바짝 긴장한 태도나 살기등등한 분위기는 접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심상치 않은 기색만은 느끼고 있었다.

빅토리아 대공이 조심스럽게 엘리엇을 보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예쁜 것, 고운 것만 보게 해 주고, 눈을 가려 무서운 일은 하나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곱게만 자란 동생이 유약한 황제가 된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이

런 일을 겪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일은 결국 언젠가 모두 엘리엇의 어깨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녀는 다정히 엘리엇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다, 엘리엇. 무슨 일이 생겨도 이 이모할머니가 지켜 줄 테니.”

“응.”

“황제 할아버지도 그렇고, 후크 선장도, 윌 아저씨도, 모두 널 지켜 주려고 애쓰는 걸 알고 있지?”

“응…….”

“그리고 아빠와 엄마도 널 꼭 지켜 줄 거고.”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제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응. 그리구 하늘에 있는 엄마도.”

“그래. 하늘에 있는 엄마도, ……하늘에 있는 아빠도.”

여태까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에 엘리엇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늘에 있는 엄마가 누군지는 알았지만, 아빠도 하늘에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대공이 주름진 얼굴에 한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있단다.”

“아빠도 하늘에 있어요?”

“그럼. 항상 널 지켜보고 있었을 거야.”

엘리엇이 설레는 듯 가슴에 손을 댔다.

“와, 나, 아빠도 있구나.”

진짜로 없는 줄 알았다. 물론 아빠가 생겼지만, 엄마가 이모인 것처럼 아빠는 진짜 아빠가 아니니까. 가족이 되었지만, 낳아 준 아빠는 아니다.

다들 아빠가 있었다. 사실, 제임스 할아버지가 가끔 제가 없는 자리에서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라는 말을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엘리엇은 그 말속에 들어 있는 사회적 경멸까지 알지는 못했으나, 제게만 아빠가 없고, 그게 좋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실은 아빠가 있었단다. 엘리엇은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빅토리아 대공에게 물었다.

“그러면, 그러면…….”

“응?”

“아빠랑, 엄마랑, 같이 있어요? 하늘나라에?”

“그래. 네 엄마가, 네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같이 있어 주려고 먼저 올라간 거야.”

빅토리아 대공은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소중하게 엘리엇을 보듬어 안았다.

이 이야기는 원래 클레어와 에리히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조금 더 자란 후에, 다정하고 고요한 가족의 시간 속에서.

하지만 지금은 엘리엇이 충격받기 전에 먼저 말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았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이 이야기를 네게 해 줄 상황이 생기면, 에리히가 꼭 네게 이 말을 전해 주라고 하더구나.”

“응…….”

“이모가 널 사랑하니까, 데려가면 이모가 너무 많이 울 것 같아서 엄마가 너는 나중에 데리러 오기로 한 거라고. 널 덜 사랑해서 두고 간 게 아니라.”

빅토리아 대공이 찬찬히 말했다. 엘리엇이 중얼거렸다.

“이모 울면, 싫어.”

“그러니까 아주 나중에. 이모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살고, 엘리엇이 이 할머니처럼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 그때 하늘에서 다 같이 만나면 돼.”

“응…….”

“이모도 엄마잖아, 그렇지?”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네 이모할머니고. 아빠도 네 아빠야. 너한텐 같이 사는 엄마 아빠도 있고,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 아빠도 있고, 할아버지도 잔뜩 있고, 할머니도 잔뜩 있는 거야.”

엘리엇이 이번에도 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빅토리아 대공은 아이가 죽음을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 자신이 한 말도 전부 이해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전달되기를 바랐다.

빅토리아 대공은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엘리엇이 빅토리아 대공의 목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모할머니, 사랑해요.”

“그래. 나도 널 사랑한다.”

가슴속에 따뜻한 물이 출렁이듯 차올랐다.

이모할머니든 고모할머니든, 아니 피가 통하지 않은 아이였어도 자신은 이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똑똑.

마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너무 오래 내리지 않으니 근위대 부대장이 염려가 된 모양이었다.

빅토리아 대공은 엘리엇을 무릎 위에서 내려놓고 머리를 다듬었다.

“괜찮아 보이니?”

“멋있어요!”

“다행이구나.”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엘리엇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말을 들어도, 신사라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울지 말고, 큰 소리로 웃지 않고, 항상 침착해야 해요. 그리고 화낼 땐 상대를 울려야 해요.”

빅토리아 대공은 약간 웃어 버렸으나 굳이 마지막 말을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 궁금한 게 생기면, 나중에 이 이모할머니에게 묻거나 아빠랑 엄마한테 물어보면 돼. 알았지?”

“네.”

“열어라.”

빅토리아 대공이 명령했다. 근위대 부대장이 마차 문을 열었다.

그녀는 엘리엇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의사당으로, 아이의 첫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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