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리누스는 알지 못했으나, 만일에 그가 어머니에게 복수하고 싶었다면 최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아렌 공왕은 난생처음으로 타인을 고통과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 고민했다.
결코 즐거운 고민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멸망을 상상하면서, 슬퍼하기는커녕 기뻐하는 마음조차 없이, 냉정한 마음으로 전략을 짜는 자신이 추하게 느껴져서 견디기 어려웠다.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군에서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일도 있고, 어떤 사람을 살리고 어떤 사람을 죽일지 결정을 내린 일도 있다.
아마도 부당하거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더 많았으리라.
하지만 이처럼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생각을 짜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냥 죽여 버리는 건 너무 쉬워.]
그는 황제처럼 유약하지 않았다. 다가가 총을 꺼내 머리를 쏴 버리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죽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단 수중에 넣었던 남방군은 아직 공왕의 손에 있었다.
이번 일에 공왕은 주도자 중 한 명으로서, 의회에서 모든 일을 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의 공적과 영향력이 퇴색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아마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쉽다. 교수대에 걸리도록 하는 것도 쉽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처형이나 암살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황후를 아편에 중독시킬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 내지 못했을 뿐이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재판장에서 황후가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는 왜 자신이 먼저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잔악한 자에게는, 제가 한 행동이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옳지.]
아렌 공왕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에리히는 그런 그를 보고 씁쓸한 표정을 했다.
제러드가 살아 있다면, 저것과 닮은 얼굴을 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차마 마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도와 달라는 말을 하는 나를 용서하게.]
[아닙니다. 누가 공왕 전하를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리누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시는 편이 좋았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그게 고통을 더할 뿐이라면 말입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네.]
공왕은 떨리는 손을 쥔 채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때 자신의 눈이 얼마나 붉었는지,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어. 심증만 있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게 나아.]
[리누스의 말도 제대로 된 증언은 아닙니다. 진짜 암살 방법을 알아낸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을 전하는 말도 아닙니다.]
[그래도, 처음으로 납득할 만한 말을 들었어. 나는 처음으로 악몽을 스스로 끝낼 수 있었다네.]
딸이 죽어 가는 것을 반복해서 보는 악몽을 그는 끝낼 수 있었다.
옷을 모조리 손으로 훑었어야 했다는 황제의 망상처럼, 공왕 역시 꿈속에서 그렇게 했다.
제 손으로 딸의 옷을 모두 훑고 단추를 뜯었다.
헨리에타는 왜 그러느냐고 당황하면서도 웃었는데, 그때 그는 꿈에서 깨어, 그 일 이래 제 꿈속에서 딸이 웃은 게 처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리히가 보기에 그의 악몽은 끝난 것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배신을 맛보게 하시지요.]
[뭐?]
[저는, 황후를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입니다.]
에리히는 눈동자가 검푸르게 보일 정도로 그늘을 드리우고 말했다.
실행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 타인이 대개 무력하고 무능하니 자신이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 자신도 똑같았다.
운이 좋아 공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클레어의 그 말에 결국 동의했다.
그러나 몇 년짜리 입씨름 끝에 동의하기 전까지 한 번도, 자신이 클라우제너의 주인 되는 것이 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이 타고난 운명이며, 천품이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힘과 권위와 자기 자신은 같은 것이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가 황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공왕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니, 공은 달라. 고고한 것과 오만한 것은 다르고, 위에 서서 타인을 이끌고자 하는 것과 짓밟아 제 뜻을 따르게 하는 것도 다르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아실 겁니다. 저는 오만했고, 후자도 어느 쪽이든, 남의 삶을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황후도 자신이 남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을 테고, 아마 공왕 전하께서도 타인의 삶을 좌우할 힘을 전하의 권리로 여기셨던 시기가 있었을 겁니다.]
[…….]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저나 공왕 전하에게는 삶이 뒤집힐 계기가 있었고, 황후에게는 없었다는 점이겠지요. 그래서 그녀에게 배신을 안겨 주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떻게?]
[아우구스타를 배신시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별것 아닌 일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에리히는 배웠다.
그는 제아무리 오만한 자도 마음을 배신당하면, 골수까지 파이는 고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세계가 부서지면 좋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고통은 똑같이 남는다.
자기중심적인 만큼, 그 고통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포함되리라.
황후에게 맛보여 주기에는 딱 좋은 감정이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의 감정일 터이다.
게다가 아우구스타와 황후 사이에는 몇 년짜리 우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친 시간이 있다.
신뢰는 상대의 인품을 믿고 하는 것이다. 단순한 애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쌓아 올린 시간과 능력에도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타를 놓아주라는 건가?]
[아닙니다. 황후는 제멋대로 실망하고 절망할 겁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타가 진짜로 배신한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황후의 그런 태도가 그녀에게 배신이 되겠지요.]
[아우구스타가 진짜로 전향한다면?]
[꼭 배신의 대가를 치러 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멋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두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면서 에리히는 씩 웃었다. 그건 에리히 클라우제너답지 않은 태도였으므로 아렌 공왕은 무심결에 약간 미소를 지었다.
입덧까지 따라 하는 남편이 아내를 닮아 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렌 공왕은 그의 제안대로, 자신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모두 동원하여 아우구스타를 고립시켰다.
그녀가 진짜로 배신하거나, 하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만족스러운 결과를 갖고 오길 기대하면서.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아우구스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하지 않군.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고, 어떻게 실패했는지 절절하게 깨닫고 떠나기를 바랐는데. 하긴, 치러야 할 응분의 대가가 내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니, 전부 내 뜻대로 할 수만은 없겠지.”
“…….”
“교수대는 너무 관대한 처사라고 생각하지만.”
아렌 공왕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아우구스타는 망설임 없이 일어섰다.
교수대가 관대한 처사라는 말에서 희망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공왕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손발을 모두 늘어뜨려 완전한 굴종의 자세를 취했다.
“하신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증오하시는 게 마땅합니다. 하지만 저는 쓸 만한 사람입니다, 공왕 전하.”
“레이디 아우구스타.”
“알고 계실 겁니다. 공왕 전하께 쓸모가 없다 해도, 소중한 손자분의 양부모에게는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겁니다. 정치를 하면서 손을 더럽히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황실은 지금 위태로운 지경에 있으니, 엘리엇 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 같은 자가 필요하실 겁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 내가 아직까지 신사적으로 행동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걸세. 그러지 않았다면, 지팡이로 머리를 후려갈겼을 테니.”
“그렇게 하십시오. 하고 싶으신 일을 모두 하시고, 다만, 마르고트 님의 목숨만…….”
“교수대에 걸어야겠군.”
그게 자신이 결정할 일은 아니었으나 아렌 공왕은 그렇게 말했다. 너무 쉽게 죽이는 게 아닐까 하던 망설임마저 싹 사라졌다.
어차피 제정신이 아닌 마르고트야 후회하고 절망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테고, 아우구스타에게는 그것이 절망적인 일인 모양이니.
“이 모든 일은 전부 그대들이 한 일이 그대로 돌아온 거야.”
그가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서 밖에 대고 말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를 정중하게 댁까지 모시게.”
굳이 그녀를 처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무시하고 살려 두는 게 좋겠다. 자신이 오래도록 절망을 짓씹었듯, 그녀도 그리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