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게 왜 여기서 나와?2021.06.16.
“마님?”
“마님! 행색이 그게……!”
“아이고, 주인님!”
“백작님!”
나는 침실 문을 걸어 잠갔다. 아카시아 백작과 마주친 나는, 무작정 마부를 닦달하여 저택으로 내달렸다. 마차를 타고 황궁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끊임없이 울었다.
“마님! 마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신 거예요?”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교차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베개를 뒤집어쓰고 귀를 꾹 틀어막았다.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내 감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노에비안이 너무 미웠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만큼 미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 말 한마디가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노에비안은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도 그저 괜찮다 예쁘다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되뇔 뿐이었다.
‘말해주지.’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게 당신도 힘들었다고. 당신도 지친다고. 내가 조금 상처받더라도 그가 솔직하게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그에게 더 예쁘게 웃어 보였을 것이다.
‘마음껏 응석 부려도 돼, 아드리엔.’
‘당신은 내 아내잖아. 당신의 고통은 내 고통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숨기지 마.’
그렇게 달콤하게 말했었다. 몇 달 만에 한 번씩 보는 소중한 날에도.
‘그게 진심이었어, 노아?’
그래서 지쳐서, 나 대신 이 여자를 만난 거야? 아드리엔을 사랑한다 속삭이며 이 여자와 함께하길 바란 거야? 내가 죽고 100일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베개가 흠뻑 젖을 만큼 눈물을 흘리자, 어느 순간부터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말한 ‘온전한’ 그의 정부라는 뜻은 뭘까. 대공저로 들어와 살기라도 하라는 걸까.
‘이대로 블리에 아카시아가 되어, 대공저에 들어가 그림자처럼 살라고?’
노에비안의 성격상 그는 절대로 정부를, 귀족 출신도 아닌 이 블리에를 다음 대공비로 세우지도 않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비참할 수가 있지?’
블리에가 그와 약속한 대로, 그의 정부가 되어 대공저나 그 근처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면?
‘그럼 나는?’
블리에가 아닌, 아드리엔은? 아드리엔인 내가 그렇게 지낼 수 있을까? 한순간에 피레타의 딸도, 노에비안의 아내도 아니게 되어버린 나. 누구에게도 내 신분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숨어서 지내야 하는 나. 그런 삶을 상상하자 이렇게나 건강한 몸을 갖고도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아마 나는 평생을 불행하게 살 것이다. 정부의 몸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은들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블리에가 아닌 죽은 아드리엔을 사랑한다 말해도 나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왜 이 여자를 안는 거야 노아?’
평생 그런 번뇌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가 다음 대 황제로 세울, 황태자 바르데날도에게 도움이 될 새로운 대공비를 질투하고 원망하면서. 상상만으로도 숨이 가빴다. 신이시여. 어째서 당신은 내게 이런 장난을 치는 건가요. 그런 생각만 계속 든다. 다른 이들에게는 멀쩡한 몸과 반려를 전부 안겨주시면서, 어째서 제게는 둘 중 하나도 제대로 쥐여주시지 않는 거예요, 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없다. 지금 남편이 되어버린 아카시아 백작은 내가 하루빨리 노에비안의 ‘정식’ 정부가 되어 이 저택을 나가길 바라는 것 같고. 하녀들도 은근히 노에비안의 연락을 기다리며 저들 역시 안주인이 없는 대공저로 거처를 옮길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울음이 잦아들고, 절망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을 때……. 나는 방금까지 함께였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까?’
마치 내 사정을 다 아는 듯 말하던 낯설고 아름다운 남자. 본래의 나를 아는 것 같았던 남자.
‘몇 년을 철석같이 믿었던 노에비안에게도 배신당했는데, 처음 만난 그 남자를 어찌 믿고?’
침실에서 내가 조용해지자, 요나가 조용히 문을 따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든 척 눈을 감고 내 발을 닦아주는 요나의 손길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내 구두를 찾아 가져왔던 남자가 다시 떠올랐다.
‘무엇을 도와주실 수 있는데요?’
‘무엇을 원합니까?’
무엇을 원하느냐고? 다시 생각해도 우습기 그지없는 말이다. 난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가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병을 낫게 해 달라 빌 육체는 죽어버렸고 죽여버리고 싶은 정부의 몸 안에는 떡하니 내가 들어 있었다. 노에비안은…….
‘그런 꼴로 울지 않게 해달라는 뜻입니까? 사랑싸움에 끼어드는 취미는 없는데.’
나는 노에비안의 밀애를 보고 경멸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던 그 남자의 서늘한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다가와 놓고, 경멸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묘한 눈을 빛내는 남자. 그 얼굴을 보며 올라오는 술기운에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부여잡았었다.
‘한 번 더 내 입에서 도움이 필요하냔 소리가 나오면……’
‘그때는 내가 정확히 뭘 도와주는 게 좋을지 스스로 말해야 할 겁니다.’
당신의 무엇을 믿고. 당신이 무엇인데. 그리고…….
‘그렇게 날 도와주면, 나는 당신에게 뭘 줘야 하는데?’
차마 묻지 못한 말을 입속에 머금었을 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었다. 쓰러졌을 때보다 더 사색이 된 아카시아 백작이 날 부르고, 로아드네스의 묘한 시선이 내 온몸을 훑고. 멀찍이서 닐이 홀에서 주워온 내 숄을 건네주고 아카시아 백작과 마주하고 그리고……. 기억을 반추하던 머릿속 영상은 거기서 뚝, 끊겼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에 곱게 눕혀져 잠옷으로 갈아 입혀진 채였다. 어제 파티장에선 샴페인 한잔 밖에 마시지 않았었는데, 머리가 끔찍하게 아팠다. 말 그대로 쪼개질 것처럼. 설렁줄을 미친 듯이 흔들자 요나가 마침 세숫물을 들고 부리나케 뛰어왔다.
“마님! 괜찮으세요?”
그녀는 살짝 울먹이는 눈으로 일어나려는 나를 꾸욱 잡아 눌렀다. 귀부인에게 하기에는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내게는 그것을 지적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술도 잘 못 하시는 분이, 도대체 얼마나 드신 거예요!”
문밖에서 마지를 비롯한 하녀들 몇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서서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나는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요나의 말로 추측해본바, 이들은 내가 어제 술주정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요나가 야무진 손으로 물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멀리 보이는 거울을 보니, 머리만 조금 헝클어졌지 화장은 깨끗하게 다 지워져 있었다. 요나가 내가 잠든 사이 지워준 듯했다.
“오늘 신문은?”
마지가 기다렸다는 듯 침실로 들어와 오늘 자 신문들과 가십지들을 내밀었다. 요나가 내 머리를 열심히 빗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온전히 내 머리를 맡기고는 정신없이 가십지를 뒤적였다. 머릿속으로 글자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꿈만 같았던 어제의 상황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봐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노에비안에게서 벗어나야 해.’
이혼. 노에비안의 가신인 이 저택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그의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아카시아 백작 부인으로서 이곳에 살아서는 안 된다.
‘이혼부터 하자.’
노에비안이 직접 시킨 결혼이라면, 지참금도 많았겠지. 합의로 이혼하면 정식으로 위자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응접실과 연결된 블리에의 집무실로 향했다. 업무를 보는 곳의 풍경이라기엔 지나치게 잡동사니가 많은 창고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는 거대한 책장에 관상으로 꽂혀 있는 두꺼운 책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혼하는 귀부인을 위한 지침서】 마침 보라는 듯 꽂혀 있는 책을 빼 들었는데……. 툭-. 그 두꺼운 지침서 안에 끔찍한 분홍색으로 칠갑이 되어 있는 다른 책 한 권이 떨어져나왔다.
“엇, 저 아무것도 못 본 거예요!”
“……?”
내가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주워들자 요나가 손으로 눈을 덥석 가리더니 소리쳤다. 동시에 마지도 입을 떡 벌리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마님의 일기장, 어디 숨겨뒀나 궁금했는데 그런 곳에 숨겨두시다니!”
“일기장?”
“어차피 꼬부랑 외국어로 쓰는 거라 봐도 모른다고 그리 말씀드렸는데도…… 생전 잘 들지도 않으시는 집무실에 숨겨두시다니. 참나, 유난이시라니까.”
마지가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나는 쏟아지던 두통이 단번에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기장!’
블리에 아카시아의 일기장! 망할 정부의 일기장이 내 손에 들어오다니! 진실을 알아도 답답한 마음을 해갈하지 못했던 내게는 희소식이었다. 흥분해 떨리는 손으로, 나는 조심스레 그 끔찍한 분홍색 일기장을 펼쳤다. 근데, 이거…….
“……이게 왜 여기서 나와?”
두통이 사라졌던 머리가 아침처럼 다시 핑핑 돌기 시작했다. 망할 블리에 아카시아가 제 일기장을 누가 몰래 볼까 봐 엘라콘어로 죄다 써놓았다.
“이게, 도대체, 왜…….”
아카데미 시절, 매번 낙제를 면치 못했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던 외국어로!
*** 연구자료로 쓰려던 지하 감옥의 마물들이 모조리 누군가의 검에 베어져 목이 나뒹굴었다. 그 끔찍한 피를 온통 뒤집어쓰고, 로아드네스는 감옥 입구에서 술을 병째로 목에 들이붓고 있었다.
“어딜 가셨나 했네요.”
“…….”
“전하.”
“꺼져라.”
닐이 한숨을 푹 쉬고는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피나 좀 닦으라는 뜻이었다. 받아들지 않고 술만 들이켜는 로아드네스의 모습은 마치 처음 그를 만났을 적 모습과 흡사했다. 은은히 미쳐 있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미쳐서 이성 어디 한 구석이 뚝, 끊어져 버린 2년 전의 그 얼굴.
“개 잡놈의 새끼…….”
“피 좀 닦아 드리려다 그런 욕까지 들을 줄은…….”
“시신은?”
“…….”
닐은 이 아름답고 위험한 맹수가 반응하는 말이 묘하게 트로비카 대공비와 관련된 소식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2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해 보면 트로비카 대공 부부가 세기의 커플이라 온 제국이 들썩였을 때였지. 모두가 선남선녀의 만남을 축하하고, 술자리에서 가십거리로 삼을 때도 이 미친개만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고 피를 봤다.
“귓구멍 뚫고 다시 와라.”
“시신은 여전히 대공저에 있다 합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고요.”
“…….”
“그리고 아카시아 백작저에서…….”
쨍그랑! 순식간에 술이 병째로 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누군가 흘린 피처럼 바닥에 흥건히 고이는 술을 보던 닐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부녀자를 희롱하는 듯, 도와주는 듯 미묘하게 여유롭던 그날 저녁의 탕아는 온데간데없었다. 부관들이나 은밀히 별명으로 지어 부르던 개황자, 로아드네스만이 존재했다. 어두운 밤에 번뜩이는 붉은 눈은 거대한 마물보다 등줄기를 더 긴장시켰다.
누구 하나를 잡아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제 주군이 욕하고 있는 상대는 분명 대공 노에비안 트로비카다. 그 ‘개 잡놈의 새끼’가 본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닐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지고 온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엘라콘어 가정교사 구함】 번뜩이던 붉은 눈이 곧바로 크게 흔들리더니 곧, 개암나무 열매처럼 반질반질해졌다. 그 놀라운 변화에 닐의 팔에 소름이 돋아날 무렵.
“이력서를 넣어라.”
“예? 저는 엘라콘어의 엘도 모르는데…….”
“장난하나?”
그럼 주군은 진심이십니까 지금? 하극상이 줄줄 흐르는 문장이 입 안에서 불꽃처럼 타닥거렸다. 그것을 꿀꺽 삼킨 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전하께서?”
로아드네스가 곧이어 새로운 술병 뚜껑을 따고 목에 들이부었다. 이만 꺼지라는 신호였다. 멍하니 그를 보던 닐이 뒤돌아서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로아드네스는 그가 건넨 종이를 보고 일그러진 얼굴로 웃다가 제 입에 술을 들이붓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미쳤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술을 마시려 턱을 치켜들 때마다 벌써 몇 번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것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왜 저렇게 매일 우는 거야?’
로아드네스의 눈물. 뜨거운 얼음. 차가운 용암과 같이 도저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닐은 요즘 계속 목격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