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유령을 위한 생일파티2021.06.19.
아카시아 백작과 나는 보통 한 자리에서 식사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시방석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꼭, 그와 함께 식사를 하고 티타임까지 가지고 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평화로운 시간.
“슬슬 이혼을 준비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나는 내 눈치를 살피는 백작에게 심드렁한 척 권했다. 이런 일탈은 처음이라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아카시아 백작을 속여먹기는 쉬웠다. 승전기념식에서 쓰러졌다가 정신이 들자마자 나를 찾아 헤맸던 백작은 며칠 사이에 관짝에 누워 있어도 될 만큼 폭삭 늙어 있었다. 노쇠하여 축 처진 눈꺼풀 사이로 호박색 눈이 반짝였다. 그는 내가 이혼을 원한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미리 서명해둔 듯한 서류를 내밀었다. 당연히 노에비안과 의논한 결과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어찌나 간절했던지 그 서류는 이미 가장자리가 한참 닳아 있었다. 나는 한참 그 서류를 살피다가 조용히 말했다.
“위자료는요?”
“위, 위자료요?”
아카시아 백작과 이혼하고, 노에비안의 정부로 살지 않으려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데 돈이 없으면 안 되지 않나.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돈이라도 있어야 했다.
“어, 얼마나?”
“성의껏 주세요.”
대공이 직접 시킨 결혼이니 꽤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들어왔을 테니까. 아카시아 백작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다가 그보다 더 떨리는 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이,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
귀족답지 않은 표현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 내 얼굴을 보고 흠칫하던 그가 엄지 하나를 마저 들어 보였다.
“이, 이 정도면……?”
“백작께서 얻게 되실 이득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하녀 몇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주인도 없는 이 집에서 놀고먹는 인력 몇을 데려갈 테니 당연히 인건비만큼 더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얻게 될 이득이 노에비안이 제게 내릴 상 따위라고 생각하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나는 굳이 그런 오해를 정정시키진 않았다. 들어 올려질 듯 말 듯한 손가락을 응시하던 나는 결국 못 참고 손가락 두 개를 직접 잡아 올려주었다. 벌레라도 닿은 듯 치를 떨던 백작이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이혼 신청서를 마저 작성했다. 서류가 받아들여지는 즉시, 블리에 아카시아의 계좌로 손가락 다섯 개만큼의 돈이 들어올 이혼 신청서가 내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대공저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저택과 백작님의 안사람이라는 타이틀까지 좀 쓸 생각인데 괜찮으시겠죠?”
그는 네가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듯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가벼워 보이는 백작의 몸이 집무실로 향하자, 나는 긴장했던 숨을 내쉬었다. 노에비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을 뗐다.
‘새로운 몸을 얻은, 새 삶에만 집중하자.’
그 어떤 원망도, 복수도, 슬픔도 내가 선 자리가 단단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블리에를 가졌다고 생각한 노에비안에게 이별을 고하는 거야.’
나는 여전히 뒤통수가 얼얼한 것을 외면하며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려 애썼다.
*** 어김없이 일을 하러 나서는 백작에게 나는 노에비안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면 이혼에 대해선 입도 벙끗 말라는 언질을 주었다. 곧이어 백작 없는 백작저에 대공저로부터 온 초대장 하나가 도착했다. 안주인으로서 당연히 손수 뜯어봐야 했지만, 괜스레 기분이 꺼림칙했다. 마지의 손으로 금쟁반에 정성껏 올려져 바쳐진 그 초대장을 나는 아침나절 내내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집안 서재에서 <초급 엘라콘어> 책을 찾아내 독학 중이었다. 아카데미에는 어릴 때 고작 몇 년 다닌 지라 그 기억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두기 전까지는 참 열심히 공부했지만 처음 1년 동안은 엘라콘어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지…….
“끙.”
물론 번역가를 구해 그에게 해석해달라고 하는 것이 가장 빨랐으나, 이 일기장에 무슨 내용이 있는 줄 알고 맡기겠는가. 일기에 쓰여 있는 단어야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닐 테니 기초적인 것만 다시 열심히 배워도 예전에 공부했던 기억이 살아나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봤자 일기일 뿐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이런 기초적인 문장도 해석하지 못할 만큼 대충 공부했던 나날들을 반성했다. 가정교사 공고를 냈지만, 엘라콘에서 제국어를 배우는 경우는 많아도 제국에서 엘라콘어를 배우는 이는 흔치 않아 아직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엘라콘과 제국은 교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않아 엘라콘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이들이 드문 것은 아닐 테다. 개중에 입이 무겁고 믿을만한 자를 찾을 수만 있다면 못 배울 것도 없었다. 아주 짜증이 나기는 하겠지만. 직관적인 제국어에 비해, 문법이나 단어의 쓰임이 다양한 엘라콘어는 적어도 내게는 아주 짜증 나는 언어였다.
“마님, 대공 전하께서 뭔가 보내신 것 아닙니까? ”
“음…….”
엘라콘어의 알파벳부터 열심히 다시 머릿속으로 되뇌는데, 요나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분주히 제 할 일을 하던 하녀들도 도대체 대공이 어디에 나를 초대했는지가 궁금했는지 힐끔거렸다. 나 역시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 어떤 곳에 나를 초대한다 할지라도 웃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를 못했기 때문이다.
‘파티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
그것도 아드리엔을 위한 100일간의 장례 기간에 도대체 무슨 파티를 연다고? 티파티? 노에비안이 길쭉한 손으로 장난감 같은 티파티 세트를 만지는 상상을 하자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가 티파티 초대장을 보낸 거라면 그래, 이렇게 웃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느리게, 그리고 조용히 초대장에 손을 뻗었다. 하녀들이 점점 지쳐서 메인홀을 하나둘씩 벗어날 즈음이었다. 내용은 기가 막혔다. 「대공비 아드리엔 스완 트로비카의 탄신연에 초대합니다.」 정확히 첫 시작이 그러했다. 그것도 노에비안이 직접 쓴 글씨체였다.
“미쳤어.”
“왜 그러세요, 마님?”
열심히 창틀을 닦던 요나가 다가오려 하자, 내가 손을 올려 그것을 저지했다. 지금 누가 누구의 탄신연을 연다는 것인가? 나는 설마 노에비안이 이름을 잘못 쓴 게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차분히 초대장을 읽었다. 「북부 트로비카 영지의 어머니였던 고 아드리엔 스완 트로비카 대공비를 위한 행사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본디 오늘 같은 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들만 보았어야 할 대공비는 이제 주신의 곁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겠지만, 그녀를 그리워하는 남은 자들은 남은 장례 기간 동안 그녀의 업적을 기리고 추억하며 기억하는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부디 빠짐없이 참석하시어 트로비카 대공비를 추억해주십시오.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그녀를 위하여.」 읽을수록 개소리가 따로 없었다. 지금 노에비안은 ‘유령을 위한 생일파티’를 하겠다며 초대장을 돌린 것이다. 초대장의 가장 상단에, 「대공비 아드리엔 스완 트로비카의 탄신연에 초대합니다.」는 노에비안의 글씨였고, 그 밑에 줄줄이 쓰인 개소리는 집사의 글씨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가신인 아카시아 백작가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행사가 대공저에서의 행사인 것을 뻔히 알고 있을 테다. 이 말도 안 되는 유령을 위한 생일파티는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법이고. 다시 한번, 낯설기 그지없다. 그가 이렇게나 이벤트를 좋아하는 남자였던가? 그는 변화를 싫어하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딱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건수가 아니냔 말이다.
‘애처가였던 트로비카 대공이, 아내의 죽음에 반쯤 미쳐 유령을 위한 생일파티를 한다더라.’
따위의 먹이를 사교계에 던지는 것이다. 도대체 왜? 정말 아드리엔을 사랑해서? 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
“후후-.”
나는 소리 내 낮게 웃었다. 승전기념식 날, 테라스에서 똑똑히 말했었지. 아드리엔을 사랑한다고. 그러고는 블리에를 원한다고. 직접 초대까지 했는데 가지 않을 수는 없다. 게다가 아카시아 백작은 다시 노에비안의 명령으로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었고. 대신 보낼 늙은이조차 없으니 꼼짝없이 내가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노에비안의 얼굴을 마주하고 확인해야겠지. 이 미친 짓거리가 ‘아드리엔’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블리에’를 끌어들여 뭔가 하려는 것인지. 어쨌든 그를 한 방 먹일 계획 중인 나는, 착실히 그의 초대에 응해 비위를 좀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치장을 하면서도. 나는 애써 씩씩했던 아침과는 달리 어쩐지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
“마님, 마차 준비가 되었답니다. ”
나는 그 소리에 얼른 다시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아마도 노에비안이 알고 있던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 그 자체일 것이다. 관능적으로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적당히 짙은 눈화장. 생기 있는 입술과 장밋빛 뺨. 유령을 위한 것이라도 파티는 파티인지 노에비안이 붉은색 화려한 드레스를 보내왔기에 입었다. 과거의 나라면 잘 입지도 않았을, 그리고 병중이라 입어볼 생각도 못 했을 외출복이었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줄 알았더라면, 한 번쯤은 입어볼 걸 그랬어.”
“예?”
요나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나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마차로 향하는 내내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노에비안에 대한 원망은 둘째치고, 그가 왜 나와 똑같은 얼굴의 블리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원인을 찾고 찾다 보니 결국엔 전부 내게로 화살이 돌아왔다.
‘조금만 건강했더라면.’
건강한 몸으로 외출도 자주 하고, 최신 유행에도 밝았더라면. 귀부인들과 어울리며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도 공유하고. 블리에가 자신의 매력을 잘 알았던 것처럼. 같은 얼굴을 가진 나도 언젠가는 지금의 블리에와 같은 스타일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고전적이고 우아한 멋만 중요시하면서 아프다는 이유로 잠옷만 입고 누워 있던 병든 아드리엔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런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 나는 멍하니 파티장 입구에 서 있었다.
“제, 제가 숄이라도 하나 구해올게요. 마님!”
아드리엔의 생일파티라던 파티장은 아주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 누구도 내 붉은 드레스처럼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내게 닿는 시선이 너무나도 따가웠다. 대공저 메인홀 한구석에 놓인 화환들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드리엔 스완 트로비카 대공비의 회고연을 기념하며.'라고. 회고연. 누군가를 회고하며 여는 연회. 그러니 다들 검은 옷을 입고 손에 성경책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파티홀 구석 어딘가를 찾아 서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다리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이런.”
“!”
“내 충성스러운 가신, 아카시아 백작의 부인께서 오셨는데 누구도 대접하지 않았군요.”
익숙한 목소리. 비꼬는 게 분명한 낯선 말투. 노에비안이었다.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추러 온 것을 상기하며 이미 내 팔목을 지긋이 잡은 그를 향해 속삭였다.
“……이런 자리인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왜 이런 옷을…….”
“그럼.”
그가 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에서 속닥이는 사람들을 향해 들으라는 듯 말했다.
“부인께서 수도 사교계에 익숙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내 아내의 드레스룸에서 덮을 것을 드리지요. 거기서 선물도 함께 드리면 되겠군요.”
누군가를 추억하고 기억하는 이런 파티에서는, 호스트가 그 사람을 추억할만한 물건들을 손님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우선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고자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집사.”
“예, 전하!”
“우선, 아카시아 백작 부인부터 신경 써드리지.”
“예!”
집사가 빙긋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나는 아까부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를 골탕 먹인 노에비안은 물론이고, 이 대공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말없이 학대당하던 영혼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게 팔을 내민 사람은,
“가실까요, 부인?”
지난 2년간 하녀들의 무례에도 침묵하고 방관하던 바로 그 집사 가스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