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당신을 원해2021.08.04.
어안이 벙벙해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곤란하다 거절하면서도 어찌 되었건 블리에를 곁에 두려는 노에비안을 보자 속이 마구잡이로 뒤틀렸다.
“그것도 좋지만…….”
“…….”
“사람들이 그러는데, 곧 황태자 전하의 탄신연이라던데요.”
내가 화를 식히려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룸과 연결된 응접실로 향하며 말했다. 식사가 끝나면 소파에 모여앉아 티타임이나 술 한잔을 기울이는 용도의 응접실이었다. 어둑해진 바깥을 내려다보며 나는 창문으로 비치는 그를 보았다. 어느새 따라온 노에비안이 내게 바짝 다가선다. 그가 더 말해보라는 듯 역시나 창문으로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수도 귀족들이라면 다 참석 해야하는 행사라던데…….”
크고 따듯한 손바닥이 내 어깨를 감싼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응접실은 텅 비어 있었고, 충성스러운 짐스커가 주변 복도에도 사람들을 다 물린 것이 분명한 듯 조용했다.
“언제까지 저를 숨겨두실 참이에요?”
“당신…….”
“당신의 파트너로 가고 싶어요. 아카시아 백작 말고요.”
“그건 안 돼.”
“왜죠?”
노에비안은 설명하기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또 낯선 모습. 아드리엔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던 표정.
“아내의 장례도 끝마치지 않은 황족이, 가신의 부인과 파트너로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라?”
“백작은 심약해 무도회에서 춤 한번은커녕 서 있지도 못했어요. 말 그대로 ‘대공비 전하’께서 안 계시니 파트너 없는 가신의 아내 중 하나와 참석하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가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럼 다른 이와 함께 참여해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 거죠?”
나는 슬슬 노에비안을 긁어놓기로 작정했다.
‘내가 당신을 돕는 것은, 아드리엔의 시신을 확인하는 날까지입니다. 나 역시 아드리엔을 두고 당신을 만난 대공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고, 또 분노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은 당신을 돕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죽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도울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를 이용하세요.’
‘도울 수 있는 날까지는, 나 역시 적극 협조할 테니까.’
‘트로비카 대공을 섣불리 건들지 말길. 확실하게 무너뜨릴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는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찼던 그 날, 내 손을 치료해주던 로아드네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태자의 탄신연이라면 그 동생인 로아드네스 역시 참석할 테지. 자신을 이용하라 했으니 그의 파트너로 참석한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것이고.
‘사이가 안 좋은 2황자와 자신의 정부가 파트너로서 참여한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떨까?’
나는 노에비안이 무엇에 절망하는지 알고 싶었다. 우선은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던 블리에가 다른 남자가 생겼을 때,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노에비안을 죽이는 건 그 이후로 해둘까. 그가 쉽게 죽어버리면 내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 뭐?”
그는 기가 찬다는 듯 어깨를 쓸어내리던 손을 멈추고 내 몸을 거칠게 돌려세웠다. 짙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이리 어여쁜 옷을 사주시면 무얼 해요? 달고 다니는 사내가 변변치 않은데.”
정확히 아카시아 백작을 저격하는 말이었다. 노에비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제가 그날 잘못 들었나요?”
“…….”
“단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아드리엔. 앞으로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아드리엔보다…….”
“……그만.”
“당신을 원해.”
나는 아드리엔의 얼굴을 하고 그에게 속삭였다. 노에비안의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당신을 원한다고요, 내가.”
그가 그만하라고 한 것은 자신이 이전에 한 말이지, 지금 이 블리에가 하는 말이 아니다.
“안 될까요?”
“블리에…….”
블리에라면 아드리엔의 자리를 밀어내고 온전히 이 남자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주제도 모르고 대공비가 되고 싶다는 말이나 지껄였겠지. 그토록 주목받기 좋아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여자가 무도회에서 노에비안이라는 최고의 장식품을 달고 싶지 않을 리가 없다. 애초에 그런 이유로 그를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내 어깨를 쥐고 있던 노에비안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그만큼 내 마음도 바람 앞의 촛불이 되었다. 블리에의 눈으로 보는 노에비안은 이다지도 새롭다. 2년을 부부로 살았어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을 이 여자한테는 잘도 내비친다.
“……이번엔 힘들겠군. 하지만 곧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지. 백작도 수도에 없으니 몸이 안 좋다하고 쉬는 게 좋겠어.”
그리고 곧 익숙한 품에 끌어안겼다. 아, 익숙한 향기. 익숙한 가슴. 몸이 터져라 끌어안는 강인한 팔. 내 가슴은 블리에의 일기를 읽은 이후 계속,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르는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 다음날. 로아드네스와 나는 언제나 그랬듯 「레스토란테 젠디카」의 내부에 앉아 공부 중이었다. 물론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얇은 시폰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뒤뜰을 향해 있었는데, 오늘처럼 평소보다 일찍 만나는 날이면, 햇살이 꼭 로아드네스를 향해 비추는 조명처럼 그에게 닿았다. 반짝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금빛 먼지가 부유하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그의 굵은 목울대와 작은 의자에 겨우 앉은 삐딱한 자세, 그리고 그런 자세와는 달리 손에 꽤 번듯하게 잡고 있는 깃펜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 깃펜이 어린아이의 것처럼 보일 만큼 큰 손은 살짝 그을렸지만, 마디가 굵고 길쭉해서 예뻤다. 내가 써온 작문 숙제를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뭔가를 사각거리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배운 대로 잘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노에비안 외에 내가 쓴 글을 개인적으로 보여주는 건 처음이라 부끄러웠다. 결국 묘하게 무거워지는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명화 속 한 장면처럼 멈춰 있는 로아드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도 참석하시나요?”
누군가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란 로아드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금빛 먼지 속에 붉은 등이 켜진 것 같은 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나를 훑다가 빠르게 내 과제로 향했다.
“……어디를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의 탄신연이요.”
“……아마도.”
작문을 그리 못했나. 그의 굳어진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형님이신데 ‘아마도’요?”
“그보다, 작문 말고 다른 과제도 줬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대화하기 싫은 주제인 듯, 로아드네스가 말을 돌렸다.
“물론 다 했어요. 지금 보고 계신 책 밑에 있어요. 그보다, 탄신연에 참석하시나요, 아닌가요? 확실하게 말씀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음…….”
“저는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트로비카 대공과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려고요.”
“그가 요청한 겁니까?”
얌전하던 잘난 미간이 살짝 비틀리자 내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굳은 얼굴을 피하고 싶었지만 화난 얼굴을 마주하고픈 건 아니었다.
“아니요! 제가 사교계에 그와 함께 얼굴을 내비치는 게 훗날 도움이 될 것 같아 요청했어요. 아직 허락이 떨어지진 않았지만요.”
“나는 그다지 참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아드네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린다. 난감함? 경멸? 묘한 표정을 짓던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열이 오르는 눈으로 낮은 한숨을 내쉰다.
“나는 대공과 아드리엔이 결혼한 후, 무도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처음 알았다. 생각해보니, 그가 황태자의 동복형제인 것 치고 무도회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이도 아니었던 것 같고. 애초에 ‘베일에 싸여 있는 황자’라고 가십지에서 떠들 만큼 행사에도 잘 얼굴을 내비치지 않긴 했지.
“덕분에 대공과 함께 파티홀에 입장하는 아드리엔을 볼 수 없었습니다.”
“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전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눈을 흐리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니, 이만하겠습니다.”
이윽고 그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니. 늘 설렁설렁 대충하는 듯하면서도 정직하게 수업만 하던 그가 하는 말 치고는 꽤 감정적이었다.
“그게…… 대공과 제 참석 여부와 무슨 관계인가요?”
“……당신과 대공. 두 사람이 파티홀에 함께 있는 것 역시, 그것은 그것대로 불쾌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그가 가지고 있던 교재를 테이블 위에 탁! 놓고, 살짝 쥐고 있던 깃펜까지 그 위에 올려놓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붉은 눈이 자신이 내려놓은 것들을 향했다.
“아드리엔이 그 꼴을 보면 어땠을까.”
“!”
“아드리엔이 살아 그 꼴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슬퍼하고 분노했을까 생각만 하면…….”
그는 곧이어 온갖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로아드네스는 가끔 내게서 본래의 ‘아드리엔’을 본다. 그리 무섭다고 소문난 사람이 내게 정중한 척이라도 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겠지. 그리고 동시에 블리에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분노한다. 승전기념식 날, 노에비안과 내 밀회를 보고 경멸하던 그 얼굴이 가끔씩 튀어나오곤 했으니까. 다시 꽉 쥔 펜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 악다문 이와 떨리는 턱이 그것을 말해준다.
“……아드리엔이 그 꼴을 본다면 충격에 쓰러지고 말 겁니다.”
나는 조용히 분노하며 내 표정을 샅샅이 살피는 그의 기세에 굳어 있다가 곧 소리 없이 콧방귀를 꼈다.
‘그래. 며칠 전의 나라면 분명 그랬겠지.’
이 빌어먹을 블리에가 내게 불쌍하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노에비안이 내 죽음에 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만 없었다면. 지금도 분명히 슬프고 아프다. 하지만 그것을 덮어버릴 만큼 활활 타오르는 이 불은 분노였다.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의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내게 죽음을 선사한 것에 대한 분노. 그가 나를 칼로 찌른 것도, 직접 독약을 입에 처넣은 것도 아니다. 뭘 어떻게 해서 내 죽음에 일조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내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나의 죽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티끌만큼이라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내가 아내를 잃으면, 네가 온전히 내 정부가 된다고 했잖아.’
“……어디 아픕니까?”
“아니요.”
오히려 늘 조금씩 아파 보이던 것은 눈앞의 이 아름다운 황자였다.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머금고 업무를 하듯 나를 가르치고, 동시에 감시하던 것도. 방금까지 묘한 분위기였던 로아드네스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질문하자 내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나 보다. 나는 내려가 있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렸다. 무뎌진 줄 알았는데, 그 고통을 잠시 잊고 온통 죽이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그와 함께했던 몇 년간의 추억과 행복이 문득문득 튀어 올라 하루에도 수천 번씩 심장을 때려댔다.
“……저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요.”
“…….”
나는 쓰디쓴 눈물을 삼키고 내게 그보다 더 쓴소리를 해줄 것 같은 로아드네스에게 한탄했다.
“……바보인 것 치고는, 엘라콘어가 많이 늘었습니다. ”
하지만 로아드네스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평정을 찾고 반쯤 맞은 받아쓰기 시험지를 내게 내밀었다. 틀린 것은 죽죽 그을 법도 한데 예쁘게 별까지 그려 놓았다.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해보라는 뜻이라며 언젠가 말했던 표시다. 다정하기도 하지.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그가 굳은 표정과는 달리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제 나는 저게 진짜 정중함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블리에 아카시아는 그에게도 혼란스러운 존재이다. 나는 낮게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왜 제게 묻지 않으세요?”
“……뭘 말입니까?”
“어떻게 대공비 전하와 이렇게나 닮았는지. 대공과는 어찌 만났는지. 전하의 도움으로 이혼하고 나면 뭘 하고 살 건지 같은 것들이요.”
“…….”
잠시간, 파문이 이는 눈을 하던 로아드네스가 한참 굳어 있다가 피식 웃는다. 한낮이지만, 별이 부서지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는 내게 대답하는 듯했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부인은 아드리엔이 아닌데요.”
그는 나를 관찰하듯 지그시 응시하며 그리 말했다. 만날 때부터 조용히 타고 있던 붉은 눈은 끓고 있는 용암을 그대로 굳힌 것 같았다.
“……아드리엔이 왜 좋으세요?”
아드리엔 이야기만 하면 이 얼음벽 같은 남자의 완벽하고 오만한 얼굴에 실금이 갔다.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그는 내가 아드리엔을 부른 것도 잊은 듯 굳어 있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남편조차 죽은 나보다 블리에의 기분을 더 신경쓰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나보다 더 바보 같은 이 황자의 마음이 너무 궁금해서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굳이 찾자면요? 아드리엔이야 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사람인데. 기껏 입학한 아카데미를 졸업하지도 못했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누워서 약만 축내고…….”
“……그녀가 당신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했다던데요. 밥 먹는 것, 차 마시는 것, 심지어 그냥 서 있는 것도 무언가를 짚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수업은 이만하겠습니다.”
내내 굳어 있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이제 진심으로 화가 나 보였다. 아드리엔이 뭐라고. 아드리엔은 당신의 존재조차 몰랐는데 저렇게 저가 욕먹은 것처럼 반응할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당신을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화를 내려다 가까스로 삼킨 듯한 목에 굵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기이할 만큼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가 내게 화살처럼 쏘아져 꽂혀 들었다.
“아드리엔은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현명하고, 사려 깊으며,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잘못 알고 계시네요.”
“아니, 내가 맞습니다.”
저가 무엇이나 안다고 저리 확신할까.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들인데.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일지도 모르지.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수업 진행은 물론이고 앞으로 당신과 함께하지 않겠습니다.”
“……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로아드네스의 완벽하게 조각된 얼굴엔 자비가 없었다.
“아드리엔을 모욕하는 사람과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
기가 찬다. 그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아도 내 말이 맞다 맞장구칠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개인적인 감상이 아닌, ‘사실’이니까. 본인인 내가 보증하는, 가장 진실된 사실이니까.
“방금 한 말. 취소하십시오.”
아주 가끔, 그리운 빛을 띠기도 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꽁꽁 얼어붙었다. 나는 분명히 이 사람과 싸우고 있는데. 쏘아붙여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겠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이미 죽은 사람일 뿐인데,
“……안 합니까?”
드물게 고압적인 목소리. 형형하게 빛나는 눈은 군림하는 자 그 자체의 눈이다.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는 먹잇감에게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듯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해요.”
하지만 무섭다기보단 나는 어쩐지 코끝이 찡해져 떨리는 손으로 코를 매만졌다. 그리하지 않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잠시 발톱을 숨긴 맹수 같은 이 남자는 눈앞의 블리에보다 이미 없는 아드리엔을 생각한다.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아드리엔.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아드리엔을.
“……해요, 취소.”
그리고 동시에 내 마음이 자꾸 이상해진다. 아드리엔와 노에비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 제 형님의 탄신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 남자의 말이 가슴속을 계속 갉작이고 있었다. 블리에와 노에비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아드리엔이 슬플 것이라 말해주는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내겐 그 어떤 말보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갉작이는 느낌이 온몸을 휩쓸었을 때쯤에는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취소할 테니…… 그럼 전하께서 탄신연에 함께 가 주실래요?”
그를 만나기 전부터 계획했던 말이긴 했지만, 말을 내뱉는 내 마음의 울렁거림은 전혀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