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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수상하고 발칙한 여자 (28/171)

28. 수상하고 발칙한 여자2021.08.07.

오늘은 수도 곳곳에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벼락을 내리칠 것만 같은 불길한 하늘. 오전인지 오후인지 모를 위태로운 하늘은 마치 로아드네스 자신의 마음과도 같았다.  

16558452534874.png‘아드리엔이 왜 좋으세요?’

  아드리엔과 똑같은 눈으로, 그러나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하던 블리에를 떠올리자 두통이 찾아왔다. 두통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로아드네스는 수도로 온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리 기절하듯 잠들지 않으면 하루의 대부분을 미친 상태로 깨어 있었다. 로아드네스는 너저분한 집무실 책상에서 유일하게 반듯하게 놓인 편지지들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보았다. 「네 덕분에 처음으로 엘라콘어 시험에서 낙제를 면했어, 안.」 「저번에 말해준 약을 먹어보았는데, 숨쉬기가 꽤 편했어. 고마워 안.」 「비앙카가 그러던데, 아버지가 나를 황태자 전하와 맺어주고 싶어 하신대. 너는 로열 아카데미에 다니니 그분을 뵌 적이 있겠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서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암살 위험 때문에 로열 아카데미는 친구도 제대로 사귈 수 없겠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수업을 듣고 논다니……. 아, 물론 우리는 다르지. 난 너를 정말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 「오늘은 수업을 듣다가 쓰러질 것 같아서 회복실에서 몇 시간이나 있었어. 근래 몸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소피아가 나 같은 약골은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거래. 정말 그럴까?」 「바보 같은 소리만 해서 미안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말, 듣기 싫어. 이번에 내어준 과제도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 네게 꼭 내가 A+ 받는 걸 보여주고 싶어. 그럼 너도 아카데미 생활이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꿈이 없다고 했잖아 안. 내 생각에 너는 선생님을 하면 좋을 것 같아. 어때?」  

16558452534874.png‘아드리엔이야 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사람인데. 기껏 입학한 아카데미를 졸업하지도 못했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 누워서 약만 축내고…….’

  그 여자는 아드리엔이 아니다. 로아드네스는 블리에 아카시아의 필체를 애써 외면하며 그리 생각했다. 아드리엔은 다른 사람을, 특히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우려 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지. 노에비안의 정부에게서 문득문득 아드리엔을 볼 때마다 그는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아드리엔이 정말로 죽었다면…… 정말 이 세상에 없는 것이라면 더더욱 착각해선 안 된다. 아드리엔에 대한 예의도, 그 정부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다.

16558452534885.png‘노에비안의 정부에 대한 예의라.’

스스로 떠올린 예의라는 말에 로아드네스는 자조하듯 웃었다. 그리고 곧 품에서 네이비색 깃펜을 꺼냈다. 하도 어루만져 살짝 닳아 있었지만, 아직 새것 같았다. 로열 아카데미와 아카데미 사이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처음 아드리엔을 만났을 때 그녀가 두고 갔던 깃펜. 돌려주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품고 있던 하찮고 소중한 것. 마치 제 마음 같지 않은가. 아드리엔이 버리고 다시 찾지도 않는 것이. 딱……. 똑똑-.

1655845253489.jpg“전하!”

16558452534885.png“…….”

로아드네스가 대답하지 않는 것에 익숙한 닐이 서류 더미 하나를 들고 술 냄새와 시가 냄새가 섞인 집무실로 들어섰다. 로아드네스가 일그러지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닐이 못 본 척 다가와 조심스레 서류 더미를 올려놓았다.

1655845253489.jpg“황제 폐하께서 본궁으로 드시라는 전언을 또 보내셨습니다.”

16558452534885.png“……당분간 어떤 임무도 맡고 싶지 않다 했을 텐데.”

1655845253489.jpg“전하께서는 제게 그리 툭 던지듯 말씀하시면 끝이지만, 이쪽에서는 육하원칙에 따라 황제 폐하께 서면으로 그 이유를 제출해야 한단 말입니다.”

16558452534885.png“……닐, 네 놈 혓바닥이 언제부터 그리 길었지?”

흐린 날 어두운 집무실에서 번쩍이는 붉은 눈이 경고등처럼 느리게 깜빡였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정강이를 걷어차고, 머리를 박으라 명할 것만 같았다. 닐은 그 시선을 외면하고 눈동자를 허공의 어딘가로 보냈다.

1655845253489.jpg“제 혓바닥은 원래 길었지만, 전하께서 자꾸 닥치라 하시니 짧은 척한 것뿐입니다.”

16558452534885.png“전장이 아니라고 요즘 네 놈 정신이 해이해졌지.”

합. 닐이 입을 꾹 말아 물고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황제의 명령을 못 들은 척할 수는 없다. 그동안의 전공이 아니었다면 로아드네스가 황제에게 이만큼 뻗댈 수 있는 것도 기적이었으니까.

1655845253489.jpg“황명이라십니다.”

곧이어 닐이 서류 더미 가장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아드리엔의 편지지 위에 올렸다. 그것을 집어 든 로아드네스의 눈이 느릿하게 종이 위를 훑었다. 대충 훑어보는 눈은 무감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1655845253489.jpg“제 생각에는 이번에 그 사건 때문에 부르신 것 같습니다.”

16558452534885.png“똑바로 알아듣게 말해라.”

1655845253489.jpg“쿠로세다 남작 부인 실종사건 말입니다.”

16558452534885.png“누구지?”

닐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무심한 로아드네스에게 다가와 몸을 낮춘다.

16558452534885.png“……너무 가까이 붙지 마라.”

1655845253489.jpg“황제 폐하의 정부요.”

16558452534885.png“!”

낮게 속삭이고 물러나는 닐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로아드네스는 약간의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그리고 곧 눌러두었던 일그러진 표정이 떠오르고 잘난 미간이 구겨진다.

16558452534885.png“……황실의 수치로군.”

1655845253489.jpg“전하!”

16558452534885.png“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새로운 황후를 세우셨는데 어째서 남의 아내를 탐하는 거지? 이 나라는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군.”

탕아라 불리는 개황자의 관능적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바른 말이라. 창백해진 로아드네스의 얼굴을 낯설게 응시하던 닐이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1655845253489.jpg“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부인이 지금 수도 한복판에서 실종됐다니까요!”

16558452534885.png“…….”

로아드네스는 더러운 오물을 집은 것처럼 종잇장을 집어서 닐의 앞에 던지듯 놓았다.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팔랑이던 종이가 발치에 떨어지자 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1655845253489.jpg“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전하께서 도통 그쪽으로 관심도 없으시고 변방에서 귀를 닫으신 탓에 이리 늦게 아신 거고요.”

16558452534885.png“주변 사람들은 안 말리고 뭘 하고 자빠져 있었는지 모르겠군.”

1655845253489.jpg“황제 폐하의 주변에 누가 계시다고요? 황태자 전하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그분이야말로 새로운 황후 폐하를 추천한 당사자이자, 황제께서 원하시면 좋든 싫든 방금 막 혼인한 새색시도 정부로 가져다 바치실 분이시니. 닐이 론타의 성자라 불리며 황제에게 복종하는 황태자의 선한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황태자가 그 유순한 얼굴로 황제와 말다툼을 하는 건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1655845253489.jpg“황제께서 이번 황태자 전하의 탄신연에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다고 하셨으니 싫은 티도 내지 마시고요.”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1655845253489.jpg“아무튼 황제 폐하께서 이런 쪽으로 믿고 맡기실 만한 분이 전하뿐이니, 싫으셔도 어떻게든 불려가실 겁니다.”

16558452534885.png“…….”

1655845253489.jpg“……흠, 흠! 그 깃펜은 매번 혼자 있으실 때 꺼내 보던 것 아닙니까? 여인이 준 것입니까? 사내가 준 것을 전장에서도 그리 들여다보신 거면 좀 소름 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더 어두워지는 로아드네스의 표정에 닐이 눈치껏 까불었다.

16558452534885.png“……잡소리 말고 꺼져라.”

1655845253489.jpg“안 그래도 나갑니다.”

닐은 배짱 좋게 중얼거렸지만, 곧 쏜살같이 그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정강이를 걷어차이기는 싫었다. 로아드네스는 집무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닐이 가져왔던 서류 더미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촤라락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종이 더미를 원수처럼 쏘아본 로아드네스가 이를 악물었다.

16558452534885.png“정부?”

16558452534874.png‘저는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정부예요.’

  또. 또다시 그 여자의 말이 떠오른다. 그 여자가 아드리엔이라면, 그렇게 당당히 말하지 않았겠지. 그렇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이 아드리엔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라고 하지 못할 테지. 노에비안 트로비카와 무도회에 참여한다고 태연히 말하지도 않을 테고. 얼굴이 그토록 닮았으니. 필체라고 못 닮을 이유가 있나. 닮고자 하면 일부러라도 그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아드네스는 별안간 치솟는 분노의 눈으로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아드리엔의 깃펜을 내려다보았다. 블리에 아카시아. 아드리엔은 그 정부의 존재를 알았을까? 그 여자가 아드리엔의 죽음에 단 하나라도 관여한 바가 있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베어내리라. 로아드네스의 길쭉하게 잘 빠진 목에 힘이 들어가고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아버지의 정부. 노에비안의 정부. 정부. 정부. 빌어먹을 정부. 정부를 가진 부황과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둘 다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16558452534874.png‘……그럼 전하께서 탄신연에 함께 가 주실래요?’

  발칙한 것. 아드리엔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상종도 안 했을 수상하고 발칙한 여자. 곁에 두고 감시해서 다시는 아드리엔을 모욕하지 못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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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탄신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도리스는 로아드네스를 찾아 드넓은 아틸차드 홀을 두리번거렸다. 첫사랑이었다. 아름다운 로아드네스와 혼인하게 해달라고 그토록 빌었으나 아버지 카스타냐 공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길한 황자.’ 같은 배에서 났어도 성자라 불리는 황태자 바르데날도와는 달리, 로아드네스는 그리 불렸다. 그는 좀 ‘특별한’ 케이스다. 황족이라면 모조리 가지고 있는 ‘사파이어 블루’색의 눈동자가 아닌 짐승의 피 같은 붉은 눈동자를 가졌다. 물론, 어린 날의 도리스는 그마저도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야만의 것과 비슷한 피의 색깔은 로아드네스의 눈에 있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인 빛깔로 도리스에 와 닿았다. 위험해서 더 갖고 싶은 아름다움이었다.

16558452627202.jpg“숙부, 이번에 부황께서 로안에게 중책을 맡기셨다던데요.”

도리스의 충실한 팔 받침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바르데날도가 일찍부터 참석해 뒤를 지키고 선 노에비안에게 물었다.

16558452627206.png“예.”

16558452627202.jpg“전장을 나돌다가 이제야 수도로 와 이 형님과 좋은 곳도 다니고 할 줄 알았더니, 또 귀찮은 일을 떠맡고…… 내가 부황께 말씀을 좀 드려봐야겠습니다.”

16558452627206.png“무엇을 말입니까?”

16558452627202.jpg“그 골치 아픈 일에서 빼달라고요. 로안은 이미 무수한 공적을 쌓았으니 자잘한 일에까지 차출될 필요가 있을까요?”

바르데날도는 멀찍이서 공손히 인사하는 귀족들을 향해 일일이 답하며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수도에서 일어난 부녀자 실종사건이 벌써 세 번째다. 처음에는 뒷골목에 사는 이름 없는 천한 여인이더니 그다음에는 선량한 삶을 살던 평민, 이번에는 귀족가의 귀부인까지. 귀부인의 실종에 귀족 사회 전체가 나서서 황제에게 사태 해결을 촉구했고, 결국 황제가 이번에 귀환한 2황자 로아드네스에게 사건을 조사하라 일렀다. 멀쩡히 활동하는 수도 경비대를 대신해 또다시 로아드네스를 향한 신뢰를 보낸 것이었다.

16558452627206.png“자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봐야 알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원하십니다.”

16558452627202.jpg“부황께서는 조금 더 중요한 일에 로안을 쓰실 필요가 있습니다.”

걱정이 어린 바르데날도의 얼굴을 살피던 것도 잠시, 이어 입장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울려퍼지는 시종의 목소리에 노에비안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1655845253489.jpg“로아드네스 2황자 전하와…… 아, 아카시아 백작 부인 입실!”

누가 들어서던 조용히 지켜만 보던 노에비안의 눈이 커지자 그에 집중하던 황태자와 도리스의 시선 역시 입구로 향했다. 잠깐이었지만 일대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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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황실의 문제아와, 화려한 미인의 등장에 모두가 입을 벌리고 그들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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