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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적을 부수려면 (29/171)

29. 적을 부수려면2021.08.11.

16558452735787.png“주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황태자 전하.”

16558452735791.jpg“와 주었구나! 게다가 파트너까지……!”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우의 곁에 선 미모의 부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16558452735795.png“주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황태자 전하. 아카시아 백작의 처 블리에 아카시아입니다.”

16558452735791.jpg“처음 보는 얼굴이로군요. 아카시아 백작이라면 대공가의 충실한 가신일 텐데 잘 오셨습니다. 대공께서 로아드네스를 위해 주선해준 파트너입니까?”

황태자는 유순하게 웃으며 노에비안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대공 노에비안의 눈은 드물게 아주 커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로아드네스의 곁에 선 귀부인을 응시하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16558452735803.png“……예. 부인은 아직 데뷔탕트를 전부 치르지 못했고 샤프롱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아카시아 백작도 지금 수도에는 올 수 없고요.”

16558452735806.jpg“어머, 그럼 백작 부인의 파트너는 2황자 전하이시고 샤프롱은 대공이 대신하는 건가요?”

도리스의 흥미로운 목소리에 노에비안이 목각 인형처럼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노에비안을 응시하던 로아드네스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터졌다. 데뷔탕트의 샤프롱을 구하지 못한 가신의 부인을 위해 파트너도 구해주고 본인이 샤프롱으로서 상 중에 나왔다는 말이다. 로아드네스의 반응까지 살뜰히 살피던 도리스는 작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 눈을 게슴츠레 좁혔다.

16558452735806.jpg‘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미 혼인한 여인이 뒤늦게 데뷔탕트를 치르는 일은 드물었으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성인으로 인정받았기에 샤프롱 따위는 굳이 필요치도 않은데. 숙부의 결정이라면 아무 의심 없이 덥석 미소부터 짓는 바르데날도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도리스가 제게도 고개를 숙이는 귀부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제국 전체에 세기의 로맨티스트라 불리는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아무리 사정이 가엾다 한들, 가신의 젊은 부인을 제 부인의 장례 중에 이리 챙겨주다니. 게다가 이런 파티에 좀처럼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로아드네스의 옆자리를 꿰차고서 시선을 받는 저 여자는……. ‘아드리엔 스완 피레타.’ 도리스의 지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계집애의 면상과 같은 얼굴이었다. *** 잘 깎여진 대리석 계단의 난간 위에, 흰 장갑을 끼고 손을 얹고 있던 도리스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첫 춤을 로아드네스와, 두 번째 춤은 기꺼이 댄스홀로 나선 황태자와 함께하는 꼴을 보는 중이었다. 아드리엔과 똑같은 얼굴로 바르데날도와 춤을 추고 로아드네스의 눈길을 받는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향해 격렬한 거부감이 일었다.

16558452735806.jpg“대공.”

16558452735803.png“예, 전하.”

16558452735806.jpg“백작 부인의 샤프롱이 없다면, 내가 직접 되어주죠.”

대답 없는 노에비안을 향해 도리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며 뒤를 돌았다. 여전히 자신의 파트너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로아드네스를 힐긋 보자 마음속에 불이 일었다.

16558452735806.jpg“어때요?”

16558452735803.png“감사하오나, 괜찮습니다.”

16558452735806.jpg“어째서요?”

16558452735803.png“백작 부인은 이미 기혼인 데다, 지난 승전기념식 때도 샤프롱 없이 잘 해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어이없어라. 그렇다면 어째서 굳이 아드리엔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저 부인의 샤프롱으로 참석했는가? ‘그’ 트로비카 대공이? 도리스가 억지로 웃음을 만들었다.

16558452735803.png“아카시아 백작의 부탁으로 샤프롱을 해줄 귀부인을 구하는 중입니다. 데뷔 시즌이 한창인지라 좀처럼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제가 왔지만. 바쁘신 비 전하께서 신경 쓰지 않도록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수도 없는 사람이 혓바닥이 참 길기도 하지. 도리스가 붉은 입술을 비틀어내며 눈을 반짝인다.

16558452735806.jpg“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죽은 트로비카 대공비와 백작 부인이 꽤나 닮은 듯한데요. 안 그래요, 로아드네스 님?”

댄스홀을 내려다보고 서 있던 로아드네스와 눈이 마주치자 도리스는 잠깐 심장을 부여잡고 말을 이었다.

16558452735806.jpg“물론, 대공비와 한자리에 있어 본 지 너무 오래되어 선명한 기억은 아니어도 저 부인이 이상하게 닮은 느낌이 나요. 안 그래요?”

16558452735787.png“잘 모르겠습니다. 여인들의 생김새란 게 거기서 거기가 아닙니까.”

로아드네스가 성의 없는 대답 후 다시 자신의 파트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리스의 시선이 이번에는 대공으로 향했다.

16558452735806.jpg“뭐, 우연의 일치이고 녹빛 눈동자가 드문 것도 아니니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군요.”

노에비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도리스는 반대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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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샤프롱의 자격으로 와 있다고 하자 흥미로워했다. 성별이 다른 샤프롱은 아주 드물었으니까. 정신없이 춤을 추던 나는 젊은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16558452796419.jpg"2황자 전하께서 요즘 뭔가 중요한 일을 맡으셨다 들었는데, 아세요?”

조용히 서서 노에비안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로아드네스의 이름이 나오자 귀가 쫑긋해졌다.

16558452796419.jpg“부인은 파트너로 오셨다면서 혹시 모르세요? 한동안 난리였는데. 쿠로세다 남작 부인이 실종되어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잖아요?”

16558452735795.png“쿠로세다 남작 부인이요?”

16558452796419.jpg“그, 왜…….”

귀부인 하나가 목소리를 조용히 낮추었다.

16558452796419.jpg“황제 폐하의 정부라고 소문이 났던, 부인이요.”

16558452735795.png“아!”

나는 정부라는 단어에 움찔했다. 다행히 쿠로세다 남작 부인의 실종사건에 대한 충격으로 로아드네스와 등장한 나로 쏟아지던 시선이 얼마간 분산되었다. 쿠로세다 남작 부인이라.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

16558452796419.jpg“수도에서 비슷한 일이 세 번이나 벌어져서, 지금 수도 경비대가 비상이래요.”

16558452735795.png“그런데 2황자 전하는 왜……?”

16558452796419.jpg“뭐, 그런 일은 2황자 전하께서 도맡아 하시니까.”

‘그런 일’이 정확히 무엇인데 로아드네스가 도맡아 한다는 걸까.

16558452735795.png“어째서요?”

순식간에 내게로 시선이 다시 집중되었다. 차분하게 나를 위아래로 훑던 귀부인 몇이 자비라도 베푸는 양 속닥인다.

16558452796419.jpg“황제 폐하의 골칫거리는 모조리 2황자 전하께서 해결하시니까요?”

16558452735795.png“그랬나요?”

16558452796419.jpg“부인은 수도 사교계에 익숙지 않으시다는 말이 맞나 보군요. 대공께서 사정사정하여 2황자 께서 부인의 파트너를 떠맡았다는 말도요.”

내가 입고 온 옷이나 걸치고 있는 것들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몇몇 귀부인들이 텃세를 부렸다. 하지만 아랫것들에게 과도한 텃세를 겪으며 힘들었던 내게는 간지럽지도 않은 분위기였다.

16558452796419.jpg“으흠. 뭐, 수도에서 계속 사교활동을 하시려면 똑똑히 기억하세요. 정식 샤프롱 없이 데뷔한 부인에게는 이마저도 고급 정보일 테니.”

16558452735795.png“무엇인데요?”

16558452796419.jpg“황제께서는 돌아가신 레티나 황후 폐하의 아드님들은 모두 사랑하시지만, 특히 2황자 전하를 귀애하세요. 문제아라 소문이 자자해도 전공을 세울 수 있는 이유이지요.”

16558452735795.png“황제께서는 왜 황태자 전하보다 2황자 전하를 총애하시는데요?”

16558452796419.jpg“레티나 황후 폐하를 아주 많이 닮으셨거든요. 레티나 황후 폐하의 초상이야, 이 황궁 이곳저곳에 걸려 있으니 한 번도 뵌 적이 없어도 잘 아시겠지요?”

주홍빛 머리카락의 귀부인은 내가 레티나 황후 폐하의 옷 끝자락 한번 본적이 없을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그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별다른 대답 없이 로아드네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무척 지루한 듯 무감각한 눈으로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은 불량해 보이기보다는 어딘가 위태로운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레티나 황후 폐하와 아주 많이 닮기는 했다. 그분께서도 반짝이는 금발을 틀어 올리고 계셨고 멀리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셨으니까. 그리고 순간 꽤 거리가 있는데도, 로아드네스의 눈과 내 눈이 정확하게 마주친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돌렸는데, 그 곁에 있던 황태자비 도리스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아뿔싸. 그녀는 아마도, 아드리엔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고위 귀족 중 하나일 텐데. 하지만 아까 인사를 했을 때는 아주 바뀌어버린 내 화장법이나 차림 때문인지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혹시 몰라서 더 짙은 화장을 하고 왔으니 못 알아볼 법도 했다. 그녀와 내가 마주한 건 노에비안과의 결혼식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도리스 카스타냐. 이제는 도리스 론타라 불리는 황태자비. 별스럽게 친하게 지내던 공녀도 아니었건만. 그녀의 얼굴은 기억에 남았다. 짙은 밤색 머리카락과 진녹색 눈동자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여인. 나는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그녀가 결혼식에서 아낌없는 축사를 나불대던 것을 기억했다. 도리스 카스타냐는 분명, 노에비안과 내 결혼을 퍽 반기는 것 같아 보였었다. *** 내가 그들에게 불려간 것은 그 후로 5번은 더 춤을 추고 난 후였다. 황태자 부부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드리엔과 닮은 얼굴을 봐서 놀란 얼굴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앞에서 재롱을 부릴 광대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16558452735795.png“다시 인사드립니다, 황태자비 전하. 아카시아 백작의 처, 블리에 아카시아입니다.”

16558452735806.jpg“그런 인사치레는 되었어요, 부인.”

황태자비는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보다 훨씬 상냥하고 다정한 얼굴을 내보인다. 그리고…….

16558452735806.jpg“샤프롱을 찾고 있다 들었는데, 맞나요?”

순간 당황한 내가 노에비안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이다.

16558452735795.png‘당신이 거부하지 못한 제안을 나더러 거절하라고?’

사실 이미 기혼의 부인이라 샤프롱이 큰 의미는 없다. 원래 샤프롱의 역할은 갓 성년이 된 귀족 영애의 뒤를 지키며 쓸데없는 염문을 방지하고 막아주기도 하면서 동시에 인맥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었으니까. 기혼의 부인에게는 적어도 쓸데없는 염문이 돌 가능성은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 볼 일 없는 블리에 ‘주제에’ 황태자비가 자비롭게 대해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것은 엄청난 무례이다. 도리스의 성격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매우 황송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다.

16558452735795.png“영광입니다, 전하. 하지만 전하께서 아주 바쁘실 텐데, 감히 제가 함께하여 전하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미묘한 대답에 도리스의 잘 정리된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노에비안은 조금 안심한 표정이었다.

16558452735806.jpg“물론, 공으로 해주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누가 해 달랬나. 도리스는 이상하게 내게 집착하고 있었다. 노에비안을 어떻게 엿 먹일지 머리를 굴리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황태자비까지 신경을 쓴다면 머리가 배로 아플 텐데. 나는 어찌 되었든 미소는 유지하고 있었다.

16558452735795.png“제게 원하시는 것이라도…….”

16558452735806.jpg“내가 마침 시녀가 필요한데 말이에요.”

16558452735803.png“비 전하.”

줄곧 꾹꾹 눌러 참는 듯하던 노에비안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터져 나왔다. 도리스는 아주 잠깐이지만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노에비안의 부름을 무시하고 내게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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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452735806.jpg“어때요?”

돌려 거절하리라 마음먹긴 했었지만, 생각해보면 블리에의 처지에 아주 감지덕지한 일이다. 세력도 재력도 별로인 데다 노에비안을 절망하게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밀하게 짜지도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덥석 받아들이자니 마음에 걸린다. 이제 곧 로아드네스의 동의를 받아 법원에 정식으로 이혼신청서를 제출하기만 하면 귀족의 신분이 아니게 되는 내 처지 때문이다. 황후가 될 도리스를 모시는 일을 하기에는 블리에의 원래 신분은 속된 말로 좀 심각하게 딸린다.

16558452735795.png‘하지만 그녀의 곁에 있다면 나도 로아드네스 말고 새로운 인맥을 얻을 수도 있고, 어쩌면 노에비안의 약점을 제대로 잡을 수도 있겠어.’

이혼을 잠깐 미루고, 도리스의 곁에 잠시라도 있을 수만 있다면……. 황태자비의 아버지인 카스타냐 공작과 노에비안은 사이가 그리 썩 좋진 않으니까 무슨 정보든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떨어진 로아드네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16558452735795.png“제가 몸이 약해 오래는 힘들 듯하오나, 더 귀한 댁의 귀부인을 들이시기 전에 잠깐이라면 영광된 자리를 받들겠나이다.”

적을 부수려면, 적의 적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법. 로아드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용기가 생긴 내가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인사를 했다. 도리스는 나를 아래위로 살피더니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자비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8452735806.jpg“이야기가 끝난 것 같군요.”

황태자비를 따라 싱긋 웃고 고개를 드는데, 노에비안이 내가 로아드네스와 입장했을 때 보다 더 섬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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