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당신은 제 남편이 아니잖아요2021.08.14.
“비.”
대공 노에비안이 멀찍이 떨어져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눈치를 살피던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조용해진 도리스를 불렀다. 제 아비인 카스타냐 공작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도리스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르데날도의 유순한 푸른 눈 가득 걱정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대공이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굳이 대공가 가신의 처를 시녀로 들이실 필요가 있습니까? 비께서 필요하다면 서부의 영애들이 줄을 설 텐데요.”
“저도 굳이 대공가의 사람을 제 곁에 두고 싶진 않답니다.”
새침하게 말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녹빛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나서는 게 싫으시면, 전하께서 움직여주셔야지요. 말씀드렸잖아요? 제 아버지를 섭섭하게 하지 말아달라고요.”
“…….”
“저기를 보세요, 전하.”
바르데날도가 도리스가 눈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카스타냐 공작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저리 웃고 계셔도 마음은 타들어 가실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딸은 결혼한 지 몇 년이 되도록 회임하지 못하고, 이 나라의 근본인 황태자 사위는 이런 자리에서 장인의 면도 세워주지 못하니까요.”
“비, 공작에 대한 공치사는 아까 건배사를 할 때 충분히 하지 않았습니까.”
“서쪽 카스타냐 영지에서 올해 가장 많은 세금이 들어왔다고 치하한 것이요? 저는 그게 그리 칭찬으로 들리지 않던걸요.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는 때에 가장 호의호식하는 가문이라는 말로 들리던걸요?”
“그런 뜻이 아님을 알지 않습니까, 비.”
“그럼 제가 그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하의 뒤에 트로비카 대공을 세워두시는 게 아니라 제 아버지를 세우셨어야지요.”
도리스가 나지막이 속삭이며 블리에 아카시아를 지켜보고 있는 노에비안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자꾸 전하의 뜻을 모르게 하시니, 별수 있나요. 제가 대공을 곁에 두어 전하의 뜻을 살필 순 없으니, 대공의 사람이라도 곁에 두는 수밖에요.”
도리스의 눈은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황태자비 도리스는 내게 따로 편지하겠다며 언질을 주었고, 나는 그곳을 벗어났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온 나는 황태자비에게 불려 갔다 온 뒤로 더 묘한 시선을 던지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꽤 잘 섞여 있었다. 아까 내게 로아드네스에 대해 알려주던 주홍빛 머리의 귀부인은 내가 황태자비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왔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지만 나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버렸다.
“잠깐 얘기 좀 하지.”
멀리 떨어져서 지켜만 보던 노에비안이 결국 잔뜩 굳은 얼굴로 귀부인들 사이에서 날 빼내 왔다. 그들의 묘한 시선을 견디면서까지 내게 뭐라 할 말이 있나 보다. 노에비안은 내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사람이 비교적 적은 3층으로 이끌었다. 몇몇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샴페인을 홀짝이거나 노부인 몇이 작은 테이블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것 말고는 시끄러운 파티장에서 그나마 조용하면서도 개방적인 곳이었다.
“……정말 미친 짓을 저질렀군.”
“뭐가요?”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몰라서 묻나? 오늘은 저택에서 쉬기로 한 것 아니었나?”
“저는 당신과 참석하고 싶다 했고, 다른 사람과 함께 가도 상관없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잖아요.”
“내가 기다려달라고 했잖아.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게다가…….”
노에비안은 끔찍한 악몽을 되새기는 듯한 표정으로 숨죽여 말했다.
“2황자와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은 거지? 아니, 도대체 2황자를 어떻게 파티에…….”
“……질투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이네요.”
나는 2황자와 내 관계를 캐묻기 시작하는 노에비안의 얼굴을 낯설고 흥미롭게 보았다.
“처음 봐요, 당신 그런 얼굴.”
정말이었다. 내 앞에서 언제나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남편은 지금 여기 없었다. 그게 정말이지 낯설고, 또 신기해서 자꾸 눈이 간다. 이게 노에비안의 진짜 모습일까?
“말 돌리지 마. 일부러 그런 거야? 날 화나게 하려고? 당신의 돌발 행동을 수습하느라 황태자 전하께 쓸데없는 거짓말까지 했어.”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저는 그리 도와주시지 않았어도 상관없었어요.”
“……뭐?”
노에비안의 얼굴이 약한 충격으로 물들자 나는 왠지 묵은 체증이 조금이나마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검푸른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다가 자신이야말로 낯설다는 얼굴로 나를 훑었다.
“아드리엔의 회고연 때…… 분명 2황자와 둘이 마차를 타고 돌아갔었지.”
그리고 돌연 번뜩이기 시작하는 푸른 눈에 이유 모를 배신감과 분노가 차올랐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서 있었다.
“블리에, 당신 설마 2황자에게 마음이…….”
“그럴 리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인데.”
나는 펄떡이기 시작하는 심장을 잘 갈무리하고 다정하게 웃었다. 입에서 잘도 그런 말이 나왔다.
“……그건 그렇고. 황태자비의 시녀 건 말인데…… 왜 상의도 없이 일을 혼자 저지르지?”
그는 아까보다는 조금 누그러든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노기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잇새를 짓씹었다.
“제가 왜 당신과 그런 일을 상의하겠어요?”
“……뭐라고?”
“제 남편은 아카시아 백작이잖아요.”
약간 반항적인 내 반응에, 그의 얼굴은 이제 진심으로 화나 보였다. 내가 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면서도 차마 보는 눈들이 있는 곳에서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턱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해줬는데 참 새삼스럽기도 하지. 잠시 주위를 살피던 노에비안이 결국 내 팔목을 잡아끌어 아주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나에 대한 아무런 배려도 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가서 날 구석에 몰아세운 노에비안은 어둠 속에서 시퍼런 칼처럼 눈을 빛내고 섰다.
“……다시 말해봐.”
“당신은 제 남편이 아니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카시아 백작이었다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했을 것 같아 그리했어요. 제게도 전하 말고 다른 친구가 필요해요.”
“하, 친구?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황태자비는 친구가 아니야.”
노에비안이 여전히 눈을 빛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내 팔목을 움켜쥔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뭐가 다르죠? 우리 사이를 알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썩 존중받지 못하는 처지가 될 텐데. 황실의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를까요?”
“블리에!”
“다들 저를 경멸해요. 전하의 저택에서도, 백작의 저택에서도 아닌 척하지만 다들 제가 정부라는 이유만으로 천하고 방탕하다 생각한다고요! ”
손목을 뿌리치며 낮게 소리친 내용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백작저의 하녀 몇몇은 나를 진심으로 따랐고 몇몇은 내가 정말 노에비안의 정부여서 함께 대공저로 들어가길 바랐다. 대공저의 몹쓸 것들도 내가 건강한 몸인 이상 절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노에비안은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듯, 할 말을 잃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 밑의 그늘은 여전했다. 나는 그것이 아주 못마땅했다.
‘원하던 대로 내가 죽어줬으면, 얼른 이 블리에를 데려다가 대공저에 데려다 놓고 나 대신 호강이나 시켜줄 것이지. 뭐하러 질질 끄는 거야. 괴로운 척, 슬픈척하며 온갖 사람들의 동정을 사고. 블리에에게도 아드리엔에게도 혼란밖에는 주지 않고.’
이제 화를 내는 사람은 나였다. 노에비안은 나의 불만을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비와는 엮이지 마.”
시큰거리는 손목을 잡으며 상처받은 듯 말하는 내 얼굴을 보자 조금 누그러든 듯한 목소리였다.
“다들 당신이 황태자파의 수장이라 하던데요?”
“…….”
“황태자비와 친하게 지내 나쁠 것 없잖아요. 돕겠다잖아요.”
“……그녀와는 엮이지 않는 게 좋아.”
그는 한 손으로 느리게 마른세수를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부의 경거망동에 꽤 골치가 아픈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도리어 웃었다.
“저도 그다지 엮이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지고하신 황태자비 전하의 제안을 거절하겠어요?”
“…….”
노에비안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저 눈.’
곤란한 표정 속에, 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내 눈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가 내 눈만 바라볼 때마다 나는 심장을 후려치는 격통을 느껴야만 했다.
‘……당신은 내 눈에서 누구를 보고 있어?’
아드리엔을 떠올리기는 하는 건지. 그새 다 잊고 똑같은 눈을 한 이 여자를 안을 만큼 당신은 이제 아무렇지 않은지. 당신이 정말로 이 여자와 짜고 나를 죽였는지 소리쳐 묻고 싶은 것을 입술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참았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을 맴돌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차피 노에비안에게 아드리엔은 안중에도 없다. 단지 눈앞의 블리에를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해 안달 나 있을 뿐. 로아드네스와 입장했을 때 비쳤던 배신감 어린 그의 표정이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또다시 비참해지려는 마음을 겨우 붙들고 서 있는데,
“……!”
노에비안의 화를 참는 듯한 얼굴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충동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틀었다.
어두운 벽에 한 손을 짚고 그대로 굳어버린 노에비안이 고개는 돌리지 않고 눈을 번들거리며 시선만 쏘아냈다. 고개 돌린 나를 보는 그 시선이 뺨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 입을 맞추려 하다니……! 겨우 붙들고 있던 비참한 마음이 순식간에 내 손에서 빠져나가 폭죽처럼 내 가슴을 펑펑 터트렸다. 노에비안 트로비카가 이렇게 무례한 사내였나?
“내가…….”
나는 토기처럼 올라오는 슬픔을 꾹 누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당신이 내게 함부로 할 수 있단 뜻은 아니에요.”
떨리는 목소리도 꾹 눌러 참았다. 나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굳어 있는 노에비안의 눈을 끝까지 피했다. 도저히 블리에에게 입을 맞추려던 노에비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저는 이제 당신의 정부라는 이유만으로 숨어 있고 싶지 않아요. 황제 폐하의 정부도 사교계에 당당히 얼굴을 내밀고 다녔다는데, 아직 존재 자체도 희미한 제가 죄인처럼 숨어다닐 필요가 있나요?”
“…….”
“그리고 제가 황태자비 전하나 2황자 전하와 엮이는 게 싫으셨다면, 가만히 보고 있지 마시고 방금 직접 나서 주지 그러셨어요? 하다못해 어찌하면 엮이지 않을 수 있는지 알아봐 주시던가요.”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겠죠? 나는 목소리보다 더 떨리는 몸을 내색하지 않고 그를 스쳐지나 밝은 곳으로 나왔다. 비참함과 당황스러움이 휩쓸고 간 내 가슴은 시커멓게 타버린 게 분명했지만……. 노에비안이 이렇게나 안절부절못하며 화를 낼 만큼의 일을 해냈다는 게 이상하게 나를 흥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