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왜 이 남자는, 어째서 이 남자는2021.08.18.
노에비안은 멀어져 가는 정부의 뒷모습을 보며 여전히 굳어 있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당신이 내게 함부로 할 수 있단 뜻은 아니에요.’
“웃기는 소리.”
스스로 내 것이 되고자 안달했던 주제에 감히 그런 말을 해? 노에비안의 얇은 입술은 선명한 비웃음이 담긴 채 비틀렸다. 좋은 옷을 입혀주고, 미안하다 같이 살자 해주었더니 주제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느릿하게 자세를 바로 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어둠 속에서 벗어났다. 3층 난간에 몸을 기댄 노에비안의 눈이 어느새 1층까지 내려간 여자의 뒷모습을 따라 어둡게 번뜩였다.
*** 나는 흥분되는 마음을 안고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밖으로 나갔다. 펄떡이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주위를 살피고 외진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승전 기념식 때 노에비안과 했던 입맞춤 이후로 황궁은 내게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오늘 이후로는 조금 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사건만 아니었어도 황궁은 내게 설레는 곳이었으니까. 내 기분이야 어떻든 발걸음은 자연히 익숙한 길을 따라 한 곳으로 향했다. 성대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아틸차드홀을 벗어나 외진 정원길을 따라 걸으면 손님들을 위한 별궁이 모여 있는 곳이 나온다. 거기서 가장 구석진 별궁은 작고 오래되어 폐허나 다름없었는데, 그곳에 딸린 작은 정원 역시 꽃보다는 푸르른 나무가 많아서 한 달에 한 번 오는 정원사 말고는 사람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았다. 나는 그곳을 ‘작은 숲’이라 불렀다. 어릴 적, 가끔 아버지를 따라 황궁을 방문했을 때 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몰래 이곳에 침입하곤 했다. 이곳에는 늘 ‘안’이 있었다. 한때 나의 완벽한 연인이자, 남편이었던 노에비안 말이다. 결국 생각의 끝이 노에비안으로 향하자, 나는 ‘작은 숲’ 입구에서 입술을 꾸욱 깨물고 우뚝 멈춰 섰다. 초겨울 밤은 무척 쌀쌀했고, 작은 숲의 입구는 겨울에도 끄떡없는 억센 초록 덩굴이 얼기설기 얽어져 있어서 파릇파릇한 향내를 풍겼다. 그리운 향기였다. 흥분된 마음을 잠재우는 데는 제격이었지만 반대로 노에비안과의 추억이 떠올라 나는 마음이 아팠다.
‘노에비안은 죽이고 싶을 만큼 밉지만, 그 시절의 안은 도저히 미워할 수 없어.’
인정할 건 인정하는 수밖에.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사랑했고 그래서 더 아픈 것을. 나는 두 주먹을 의미 없이 꽉 쥐고 떨었다. 내 생애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준 노에비안을 완전히 마음에서 도려내려면 아픈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이렇게 괴롭고 힘든 게 당연해.’
버리고 버려도 노에비안과의 옛 추억만은 도저히 버려지지 않았다. 그 추억을 버리는 건 아드리엔으로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모두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나중에 아주 비참하게 버릴 거야. 그건 변하지 않아.’
열심히 마음을 다잡기는 했지만, 무지갯빛으로 행복했던 추억이 단번에 흑백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허망한 기분에 순간 온몸에 탈력감이 들었다. 그가 내 첫사랑이자 연인이던 시절을 생각하며 마침내 굳어 있던 한 걸음을 떼는데,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작은 숲에는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2황자 전하?”
가장 커다란 나무 아래 삐딱하게 기대앉아 있는 로아드네스였다. 고급스러운 정복 재킷은 여며져 있지 않았고, 그 안의 셔츠도 누가 보면 여기서 누군가와 진탕 굴렀다고 생각했을 만큼 풀어헤쳐져 있었다. 나는 그가 소문난 탕아라는 것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짐작과는 달리, 비슷한 옷매무새를 한 여자 같은 건 없었다.
‘술 냄새…….’
아까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시종이 나르던 술병을 손에 쥐고 병째로 들이켜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뭔가 안 좋은 이야기를 했던 걸까? 그는 내가 자신을 불러도, 꿈속에 있는 듯 흐릿해진 동공으로 내가 들어서는 것을 빤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애초에 20년이 넘게 황궁에서 살았을 황자에게 가질만한 질문은 아닌 걸까. 괜스레 민망하기도 했고, 이곳을 알고 있는 그가 신기해 나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서 어찌…… 전하? 많이 취하셨나 보군요.”
“아니, 아니…… 앉아.”
취한 거 맞네. 로아드네스의 행동은 참 삐딱하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오만하긴 했지만, 황족임에도 나를 하대한 적은 없었다. 나는 이 인간미 없이 아름다운 황자도 술에 취하니 별수 없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다가가 그 앞에 섰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전하.”
“……앉아. 내 옆에 있어.”
내 감사 인사에, 로아드네스는 퍽 애원조로 말했다.
“!”
서슴없이 내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기는 그의 손을 보자 방금까지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 날아갔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술에 취해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보자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환생 후 처음으로 뭔가 해낸 날이니 술주정을 좀 들어줄까.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노에비안의 그런 표정을 보는 건 어려웠기도 했고. 이 남자 덕분에 더 주목받아서 황태자비의 시녀 자리라는 제안이 들어온 걸지도 몰랐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그의 곁에 살짝 떨어져 앉았다. 내가 얌전히 옆에 앉자, 다행히 아름다운 황자의 술주정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짧은 정적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나는 갑자기 더 빨리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끼고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 꾹 눌렀다. 이 몸은 심장이 안 좋은 건가. 진지하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근처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털뭉치가 팍! 튀어나왔다.
“아!”
헥! 헥! 헥! 낑-! 끼이이이잉!! 거대한 털뭉치의 정체는 큰 개였다. 당황한 내가 입을 벌리고 굳어 있는데, 커다란 개는 흡사 몇 년은 못 보다 재회한 주인을 마주한 것처럼 내 품에 달려들어 낑낑대며 목과 얼굴을 핥아댔다. 나는 개를 진정시키려고 몸통을 잡고 눈을 맞췄다. 그리고 곧바로 깜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코완이랑 무척 닮았네.’
황궁에서 ‘안’이 몰래 기르던 강아지, 코완의 황금빛 털 색깔과 무척 닮은 개였다. 코완은 잘 있을까? 내가 신경 쓸까 봐 북부 트로비카 영지로 데려갔다 들었는데. 코완 대신으로 실컷 귀여워해 주고 싶었는데, 흐리멍텅한 로아드네스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거대한 개를 끌어안고 열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 예쁘다. 정말 귀여운 개가 여기 있네요, 전하.”
“…….”
“너 너무 귀엽다!”
밝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나는 거대한 개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낑낑대며 들러붙자 더 열렬히 쓰다듬고 소리 없이 어여뻐해줬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로아드네스는 이상하리만치 너무 조용했다. 그리고 돌연.
“……아드리엔.”
순식간에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쾌한 ‘작은 숲’의 공기가 무서운 속도로 무거워졌다. 털을 쓰다듬던 내 손은 깊숙한 늪에 빠진 것처럼 느릿해졌다. 심장이 귓속에 있는 듯 펄떡였다. 이번에도 술주정이겠거니. 애써 그리 생각하며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드리엔…….”
어둑하게 잠긴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속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돌아볼 수밖에 없는 절절한 목소리였다. 내 장례식에 갔던 날 밤. 추운 밤에 홀로 남아 노에비안을 기다리며 갈구했던 내 이름이 그날 밤의 정적에도, 지금의 정적에도 로아드네스의 목을 긁으며 애원처럼 흘러나왔다. 이제 심장이 완전히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블리에 아카시아는 분명히 심장에 문제가 있다. 나는 식은땀으로 젖어 드는 손을 가슴께에 꾹 누르고 목소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돌아본 곳에는 술주정이라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또렷하고 선명한 붉은 눈이 마치 제정신인 사람처럼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공기 대신 적막만 흘렀다.
“……이상하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번쩍이는 눈은 누군가에게 공포심을 선사하기에 충분했지만, 그의 얼굴은 얇게 얼은 호수 위에 있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눈에 보일 만큼 몸을 떨고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자로 잰 듯 질척임 하나 없이 산뜻하게 추던 춤, 황족들 사이에서 무감각하고 삐딱하게 서 있던 남자의 거대하고 단단한 몸 역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본래는 깨끗했을 눈 흰자에는 피로함뿐만 아니라 실핏줄이 올올이 올라 붙어 있었다.
“내가…… 진정 미친 건가.”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눈에서 가느다란 눈물 줄기가 몇 번이고 흘러내렸다. 나는 이미 내 비석 앞에서 몸을 떨며 우는 이 남자를 멀찍이서 마주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의 눈물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그보다 반짝이는 남자가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떨구고 있는 모습은 일종의 환상과도 같았다.
“미친 게 아니라면…….”
나는 마치 내가 울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울을 볼 순 없어도 분명 그랬을 거다. 누군가 내 눈물샘과 얼굴을 마구 쥐고 비트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까이서 보는 그의 눈물은 그 누구든 마음을 뒤흔들 만큼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내 눈에는 왜…….”
그리고 정신없이 내 얼굴을 헤집는 그의 시선이 밧줄이라도 된 듯 나를 꽁꽁 묶었다.
“도대체 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가 아드리엔으로 보이는가.”
내게서 시선을 거두는 로아드네스가 괴롭게 말하며 두 손에 얼굴을 묻는 모습이 내 두 눈을 사정없이 쑤셨다. 누군가 뇌를 잡고 주무르고 목을 턱 움켜쥔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동시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슬픔이 나를 강타했다. 아. 아아. 왜 이 남자는. 어째서 이 남자는. 도대체 당신은 무엇인데. 당신이 무엇인데. 거의 평생을 사랑했던 남편에게 듣고 싶었던 그런 말을. 그렇게 매번. 내 속에서 참고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마침내 내 뺨마저 적셔졌다. 나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동요하고 있었다. 자신이란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나 때문에 저토록 괴로워하는 로아드네스를 보자, 자연스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노에비안 때문에 눈물 지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라 점점 숨이 가빠졌다. 파티홀에서 귀부인들과 나눠마셨던 그 샴페인 한 잔에 술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머리가 핑핑 돌고 심장이 발끝부터 머리까지 널을 뛰었다. 그래서였을까.
“……제가 아드리엔이 맞다면요?”
빠르게 뺨에서 눈물을 훔쳐낸 나는 스스로도 이해 못 할 말을, 충동적으로 내뱉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