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당신을 가질 거야2021.09.15.
그다지 고급품이 아닌 백작저의 마차가 덜커덕거리는 것 만큼 내 몸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코완은 계속 로아드네스 전하의 개였습니다. 전하께서 거두신 후로 단 한 번도 이 황궁 밖을 벗어난 적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혹시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잘못 아신 것이…….’
탁! 창문을 열어 찬 바람을 맞았다. 얼굴이 차게 얼어붙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안 보는 새 코완이 많이 자랐을 것 같아요. 대공저로 데려온다면 정말 기쁠 텐데.’
‘코완?’
‘당신이 별궁에서 몰래 기르던 강아지요.’
‘아, 그 녀석. 당신 몸이 회복될 때까진 영지에서 잘 보살필 생각이야. 산책이라도 시키겠다고 당신이 무리해서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해.’
눈물이 나지 않는 대신, 차게 언 얼굴이 깨어질 듯 아팠다. 이제는 혼란스럽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있긴 했던 건가.’
아프다는 핑계로 아무런 의심 없이 넘겨왔던 순간들이 불꽃처럼 쏟아져 내 몸을 튀겨댔다. ***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모를 저택은 폐가처럼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백작저의 사용인들이 쫓겨나기라도 한 것처럼 입구에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마, 마님……!”
“마님!”
마지를 시작으로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얼굴의 사용인들이 나를 열렬히 맞이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그제야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저택 입구에 짐마차는 물론이고 말을 탄 기사 수십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누군가 여행이라도 떠나는 행렬 같았다.
“마님, 안쪽에……!”
“어서 오십시오, 아카시아 백작 부인.”
요나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안쪽에서 노에비안의 부관, 짐스커 경이 나오며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손님이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 저택 안의 전경은 더 가관이었다. 대낮처럼 밝아야 할 1층 로비는 어두컴컴하고, 오로지 소파 주변에만 약한 불을 밝혀 놓았는데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을 것처럼 적막했다. 그 적막의 한 가운데 유일하게 밝은 곳, 노에비안이 앉아 있었다. 집주인처럼 다리를 꼬고 소파 팔걸이에 얹은 팔에 제 머리를 괴고 있던 노에비안은 내 인기척이 들리자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피곤함에 절은 눈가, 약한 불에 번뜩이는 새파란 눈동자. 그것들과 마주하며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인사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종이 하나를 내게 날리듯 집어 던졌다.
“!”
깜짝 놀라 내 눈앞에서 펄럭이는 종이를 잡아 가슴께에 꾹 눌렀다. 노에비안이 벌떡 일어나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2층과 이어지는 계단 난간에 멈춰서자 그가 더 가까이 다가와 나를 찍어누르듯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황태자비의 시녀 자리를 거절하라고 했을 텐데.”
“…….”
“황궁에는 내 눈이 없다고 생각했나?”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떨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노에비안은 잇새를 짓씹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뱉었다.
“기어코 황태자비의 시녀가 된 것도 모자라, 뭐? 내가 대공저를 비우는 동안 황실 소속으로 파견을 나와? 대공저에서 조문객을 맞아? 내가 그리 우습나?”
풍성한 드레스 자락 안에 감춰진 다리가 덜덜 떨렸다. 블리에가 된 이후 노에비안의 거친 모습은 여러 번 봤지만 이번엔 급이 달랐다. 일견 살기가 느껴지는 기세에 나는 마른침도 삼키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숨을 쉬었다.
“대공비가 되고 싶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들어주지 않아서 자꾸 거슬리게 구는 건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이없다는 듯 일갈하는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나는 가슴께에 눌러놓은 종이를 서서히 들어 보았다. 도리스가 일처리를 얼마나 빠르게 했는지, 오늘 엘라콘으로 떠날 예정이던 노에비안이 출발하기 전에 관리인을 파견한다는 이 공문을 받아보고 격분해 쫓아온 게 분명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예기치 못한 그의 방문에 긴장으로 손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맞아요.”
“장난하나?”
“직접 정부로 삼았고, 안주인도 없는 마당에 당신이 있는 대공저에서 살고 싶은 게 뭐가 문제죠?”
“주제 파악이 안 되나 본데. 하나 알려줄까?”
“……!”
노에비안은 그대로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금만 힘을 주면 뚝,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런 요구는 네 의무를 다했을 때나 지껄여.”
“내, 의무요?”
“정부면 정부답게 침실이나 데우란 말이야.”
“!”
내 마음은 이미 다 갈려버리기라도 한 걸까? 노에비안의 음성은 아주 사나운 데다가 위협적이었고 내용도 충격적이기 그지없었지만 이전처럼 눈물이 치솟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긴장으로 오르내리던 가슴이 잦아들자 그가 움켜쥔 손목의 고통도 사라졌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었다. 고통에 익숙해진 것이다.
“……내가 의무를 다하지 않았나요?”
“단 한 번도.”
“……!”
블리에는 노에비안과 밤을 보낸 적이 없다. 그래서 그토록 안달했었구나. 어쩐지 허탈했다.
“네가 이전에 누구와 굴러먹었던지 나와는 다를 거야. 어설프게 애태우려다가 되려 버림받는 게 정부의 운명이라는 걸 똑똑히 알게 되겠지.”
과연 그럴까? 노에비안이 육체적 관계만을 목적으로 여자를 만났다면 굳이 골치 아픈 블리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아직도 사랑한다 말하는 죽은 아내를 두고 굳이 그녀를 닮은 정부를 곁에 두려 하면서 저런 협박이나 할 만큼 마음이 급하기라도 한 걸까?
“대공저에 살려고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흥분하셨나요? 어차피 이번에 가는 건 제 의지도 아니고 임시 관리인으로 가는 것뿐이에요. 자세히 보니 황후 폐하께서 직접 승인하신 서류네요? 괜히 세력가의 사람을 대공저로 보내서 정치적인 오해를 받느니, 이상한 말이 나돌지 않도록 도와주신 거로군요. 그러니 충성스럽고 한미한 가문의 저를 찾으신 거겠죠. 당신도 황후 폐하의 뜻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그렇게 부려 먹는 충성스러운 가신의 부인을 좀 더 존중해주세요.”
“입만 살았군.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제 주제에 당신을 상대로 무슨 짓을 꾸민단 말이에요? 나야말로 얼떨떨하군요. 제겐 그리 나빠 보이는 제안이 아니에요. 당신 말대로 시간이 흘러 언젠가 대공저 한쪽에라도 자리를 잡으려면 사용인들과 미리 친해져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말이죠.”
평정을 찾은 내가 여상히 말했지만, 노에비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눈만 올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번뜩이는 노에비안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래, 역시 하찮은 이유라도 있긴 있었군.”
맥이 빠진 듯 낮은 한숨을 한차례 쏟아낸 노에비안이 미약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때 사용인들이 당신에게 실수한 일로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나 본데. 모르는 것 같아 알려주지. 그 사용인들은 당신처럼 황실에서 직접 선발해 보내준 이들이라 쉽게 내쫓을 수 없어. 그러니 성질 죽이고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꽉 틀어잡고 있던 내 손목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피가 통하지 않던 손목이 갑자기 자유를 찾자 불쾌하고 찌릿한 느낌이 팔을 오르내렸다. 나는 손자국이 남은 손목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 그를 보았다.
“……내쫓진 못해도, 벌은 줄 수 있잖아요?”
“마음대로 행동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다시 소파에 앉은 노에비안이 협탁 위에 쌓여있던 가십지를 테이블 위로 촤라락 쏟아냈다.
“2황자를 이용해 날 더 이상 자극하지 마.”
주요 부분만 찢어낸 가십지에 어린아이 손바닥만큼 작게 언급된 나와 로아드네스의 이야기가 있었다.
“마지막 경고니까.”
마지막 경고. 자비라도 베푸는 듯, 예민하게 치켜뜬 피로한 눈으로 씹어뱉는 그를 보자 아까부터 발밑에서 넘실거리던 분노가 소리 없이 들끓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는 분노를 누르며 오늘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람처럼 서서히 노에비안을 향해 다가갔다.
“당신, 개 키운 적 있나요?”
아까처럼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느껴지지 않던 심장의 고동이 갈비뼈를 뚫고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우리의 소중한 추억. 당신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을 지우고 버리고 싶어 발버둥 치던 내가 유일하게 버리지 못하고 잡고 있던 내 생에 가장 찬란했던 시절. 시퍼런 눈을 빛내고 있는 노에비안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1초가 영겁같이 느껴졌다. 귀찮은 일을 보듯 나를 훑어보던 노에비안의 퍼석하고 얇은 입술 새로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 나올 차례였다.
“……말랑한 소리나 하는군.”
온몸의 피가 머리와 눈으로 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참으며 나는 가까스로 웃으려 애썼다. 나는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듯한 절박한 심정으로 되물었다.
“……키운 적 없다는 뜻인가요, 단 한 번도?”
“당연한 소릴.”
그리고 노에비안 트로비카는 내가 절벽에서 붙잡고 있던 유일한 끈마저 싹둑 잘라버렸다.
“요즘 정말 이상하게 구는군.”
나는 아주 천천히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끝없이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내 귀속에 온전히 흘러들어오지 않았다. 저택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자 노에비안이 조금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완벽히 정리하며 일어났다.
“잘 들어. 이번 엘라콘 일이 끝나고, 장례식까지 끝나면…….”
그리고 충혈된 눈으로 억지로 웃고 있는 나를 향해 다가오며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가질 거야.”
이번에도 건방지게 거부할 권리 같은 건 없어. 낮게 씹어뱉는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지고, 사라지는 노에비안의 뒷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면서, 찬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지만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은 이미 더 떨릴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일그러뜨릴 수조차 없는 내 뺨에 바깥 공기보다 차갑고 굵은 눈물 방물이 툭, 툭 쏟아져 내렸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당신이 나를 가져.
‘당신은 안이 아니야.’
내가 가장 처음 좋아한, 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함께했던. 함께 미래를 그리던 내 소중한 안이…….
“아니야. 당신은…… 안이 아니야.”
처음부터 아니었던 거야. 그렇지? 절벽 아래, 피를 흘리며 뒤통수가 온통 깨져버린 내 영혼. 허약했지만 행복했던 그날의 아드리엔이 차가운 흙바닥에서, 내 머릿속에서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멀어지는 마차와 말발굽 소리, 밖으로 쫓겨나 있던 사용인들이 들어오는 소리에도 나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나는 지금보다 어린 시절의 아드리엔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로비 한가운데가 황량한 겨울 절벽 아래인 것처럼 몸을 떨며 서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속였던 거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