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니까2021.09.25.
수도의 부녀자 실종 사건으로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위한 호위를 추가했다는 핑계는 입구에서 아주 잘 먹혔다. 몇몇 기사들과 함께 로브 망토를 뒤집어쓰고 대공저에 너무 쉽게 들어오자 허망하기까지 했다. 그 여자의 다른 꾐에 넘어가게 된 건 아닐까. 모든 게 계획된 것처럼 착착 진행되는 상황도 꿈만 같았지만, 가장 꿈만 같은 건……. 지하감옥으로 내려갈수록 격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였다.
‘이렇게 깊고, 어두운 지하에…….’
로아드네스는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기묘한 감각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아드리엔이 있다.’
느릿한 발걸음은 걸음걸이마다 지독하게 무거운 추를 단 듯 질질 끌렸다. 자연스럽게 비켜선 블리에 아카시아를 지나치자 달빛에 반짝이는 시신이 보였다. 시신 앞에 멈춰 선 로아드네스는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는 감각을 느꼈다. 데뷔탕트 이후 처음으로 보는 아드리엔이었다. 노에비안을 향해 웃으며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던 뺨에는 핏기가 없었다. 부러 화사하게 치장한 얼굴 속에서, 그는 어린 날의 아드리엔을 보며 오열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소멸하고, 심장이 누군가 두드려 패는 듯 조여들었다.
“아드리엔…….”
자연스럽게 손을 뻗은 유리관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아드리엔…….”
머리통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비명이 제 속에 울려댔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처절한 비명. 적들에게 살을 베여도, 밤새 새로운 붕대들을 피로 다 적실만큼 다쳐도 신음 한번 내뱉지 않았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드리엔……!”
낮게 소리치는 이름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 아드리엔의 대신이 되겠다던 블리에 아카시아도 조용히 그의 뒤에 서 있기만 했다.
*** 나는 무너지는 로아드네스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처음 그를 묘지에서 보았을 때 보다 더 큰 절망과 슬픔의 기운이 주위를 돌풍처럼 휘감는 것만 같았다. 아-.
‘나는 안의 절망이구나.’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살아 있을 때는 바보같이 속아서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어 그를 절망케 했고. 죽고 나서는 그가 부르는 이름에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절망케 한다. 로아드네스를 만나면, 안을 만나면 뭐든 해결될 것만 같던 고양감이 내 손에 든 양초처럼 녹아갔다.
‘나는 안의 절망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고백하고 그의 마음속에서 여러 번 죽은 아드리엔을 다시 살려낸다 해도, 그는 나와 함께할 수 없다. 나의 죽음에 저토록 절망하고 소리 없이 오열할 만큼 무너지는 사내는 절대로 블리에 아카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아드리엔에 대해 말하는지도 몰랐던 주제에, 아드리엔을 대신해 그녀를 잊게 해주겠다고 말하던 내 입은 얼마나 교만했던가. 온몸을 떨며 시신 앞에 무릎 꿇는 안을 지켜보자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조용했지만, 그는 보이지도 않는 영혼이 사그라드는 것처럼 울고 있었다.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하고 끝났던 로아드네스의 거대한 사랑에, 나는 질식될 것만 같았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동이 트기 직전인지 새벽은 몹시 어두웠다. 여분으로 가지고 온 초까지 모두 녹고, 달빛이 지하 감옥의 반을 비출 정도가 되어서야 로아드네스가 유리관 앞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반쯤 죽어버린 그의 눈과 마주쳤다. 오싹한 느낌이 들어 나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
“연락이…… 안 되셔서 무척 걱정했어요.”
“당신이 왜 내 걱정을 합니까.”
“이대로 가시는 건가요?”
“시신은 잘 확인했습니다. 당장 관을 가지고 밖에 두고 싶지만…….”
그는 다음 말은 아꼈다.
“이걸로 우리의 거래는 끝입니다. 원래 도움을 주기로 했던 건 부관들을 통해 내용을 주고받으십시오.”
“잠깐, 잠깐만요!”
나는 복잡한 감정으로 로아드네스의 옷깃을 잡았다. 나를 내려다보던 로아드네스의 시선이 옷깃을 잡은 손에 머무는 것이 느껴지자 마음이 더 급해졌다. 이렇게 이별이라고? 이렇게? 로아드네스는 잠시 시선을 주고는 미련 없이 지하감옥 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를 따라 정신없이 지하감옥을 올랐다. 로아드네스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장수 같이 확신에 찬 걸음걸이여서 나는 조금 불안했다. 이렇게 안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이전처럼 편지에 대한 답장조차 받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갈 순 없었다. 요나와 마지까지 물러간 별관은 오롯이 우리 둘뿐이었다. 그의 보폭이 너른 걸음을 따라가느라 나는 숨이 차오를 만큼 빨리 걸어야 했다. 활짝 열린 뒷문을 벗어나 그가 아득히 높은 대공저 담을 아무렇지 않게 넘으려 하자, 나는 그의 팔을 강하게 두 손으로 잡았다.
“부탁, 부탁이 있어요.”
“…….”
이전과 같은 오만한 황자의 얼굴을 한 로아드네스가 턱을 들고 나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반짝이던 눈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감싸 안았기 때문에 그를 이대로 보내고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다. 오늘을 놓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내게 부탁을 해도, 나는 아무것도 당신에게 바라지 않을 겁니다.”
주고받는 관계는 끝났다는 말이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별빛 언덕에 데려가 주세요.”
순간,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었다. 숨은 쉬고 있는 걸까? 내가 조마조마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바위처럼 굳어버린 로아드네스의 낯빛은 시시각각 변했다.
“어쩌면 오늘이…… 전하와 제가 마주하는 마지막이잖아요.”
마지막. 그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무는 그를 보고 내가 더 간곡히 부탁했다.
“마지막 부탁이에요.”
*** 금방이라도 내 손을 떨쳐낼 것만 같던 로아드네스는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수도 중앙광장에서 조금만 더 북쪽으로 말을 달리면, 수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조금 높은 언덕 하나가 나온다. 암흑이 깔린 밤에 가면 쏟아지는 별빛을 볼 수 있다 해서 그곳은 별빛 언덕이라 불렸다. 나는 늘 안과 함께 그곳에 오르고 싶어했었다. 호위를 더 붙여 외출하라는 기사의 권유를 무시하고 얼굴을 감춘 로아드네스와 함께 마차를 몰아 나왔다. 마차 안에서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려 별빛 언덕에 오르자마자 나는 홀린 듯 언덕 꼭대기까지 뛰어올랐다. 데뷔탕트가 끝나면 모습을 드러낸 안과 함께 연인들의 언덕으로 유명한 이곳에 와보고 싶었다. 띄엄띄엄, 별구경을 나온 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른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고 나 역시 덥석 하늘을 보며 누워버렸다. 로아드네스는 한참 뒤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내가 별을 질릴 만큼이나 보고 나서야 내 곁에 와서 조용히 앉았다. 우리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누워서 안과 함께 다정히 별을 보았을 어린 날을 상상했고, 아마 로아드네스는 어린 아드리엔을 떠올리며 그녀와 함께 별을 보는 상상을 하겠지. 지금 같이 있는 우리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이 뼈아프게 와닿고, 끝내 내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는 로아드네스를 보자 결심이 굳어졌다.
‘더는 그의 절망이 되지 말자.’
어차피 블리에로는 그와 함께할 수 없어.
‘노에비안이 무슨 간계를 펼쳤던, 안을 알아보지 못하고 덜컥 그를 따르고 마음까지 줘버렸던 건 나야.’
로아드네스를 볼 면목도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나의 죽음에 무너지고, 고통스러워하던 그를 떠올리자 확신이 섰다.
‘더 이상 안을 끌어들이지 말고, 나는 내 복수를 끝내야 해.’
안은 어리석은 아드리엔을 잊고, 더 좋은 여자와 미래를 함께할 자격이 있어. 안과 함께 별빛 언덕에 와서 다행이다. 나는 이기적일지라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잠든 듯 아름답게 죽은 아드리엔, 그리고 지금 별빛 언덕 위에서 쏟아지는 별. 미련도, 후회도 남지않을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잘 되었네요. 이제.”
“…….”
나는 애써 밝게 말했다.
“그토록 바라던 시신을 확인하셨으니, 이제 정말 떠나보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저도…….”
왠지 목이 멨다.
“저도, 이제 전하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었으니 마음 놓고 백작과 이혼도 하고,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겠네요.”
*** 「너와 함께 별빛 언덕에 가고 싶어.」 끝까지 거슬리는 여자였다. 끝까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여자였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여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윙윙 울렸다.
‘어쩌면 오늘이…… 전하와 제가 마주하는 마지막이잖아요.’
‘마지막 부탁이에요.’
마지막. 로아드네스는 물속에 가라앉은 듯 숨이 막혔다. 계속해서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거부감이 일었다.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놈이로군.’
이제는 자신을 비웃는 미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다를 줄 알았다. 아버지와 노에비안과는 달리 한 여자에게만 이끌리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다. 이토록 쉽게 깨어질 지조였다면 뭐 하러 몇 년을 그리도 괴로워했던가. 아드리엔이 혼인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음이 변하기는커녕 오히려 커지기만 했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별빛 언덕에 누워 별을 헤아리는 여자의 눈을 본 로아드네스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 여자와 헤어지고 싶지 않구나.’
차라리 유혹적인 정부의 육체를 원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드리엔을 향한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것이 그를 더 괴롭게 했다.
‘개 잡놈의 새끼는 나였군.’
쿠로세다 남작 부인과 얽힌 아버지, 블리에를 원하는 노에비안. 그 둘과 자신이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다며 마지막을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예, 마지막입니다.”
“…….”
“이제는 완전히 끝입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블리에 아카시아를 일으켜 돌려보냈다.
“앞으로 마주치는 일은 없을 테니, 그대는 그대의 인생을 살아가길.”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마부에게 손짓하자 피곤한 얼굴의 마부가 여자를 에스코트해갔다. *** 진짜 끝이로구나. 그가 원하는 때에 사라져주는 것 역시 그를 위하는 일이겠지. 멀리서 안에게 속죄하며, 그가 행복하기만을 빌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싸할까.
‘앞으로 마주치는 일은 없을 테니, 그대는 그대의 인생을 살아가길.’
지금처럼 단둘이서 보는 일은 없더라도, 앞으로 마주치는 일이 없다고 어쩜 그렇게 자신했을까? 등줄기를 스치는 오싹한 기운에 나는 마차로 향하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등진 로아드네스는 별빛 언덕 꼭대기에서 검을 꺼내 들고 서 있었다.
“……!”
“어, 부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리가 움직였다. 로아드네스가 꺼내든 검날이 다름 아닌 로아드네스 자신의 목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고 있던 신발이 죄다 벗겨지고, 차가운 흙바닥과 거친 풀이 부드러운 발바닥에 생채기를 냈지만 나는 로아드네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두 팔을 완전히 뻗어 로아드네스의 검을 바닥으로 쳐냈다. 별다른 반항 없이 떨어진 로아드네스의 검날에는 이미 붉은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미쳤어?”
아름다운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네가 왜 죽어! 도대체 왜! 아드리엔이 죽은 걸 확인했다고 해서, 진짜 따라 죽기라도 하려는 거야?”
나는 내 입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모르고 죽은 눈을 하고 있는 로아드네스를 향해 소리쳤다.
“도대체…… 도대체……!”
로아드네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미련해 빠진 로아드네스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으로 나는 로아드네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키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났으니 나는 거의 매달려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셔츠 틈으로 보이는 길쭉하고 굵다란 목에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보자, 이성이 저 멀리 날아가고 체념했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내가 졌어.”
나는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로아드네스의 멱살을 놓고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삶의 의지가 없는 눈이 나를 무감각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번에도 내가 교만했구나. 아름다운 시신. 아름다운 우리의 추억. 그런 기억으로 남는 것 따위, 안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겨우겨우 연 나는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목소리를 겨우겨우 뱉어냈다.
“……내가, 아드리엔이야.”
이미 까맣게 죽어버린 로아드네스의 눈동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로아드네스의 침잠한 눈은 이미 나를 지나 떨어뜨린 검으로 향했다. 나는 피비린내가 날 만큼 입속을 꾹 깨물고 그가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말했다.
“……안.”
그리고 검을 향해 손을 뻗던 로아드네스의 손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