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시신을 찾다2021.09.22.
마리는 트로비카 대공저에서 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하녀였다. 마리는 황제의 지시로 선발된 다른 사용인들과는 출신 자체가 달랐다. 대공저 사용인들은 언젠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 부유한 평민들이 많았다. 개중에 허드렛일을 전혀 하지 않으려는 몰락 귀족 출신의 사용인들이 있었는데, 애니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쾅! 쾅쾅! 쾅!
“그만해, 그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흐흐흑……. 새벽이야, 지금 새벽이라고!”
“도대체 잠도 재우지 않고 뭘 어쩌려는 거야, 차라리 그냥 때려 이 망할 놈들아!”
가난한 평민 출신의 마리는 대공저로 들어왔을 때 자신의 인생이 무지갯빛으로 변할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누군지 잡히기만 해봐. 그 여자랑 아주 작살을 낼 테니까!”
벽장 안에 갇힌 애니가 악에 받쳐 지르는 소리에, 마리는 비처럼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몸을 떨었다. 마리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사용인들이 몰려와 시도 때도 없이 벽장을 걷어차며 애니의 무리를 모욕했다. 처음에는 백작 부인이 시켜서 한 일이지만, 벽장에서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먹지 못하고 근 사나흘을 버티던 애니가 점점 미쳐가며 울부짖자 쌤통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던 차다. 그렇게 5일쯤 지났을까. 손톱으로 벽장 문을 벅벅 긁는 소리가 나기에 노크를 해보니 안에서 말라 죽어 가기 직전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여자를…… 그 여자를…… 불러줘…….”
애니의 벽장 말고도 다른 벽장에서 메마른 울음소리가 연달아 새어 나왔다. 마리는 마음을 더 단단히 먹고 발을 들었다. 쾅!!
‘나를 찾거든 대답 대신 더 세게 벽장을 걷어차. 공손하게 애원하기 전까지는, 절대 데려오지 말렴.’
귀부인의 말대로 애니가 귀부인을 찾기 시작했다. 마리는 그 후로 몇 번 더 벽장을 열심히 걷어찬 뒤, 식사를 하고 있을 귀부인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 한편 트로비카 대공저의 집사, 가스팔은 손님방을 유유히 빠져나와 제집처럼 저택을 휘젓고 다니는 블리에를 응시했다.
‘생각보다 큰 소란은 없군.’
식사 시간에 맞춰 다이닝룸으로 내려온 귀부인은 자신의 저택에서 데려온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우아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스팔은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내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
가스팔은 요 며칠 저 귀부인의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가슴이 떨릴 만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걸 상기했다. 그래서였을까.
“제 권한으로 부인께서 편히 계실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다 취하겠습니다.”
원래 트로비카 대공의 지시대로라면, 저 귀부인은 조금 더 삼엄한 감시 속에 있어야 했지만 조금 풀어준 경향이 있었다. 가스팔은 그것이 제 공이라는 걸 꼭 알리고 싶었다. 가슴을 당당히 편 가스팔을 응시하던 귀부인은 조용히 미소 짓고는 나른한 눈을 했다.
“자네는 이 저택에서 꽤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 유능해서인가?”
“제가 지금은 이리 집사로 머물러 있지만, 대공께서 부관이신 짐스커 경만큼 신뢰하는 이가 누구냐 물으시면 감히 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쓸모가 많은 사람인가 봐.”
“저는 이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겁니다.”
가스팔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는 귀부인에게 바짝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공을 세워 남작 위라도 얻으면…… 신흥 귀족으로 황태자 전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순간, 귀부인의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가스팔은 조금 더 이 귀부인의 눈길을 끌고 싶었다. 젊고 유능한 자신이 언젠가 새로운 신흥 귀족이 되면, 적당히 기품 있는 귀족 출신의 부인은 필수다. 하지만 그는 신흥 귀족에게 딸을 내어줄 세력가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이혼한 귀부인이라면 어떨까? 사별한 귀부인이라면 더 좋고. 블리에 아카시아의 신분은 이미 아카시아 백작과 혼인함으로써 한 번의 세탁을 거쳤다. 가스팔은 이 귀부인에게 관심을 가진 순간부터, 그녀가 자신을 위한 주신의 안배라는 강한 생각이 들었던 참이다. 주인이 버리면, 종인 자신이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죽은 대공비는 오를 수 없는 높은 산 같은 여자였지만 그 대공비를 닮은 블리에는 주인만 버려준다면 충분히 얻어올 수도 있는 여자였다. *** 나는 오늘따라 유달리 기름에 담갔다 뺀 눈깔을 한 가스팔을 보며 역한 감정을 꾹 참고 그를 떠보았다.
“……대공께서 자네를 신뢰하고 크게 쓰시려는 이유가 궁금하긴 한데.”
“대공 전하를 대신해 사무적인 처리도 짐스커 경보다는 제가 훨씬 많이 합니다.”
거들먹거리는 얼굴을 저 멀리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부러 살짝 미소 지었다.
“예를 들면?”
“극비 사항이라…….”
“간단한 것이라도 어렵나?”
“돌아가신 대공비 전하께 보내는 선물은 항상 전하가 아닌 제 손을 거쳤습니다. 제 안목을 높이 사신 것이지요. 같이 보내는 편지 역시.”
“대공 전하를 대신해 자네가 편지를 썼다고.”
“예, 그 정도야 뭐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겨우겨우 음식을 씹어 삼키고, 적포도주로 입안을 헹궜다. 가스팔은 그런 내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결혼 후에 주고받았던 편지는 노에비안이 아닌, 이놈과 주고받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노에비안이 내 편지를 받고, 가스팔에게 이렇게 답장을 하라고 전달했을 수도 있고. 내 입안은 온통 모래를 씹어 삼킨 것처럼 까끌거렸다.
“당연히 알지. 남의 글씨를 따라 하는 자네의 잔재주는 나 역시 높이 사고 있으니. 필요할 땐 나도 부탁해도 될지 모르겠네.”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쨍! 손에 쥐고 있던 포크가 접시에 날카롭게 던져졌다. 떠보듯 해본 말에 달랑 미끼를 물어버린 가스팔의 얼굴을 한 대 쳐버리고 싶었다. 로아드네스, 노에비안, 가스팔 이 세 명의 필체가 똑같은 것이 아니었다. 로아드네스의 필체를 흉내 낼 수 있는 이 가스팔을, 노에비안이 이용했을 뿐.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부, 부인! 저어-.”
마침 조용히 다이닝룸으로 들어선 마리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나는 약간의 수고를 덜어준 가스팔을 향해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요나를 찾았다. *** 2황자 로아드네스의 궁은 오늘도 굳게 닫힌 채 침묵했다. 황제의 부름도, 황태자의 부름도 당분간은 다 무시해버리라 일축해버리는 바람에 그 밑에서 죽어나는 건 부관들뿐이었다.
“이거 정말 제가 가져도 됩니까?”
“그래.”
닐이 오늘도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보낸 서신과 꾸러미들을 내치는 로아드네스를 보며 혀를 찼다. 미인계로 대공의 정부를 유혹해 원하는 것을 얻겠다 자신하던 주군이 결심한 지 하루 만에 변심했다. 그 후로 며칠간 귀부인에게서 여러 번 서신과 직접 만들었다는 쿠키나 푸딩 따위가 도착했다. 꽃꽂이에 소질이 있는지 꽃바구니까지 한 아름 함께 보내왔을 때도 있었다. 닐이 귀부인으로부터 온 선물을 챙겨 나가자 로아드네스의 눈이 다시 침잠했다. 며칠째 침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집무실에서 앉은 채 자다 깼다를 반복했다. 이곳이 술집인지 집무실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청량한 향기를 풍기던 집무실은 술 냄새로 가득 찼다. 로아드네스는 블리에 아카시아에 대한 모든 사항을 이제 직접 처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여자와 만나면 안 된다.’
도움을 준다고 해서, 꼭 그가 직접 나서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처음 약속한 것이 있으니 당장 그 여자를 외면할 순 없었다. 그러니 만나지 않고서 도움을 주는 수밖에. 빈센토, 닐은 물론이고 그가 이끄는 황실 제2 기사단에는 인재가 많다. 한참 관자놀이를 짚은 채 이를 악물고 있던 로아드네스는 망설이다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여자가 생애 처음 만들었다는 쿠키 꾸러미가 리본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서랍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드리엔…….”
그 여자의 말대로, 시신을 확인하고 죽음을 인정한다면 널 끊어낼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자마자 입안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웃기는 소리.’
다른 사람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다고 해서 너를 잊을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리 사랑하지도, 네가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었다고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것을.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고작 너를 닮은, 너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매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고 해서…… 너를 잊을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너를 잊어야 하나? 아드리엔은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자 그의 성역이었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네게 이런 내 모습이 미련해 보이고 멋진 사내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보면 내가 네 남편이라도 된 것 같이 군다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놓을 수가 없어 아니…….
‘놓고 싶지 않아.’
꿈을 꾸면 아드리엔이 나왔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마저도 꿈에서 깨면 얼굴이 흐릿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아 괴로웠다.
‘슬퍼하지 마, 아드리엔.’
네 남편은 널 배신했지만 나는 아니야.
‘내가 만약 네 시신을 확인하고도 그 여자에게 이끌린다면…….’
……그땐 내 목숨을 스스로 끊고 네 곁으로 갈 거야. 네 남편이 죽을 때까지만 곁에 있을 수 있다 해도 상관없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목이 졸려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전하! 전하!!”
소리 없이 절규하던 로아드네스는 어둑한 집무실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급하게 달려온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닐이 웬 하녀 하나를 달고 그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또 사람을 보냈습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무시해라.”
“서신을 보낸 게 아니라, 직접 전달하는 전언입니다!”
닐이 황급하게 하녀를 앞세웠다.
“전하께서 원하시던 사람을 찾았으니, 당장 보낸 사람을 따라 와 확인을 해달라고 전하셨습니다.”
비장한 표정의 어린 하녀 하나가 살짝 떨면서도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 로아드네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로아드네스는 단번에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아드리엔을 찾았으니 이 하녀를 따라와 시신을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 나는 쓰러져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벽장 속 하녀들을 돌봐주라 명하고 조용히 지하로 향했다. 항상 비어 있던 지하감옥을 내 손으로 직접 열었다. 기름칠도 제대로 하지 않는지 두터운 철제문이 긁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님, 마님, 이래도 되는 건지…….”
“시키는 대로 했나?”
“술 창고를 열어서 약을 타고, 전부 먹여 재웠어요. 다행히 대공저 바깥에만 경계가 삼엄하고 내부는 사용인들이 얼마 없는지라 이쪽 별관에는 사람이 거의 없대요.”
밤중에 내게 불려온 마지는 걱정을 하면서도 노련한 하녀답게 임무를 완수했다. 애니는 내게 숫제 애원까지 하며 자신이 아는 것이라곤 별관에 있는 지하 감옥에 노에비안이 자주 든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손님이 오면 기거하는 별관에 숨겨두었을 수도 있겠다는 내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장소가 더 명확해지자 그 이후로는 수월했다. 시신의 위치가 외부로 새어 나갈까 봐 그 앞을 지키는 인원도 최소로 배치해 두는 바람에 여러 사람을 처리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별관에서 일하는 이들을 모조리 재워두고 뒷문까지 활짝 열어두라 지시했다. 마지가 혹시나 하고 망을 보러 나가는 사이, 촛불 하나에 의지해 컴컴한 지하감옥 끝까지 내려온 나는 작게 난 창밖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유리관 속 내 시신이 또렷하게 보였다. 초겨울 밤의 지하감옥은 얼음 속에 있는 듯 싸늘하고 추웠다.
“……안녕.”
나는 더듬더듬 걸어가 마침내 오랜만에 보는 내게 인사를 건넸다. 시신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듯 멀쩡하고 아름다웠다.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안이 내 시신을 봤을 때, 추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해준다면 무척 슬플 것 같으니까. 쿵. 쿵. 쿵. 쿵. 군홧발임이 분명한 발걸음 소리와 그를 뒤따르는 소리가 지하감옥 위에서부터 서서히 커졌다. 발소리와 심장 소리가 교차로 빠르게 들릴 무렵, 나는 입구에서 멈추어 선 로아드네스를 보았다. 정중한 만큼 오만하고 여유롭던 황자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촛불처럼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