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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네가 슬플까 봐 (46/171)

46. 네가 슬플까 봐2021.10.09.

빛을 등지고 내 쪽으로 몸을 굽힌 로아드네스의 눈, 코, 입은 어둠 속에서도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가슴 속에서 북이 울리는 것처럼 둥둥거리는 울림이 있었다. 목을 감싼 내 두 팔 아래 선명하게 느껴지는 긴장감이 내게로 옳아 오는 듯 간질거렸다. 괜스레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들 때쯤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두 팔로 끌어안은 로아드네스의 목을 더 잡아당겼다. 분명 이런 위기 상황에서 대처해야 하는 방법을 로맨스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코와 코끝이 스치고, 상처를 치료한 약 냄새와 로아드네스의 체향이 동시에 내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를 분명 우리 둘 다 들었을 텐데, 아무리 끌어당겨도 로아드네스는 끝끝내 내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다.

1655845747552.jpg“헛, 아 죄, 죄송합니다!”

1655845747552.jpg“하던 일 허허…… 계속! 하십쇼!”

빠르게 멀어지는 수도 경비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내가 눈을 떴다. 버티던 로아드네스의 팔에 힘줄이 바짝 서 있었다. 꽉 끌어당긴 목 때문에 입술이 닿을 뻔했지만 절대 닿지 않도록 벽에 팔을 대고 필사적으로 힘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가고도 우리는 한참 서로를 보고 있었다.

16558457475532.png“……갔어요.”

16558457475536.png“하지 마.”

16558457475532.png“!”

부드럽게 내 팔을 끌러내고 자세를 바로 한 로아드네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16558457475536.png“말 높이지 마.”

16558457475532.png“으, 응.”

내가 저질러놓고 내가 당황해서 겨우 대답하자, 로아드네스가 옷매무시를 바로 했다. 중간중간, ‘수도 경비대 놈들이 저따위로 일을 하니 수도 치안이 개판이 되었다’며 혼잣말도 했다. 짜증이 섞이긴 했어도 로아드네스의 우아한 손동작은 마치 잘 그려놓은 그림 같아서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기억 속 로아드네스는 훨씬 자그마했는데. 내 상상 속 로아드네스는 조금 더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는데. 괜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16558457475536.png“요즘 수도에서 엿 같…… 이상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건 알고 있지?”

16558457475532.png“아…….”

16558457475536.png“호위 없이 나오다니, 안 될 말이지.”

로아드네스가 조금 엄한 얼굴을 했다.

16558457475532.png“호위 있어.”

16558457475536.png“?”

옷매무시를 다 다듬은 로아드네스가 눈썹을 까딱, 하곤 나를 내려다보았다. 호위 없이 나온 줄 알고 직접 날 지켜주러 온 거였구나.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됐을 텐데. 아침에 헤어져 놓고 급히 다시 나왔을 로아드네스를 상상하자 이상하게 가슴이 꽉 차는 것 같았다.

16558457475532.png“아카시아 백작이 하도 걱정을 하길래, 호위 20명씩 꼭 달고 다니기로 약속했었거든. 다들 숨어서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어.”

가까스로 무언가를 억눌러둔 듯한 그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황당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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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참 있다가 돌아가니 수도 경비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인신매매를 하려던 놈들만 잡아갔단다. 로아드네스의 말대로 수도 치안이 나빠졌음에도 수도 경비대는 한껏 해이해진 게 분명했다.

16558457475536.png“네 호위들도 다 자르는 게 좋겠어.”

16558457475532.png“뭐?”

16558457475536.png“그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면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16558457475532.png“죽이려고 온 사람들은 아니었어.”

16558457475536.png“죽이려는 건지, 아닌지는 죽고 나서야 알게 되겠지.”

16558457475532.png“…….”

뻔뻔하게 내 마차에 함께 올라탄 로아드네스는 대공저로 가는 내내 잔소리를 했다. 내가 아는 그 ‘2황자’가 맞나 싶어 빤히 보는데, 갑자기 희게 질린 로아드네스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16558457475536.png“괜한 말을 했군.”

16558457475532.png“?”

16558457475536.png“너한테 죽음 어쩌고 하는 말이나 하다니, 젠장 나는…….”

정작 나는 괜찮았는데, 로아드네스가 홀로 자책했다. 괜찮다 말해주려는데, 자세히 보니 로아드네스의 얼굴은 자신의 발언 때문이 아니어도 비정상적일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반듯하고 잘생긴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아까 맡았던 약 냄새는 궁으로 들어가 치료받았던 흔적이 분명했다.

16558457475532.png“로아드네스.”

처음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보았다. 입술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얼굴을 붉히자, 로아드네스 역시 자책하던 얼굴을 멍하니 들어 보였다.

16558457475532.png“나는 괜찮은데, 네가 괜찮지 않은 것 같아.”

16558457475536.png“난 괜찮아.”

뭘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참 단호했다.

16558457475532.png“내가 괜찮지 않아.”

16558457475536.png“……왜?”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은 눈이 퍽 순진무구해서 피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58457475532.png“당연하지. 나 때문에 네가 다쳤는데 내가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어?”

16558457475536.png“……너 때문이 아니라, 내 성질이 고약해서 그런 거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왜인지 모르게 불그스름해졌다.

16558457475532.png“네 성질이 고약하다고? 네가 얼마나 착한데 그런 소리를 해?”

이번엔 로아드네스가 피실 웃었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 밖에서 빛과 그림자가 교차로 흘러들어올 때마다 올라간 입꼬리에 햇살이 고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16558457475536.png“너한테만 착하면 돼.”

16558457475532.png“?”

뭐가 그리 웃긴지, 대공저로 가는 내내 그는 피실피실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로아드네스의 모든 모습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보았다. *** 대공저 입구에서 로아드네스와 함께 돌아가느냐 안 돌아가느냐로 다시 실랑이를 했다. 나는 오늘 황태자 전하가 행차하신다고 여러 번 설득해야 했다.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하고 로아드네스가 아주 무거운 걸음걸이로 마차에서 내리자 나는 그제야 안도하고 마차에 다시 탔다. 도착해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저 멀리서 요나가 뛰어왔는데, 발그레 상기된 얼굴이었다.

1655845747552.jpg“마님! 마님! 오셨어요?”

16558457475532.png“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1655845747552.jpg“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16558457475532.png“벌써?”

1655845747552.jpg“간소하게 오셨거든요! 모든 사용인이 다 그쪽으로 갔어요! 마님께 전갈을 보냈는데 엇갈렸나 봐요?”

과연 이전에 봤을 때만큼의 의전은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없었다. 황궁의 거대하고 화려한 마차도, 몇십 명에 달하는 기사들도.

16558457475532.png“전하께 큰 결례를 범했구나.”

1655845747552.jpg“집사가 마님께서는 아침 일찍 묘지를 둘러보러 가셨다고 잘 둘러댔어요.”

16558457475532.png“……그놈, 아니 가스팔이?”

1655845747552.jpg“큭큭, 예!”

가스팔의 느끼한 눈을 늘 우웩 하는 표정으로 보던 요나가 대놓고 킥킥대며 내게 동조했다. 요나의 도움으로 외투를 벗은 나는 급하게 황태자 바르데날도가 있다는 별관으로 향했다. 과연 평소 텅 비어 있던 별관이 사용인들로 북적북적했다. 별관 로비 전체에 훈기가 돌고, 공간이 온갖 진귀한 차향으로 꽉 차 있었다.

16558457597798.jpg“오, 관리인께서 오셨군.”

1655845747552.jpg“오셨습니까, 부인.”

소파에 앉아 차를 음미하던 바르데날도와 그 곁에서 알랑거리던 집사가 차례로 나를 반겼다. 나는 바르데날도가 나를 퍽 반기는 기색이라 묘한 기분으로 다가섰다. 로아드네스의 형님. 노에비안의 주군. 바르데날도는 론타의 성자라고 불릴 만큼 온화한 성정으로 알려져 있지만, 과연 진짜일까?

16558457475532.png“제국의 가장 큰 별을 뵙니다. 아카시아 백작의 처 블리에 아카시아입니다. 황태자 전하.”

16558457597798.jpg“아하하-.”

바르데날도는 가볍게 인사하려던 자신과 달리, 내가 깍듯하게 인사하자 멋쩍게 웃으며 맞은편에 착석을 권했다.

16558457597798.jpg“내 비의 시녀가 되었다면, 부인 역시 우리 식구나 다름없는데 앞으로는 간소하게 인사해도 좋습니다.”

긴장하며 앉은 내게 바르데날도가 따뜻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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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가진 짙푸른 눈동자와 붉은 머리카락은 론타 제국 정통성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강렬한 색상과는 달리, 적당한 크기의 눈은 살짝 처져 있었고 이목구비는 전체적으로 부드러워 노에비안이나 로아드네스에 비하면 아주 선한 인상이었다.

16558457475532.png“그래도, 어찌 제가 전하께…….”

16558457597798.jpg“나는 그리 어려운 사람이 아닙니다.”

과연, 바르데날도는 소문대로 다정했다. 누구에게든 말을 높이며 인격적으로 대해 명망이 높은 론타의 보물, 그 자체였다.

16558457475532.png“감사합니다, 전하.”

16558457597798.jpg“힘든 점은 없습니까? 규모에 비해 사용인들 수가 적기는 하지만, 대공저가 워낙 넓어 힘든 일이 많을 텐데요.”

16558457475532.png“예, 집사도 많이 도와주고 있고 제가 머무는 기간도 짧아서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스팔이 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펴고 바르데날도를 보았다. 그는 조문객들이 적는 방명록을 아주 정성스럽게 작성 중이었다. 우리가 한때 가족이었던 것을 떠올리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살아 있었더라면 바르데날도는 자신보다 어린 내게 ‘숙모님’이라 부르며 저리 정중했을 테니까.

16558457597798.jpg“내가 왔다고 해서, 부인이 내 곁에 꼭 붙어 있으실 필욘 없습니다. 대공저에서 나는 귀빈이라기보단 뭐랄까…… 상주하고 있는 친척이라 생각하면 편하니까요. 틀린 말도 아니고.”

16558457475532.png“예? 아…… 대공저에 자주 방문하신다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16558457597798.jpg“숙부님과는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고, 같은 길을 걷고 있기에 형제처럼 지냅니다.”

16558457475532.png“아…….”

16558457597798.jpg“궁 밖에 있는 또 다른 집이나 다름없지요, 여기는.”

내 짧은 질문에 꽤 성실히 대답해준다고 생각했던 무렵이었을까. 대공저에 와서 정원을 구경하는 일, 반란군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일 같은 걸 떠들던 황태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돌연 이렇게 말했다.

16558457597798.jpg“황태자비가 이런 걸 궁금해하던가요?”

16558457475532.png“!”

16558457597798.jpg“비께서 이 정도로 만족하지는 않으실 텐데.”

딱딱하게 굳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헤매는 나를 보던 황태자는 곧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6558457597798.jpg“내가 숙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그가 유능하기 때문이지 사적으로 친하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16558457475532.png“아, 네. 당연히 그러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답니다.”

16558457597798.jpg“부인. 나는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바르데날도의 유순한 눈에 약간의 열기가 어렸다.

16558457597798.jpg“나는 부디, 카스타냐 공작과 대공이 잘 지내 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어쩌면 황태자는 도리스가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러니 노에비안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대공저를 찾아 몇 번이고 했을 조문을 또 하는 것이다. 그게 나를 향한 경고인지, 도리스를 향한 변명인지는 황태자만이 알겠지만. 나라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는 그의 결연한 눈은 내게 아주 인상 깊었다. *** 황태자는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나랏일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격려하고 떠났다. 그가 올 때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는 부채감으로, 나는 대공저 입구까지 직접 걸어 그를 배웅했다. 그가 호위와 함께 멀어지는 걸 보며 서 있는데, 어디선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16558457475532.png“……로아드네스?”

로아드네스가 툭 튀어나왔다. 대공저 외부를 감시하는 인력을 어찌 따돌리고 숨어 있었는지 신통방통했다.

16558457475532.png“아까 궁으로 돌아간 것 아니었어?”

16558457475536.png“걱정돼서.”

멀어지는 바르데날도의 행렬을 잠시 지켜보던 로아드네스가 내 쪽으로 더 다가왔다. 그는 조금 불안한 얼굴이었다.

16558457475532.png“뭐가?”

16558457475536.png“그냥 다.”

움찔움찔하는 로아드네스의 손이 보였다. 저번처럼 내가 사라질까 봐 꼭 붙잡고 싶어 하는 손이었다.

16558457475532.png“괜찮으니, 얼른 궁으로 돌아가……! 네 얼굴이 지금 창백하게 질려 있어.”

16558457475536.png“…….”

16558457475532.png“이미 이 근처에 감시하는 이들을 많이 붙여 놓았지? 그러니 내가 호위 없이 나간 것도 알았던 거고.”

아차 하는 얼굴을 보자 엄하게 돌아가라 하던 얼굴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모두가 위압감을 느끼는 그의 얼굴이, 나보다 두 뼘은 큰 것 같은 그가 귀여워 보였던 탓이다. 심장 아래가 간질거리는 기분을 참을 수 없어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16558457475532.png“갑자기 궁금해서 그런데…….”

허둥지둥하던 로아드네스의 얼굴이 단번에 진지해졌다.

16558457475532.png“왜 아까 나를 제대로 이용하지 않았어?”

16558457475536.png“뭐?”

16558457475532.png“아까 그냥 내게 좀 더 다가왔다면 수도 경비대를 좀 더 빨리 쫓을 수 있었을 거야.”

맙소사. 나는 정신이 나간 걸까. 갑자기 뭘 물어본 거야. 필사적으로 버티던 얼굴과 팔이 계속 머리에 잔상처럼 남아서였을까. 어리둥절한 로아드네스의 얼굴을 보며 생각 없이 말을 꺼낸 걸 변명하려는데……. 진지해진 얼굴의 로아드네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16558457475536.png“일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친구라고 했잖아. 네가 아직 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서.”

16558457475532.png“!”

16558457475536.png“그리고…….”

로아드네스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웃고 있지만 조금 슬퍼 보이기도 했다.

16558457475536.png“……블리에 아카시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면, 네가 슬플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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