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맹추인 것처럼2021.10.13.
“마님, 어디 아프세요?”
“응?”
“열이 나시는 것 같아요.”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요나의 손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미지근한 요나의 손이 내 이마에서 뜨끈하게 데워지는 걸 보아, 내가 정말 열이 나긴 했나 보다.
“아니, 나는 괜찮아.”
“그래도요. 혹시 모르니까 마지 님께 물어 약을 가져올게요!”
요나가 미간 가득 걱정의 기운을 담고 빠르게 침실을 나갔다. 나는 아직 낯선 대공저 손님방에 누워, 부드러운 이불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블리에 아카시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면, 네가 슬플까 봐.’
블리에 아카시아에 대한 내 감정은 아주 복합적이다. 내 남편을 빼앗아 간 여자. 하지만 마땅히 벌을 받아 내게 몸을 넘겨주고 사라진 여자. 이 몸은 이제 내 것이라 선언했기에 아주 열심히 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때, 상황에 떠밀려 로아드네스와 입을 맞추었더라면 어땠을까?
‘조금…… 슬펐을 것 같다.’
노에비안도, 로아드네스도 모두 이 블리에가 내게서 빼앗아간 것 같은 옹졸한 마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울적해지려는 마음은, 절대 입 맞추지 않으려던 로아드네스의 팔과 얼굴 그리고…….
‘……네가 슬플까 봐.’
내 귀에 스며들었던 낮은 목소리를 떠올리자 순식간에 지워졌다. 어느새 해열제를 가지고 돌아온 요나가 따뜻한 물에 그것을 타서 차처럼 만들어 주었다. 초겨울의 침실 공기는 약간 쌀쌀했지만, 요나가 내 손에 쥐여준 해열차와 머릿속을 왕왕 울리는 로아드네스의 목소리가 따뜻해서 나는 춥지 않았다.
*** 이 대공저에는 도대체 몇 사람의 눈과 귀가 있는 걸까. 나는 내 눈앞에서 열심히 창문을 닦고 있는 애니의 무리를 보며 직접 만든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어렴풋이 애니가 도리스의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었다. 황태자비 정도의 뒷배라면, 그리고 그녀가 애니에게도 대공비 자리를 주겠다느니 하는 턱도 없는 말을 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카스타냐 공작이라니, 의외인데.’
도리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카스타냐 공작에, 도리스에…… 혹은 또 누군가의 눈과 귀가 내 주변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연신 내 눈치를 살피며 주변을 맴도는 마리를 흘긋 보았다. 마리는 내가 이 대공저에 있는 내내, 내게 아주 극진하게 굴었다. 대공저라는 좋은 직장을 두고, 백작저로 거처를 옮기고 싶다며 요나에게 부탁했을 정도로 이곳을 나가고 싶어하기도 했고.
‘적어도 마리의 뒤에는 그 누구도 없는 게 분명해.’
아주 약한 뒷배라도 있었다면 임시로 온 내게 매달릴 리 없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그다지 아프지도 않게 뺨을 몇 번 맞았기로서니, 그 이후로 이토록 마리를 무시하는 애니의 태도만 해도 그랬다.
“마리. 네 덕에 잘 있다가는 구나. 종종 요나를 보내 네 안부를 물으마. 애니도 그렇고 마리도 그렇고 나는 대공저 하녀들이 탐이나. 일도 잘하고, 충성스럽고……. 그렇지 않니 애니?”
안부를 묻겠다는 내 말에 마리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반면 애니는 아직도 나를 보면 움찔움찔 떨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떠나면 곧 사라질 가련함이었지만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부인, 대공께서 수도에 다다랐다는 전갈입니다.”
오늘따라 멋지게 차려입은 가스팔이 내게 다가왔다. 오늘은 노에비안이 돌아오는 날이다. 그동안 시신도 찾고, 로아드네스가 안이라는 사실도 알아냈지만 노에비안에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마리는 확실히 포섭해둔 것 같고, 애니는 일단 두고 보는 수밖에.
‘며칠만이라도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대로 떠나기가 너무 찝찝하고 아쉬워서, 나는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통통 때렸다. 대공비의 인장을 사용한 것에 대해 추궁할 권리가, 지금의 내게는 없다. 딱 잡아떼버리면 그만이니 대공비의 집무실을 뒤져볼 수도 없고.
“그렇군, 자네도 수고 많았네. 짐은 어제부터 꾸려놓았으니 난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돌아가시려고요?”
“그럼, 주인께서 곧 돌아오실 텐데 굳이 대리인이 지키고 있을 필요가 있나?”
약간 불만스러워 보이는 가스팔의 얼굴에 대고 내가 여상하게 웃었다.
“잊었나 본데. 나는 지금 대공 전하의 신하가 아니라, 황태자비 전하의 신하라네.”
가스팔이 가장 약한 부분. 황태자. 그리고 황태자와 관련된 모든 것. 내 입에서 황태자비 전하의 신하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가스팔은 더 이상 어떤 의문도 달지 않았다. 나는 짐을 옮기기 시작하는 사용인들을 보며,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쳤다. 굳이 여기서 노에비안과 마주치지 않는 이유는 참 간단했다.
‘잘 들어. 이번 엘라콘 일이 끝나고, 장례식까지 끝나면…… 나는 당신을 가질 거야.’
나는 아직도 악몽을 꾸면, 노에비안의 그때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장례식이 끝나면 블리에를 가지겠다고 말하는 단호한 목소리. 내가 죽은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맡은 엘라콘과의 일이 끝났으니 돌아오는 것일 테고 장례식까지는 약 한 달가량 남은 셈이다. 노에비안의 집무실. 그리고 대공비의 집무실.
‘그 방에 아무런 제약 없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노에비안이 무리를 해서라도 나를 대공비로 세우려 다른 귀족들의 눈 밖에 나기만 한다면……. 명예의 정점에 있는 노에비안에게 오물을 들이부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 대저택의 주인이 드디어 귀환했다. 모든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반겼지만, 특히 애니의 무리들이 가장 노에비안을 반겼다. 외투를 벗어 집사에게 맡긴 노에비안은 사용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녁에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빨리 돌아오셨습니다, 각하.”
“목욕물 준비하고. 아카시아 백작 부인도 데려와. 뭘 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이지?”
급히 온 듯한 노에비안은 장갑까지 벗어 맡기고 빠르게 답했다. 난감한 얼굴의 집사가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있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그게……. 벌써 오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뭐?”
“임무 수행을 끝마쳤으니, 황궁으로 보고를 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노에비안의 모든 행동이 뚝, 멈췄다. 블리에의 행동도, 집사의 보고도 무엇 하나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용인들을 모두 물린 노에비안은 블리에가 머물렀을 별관의 방으로 직접 향했다. 사람이 머무르지 않았던 것처럼, 벽난로 안까지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방을 보자 차가운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런 행동을 하는 블리에가 믿는 구석이 도대체 뭘까?
‘설마, 로아드네스?“
불현듯 얼마 전에 살폈던 가십지들이 머릿속을 떠도는 건 왜일까. *** 도리스는 뻔뻔하게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열심히 표정을 가다듬고 있었다. 웃고 있지만 불쑥불쑥 일그러지는 미간을 보면, 역시 그녀가 원했던 ‘남편의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불만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뻔질나게 드나든다던 황태자는 그날 딱 하루 방문했을 뿐이고, 도리스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한 황태자가 특별한 행동을 했을 리도 만무했다. 게다가 그녀가 그녀의 목적이 있었듯, 나 역시 내 목적이 중요했으므로 나 역시 아쉽기는 해도 이게 최선이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니, 정말 황태자 전하다운 말씀이군요.”
“네, 저는 황태자 전하와 그리 독대해본 게 처음이었지만 전하께서는 정말 론타의 성자라 불릴 만하셨어요!”
부러 좀 더 해맑게 답하자, 도리스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리고요?”
“……예?”
내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리스가 조금 답답한 듯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공이 유능해 가까이 두는 것이다. 나이가 비슷해 형제처럼 어울린다. 내 아버지인 카스타냐 공작과 대공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런 말 말고, 다른 말이나 행동은요?”
“아, 제가 그날 하루 종일 황태자 전하를 졸졸 따라다녔는데요.”
도리스의 눈이 조금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황태자와 독대한 것이 마냥 기쁜 사람처럼 두 손을 꼭 모았다.
“정원을 참 좋아하시더라고요. 목가적인 생활을 꿈꾸신다고도 하셨고요.”
“참 새로운 소식이군요.”
도리스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그건 그렇고, 전하. 마담 르블레아와는 진척이 있으신가요?”
“아.”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던 도리스는 마담 르블레아를 입에 올리자마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뭐, 나쁘지 않았답니다. 황실의 품위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일을 잘해주고 있어요.”
“마담 르블레아의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요?”
선물 받은 차를 대접하겠다며 멀찍이서 직접 차를 우리고 있던 노우라와 아이린이 우리가 앉아 있는 티테이블로 다가왔다. 노우라는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는데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티가 역력했다.
“두 분이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정말 궁금해서…….”
“부인, 차 맛이 너무 좋은데 퇴궁할 때 좀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
도리스가 불편한 얼굴로 차를 마시기에 나는 곧바로 노우라의 말을 끊어버렸다. 신경질적인 시선이 돌아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그래요, 나 혼자 즐기기에는 양이 좀 많다 싶었는데. 블리에도 그렇고 아이린도 갈 때 좀 가져가요. 괜찮겠죠, 노우라?”
“무, 물론이죠. 전하.”
도리스가 활짝 웃으며 나를 거들자 노우라가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답했다.
“엘라콘에서 사신이 오실 때, 마담 르블레아의 새로운 드레스를 입고 맞이하시겠군요.”
“아마도요.”
“헤어스타일도 조금 바꿔보시는 건 어떨까요?”
“음.”
나를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내리던 노우라가 금세 기세를 회복하고 제안했다.
“요즘은 검은 머리로 염색하는 것이 유행이라던데, 어떠세요?”
도리스의 눈이 커지더니 내게 의견을 묻듯이 시선을 던진다. 본래 시녀의 자리란 이런 것이다. 허드렛일은 하녀에게 맡겨두고 제 주인의 곁에서 재잘대는 것. 그리고 나는 노우라의 말이 결코 그녀 혼자만의 의견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온화한 듯 보이는 도리스의 눈이 정확히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반응을 살피는 도리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담 르블레아가 나를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와 흡사한 차림이었다.
“그건 싫은데요.”
쨍! 노우라는 내가 그런 답을 할 줄은 몰랐는지 소리 나지 않게 저어야 하는 티스푼을 결국 찻잔에 부딪히고 말았다.
“뭐라고요?”
“전하께서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하시면, 같이 다니는 제가 비교되어 볼품없어 보일 것이 분명하잖아요?”
나는 조금 생각 없이 맹한 여자처럼 말했다. 노우라는 물론이고 굳어 있던 도리스의 눈이 강하게 흔들렸다.
“저는 ‘황태자비 전하 곁에 있는 못난이’라 불리고 싶지 않은걸요. 그리고……. ”
도리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데도, 나는 여전히 나와 흡사하게 차려입은 그 옷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혹시 전하께서 검은 머리를 하신다면, 제가 전하같이 진한 밤색 머리로 염색해도 괜찮을까요?”
“!”
“주세타 자작 부인께서 잘못 알아 오신 게 아닐까요? 다들 밤색으로 염색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황태자비 전하와 비교될까 봐 쉬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
나는 맹해 보이려 하면서도 진심 가득한 눈으로 그리 말했다.
두 눈을 끔뻑이며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하던 황태자비 도리스가 품에서 부채를 꺼내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떨며 웃었다. 반면 노우라는 감히 도리스의 앞에서 내게 면박을 주지도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제대로 식히지도 않은 뜨거운 차를 입에 댔다. 혓바닥이 발랑 까질 것 같은 기분일 테다. 하지만 그녀는 노련한 귀부인답게 그것을 티도 내지 않았다.
‘누군가가 너를 시험하려 할 때는 말이야, 그저 맹추인 것처럼 행동해.’
‘맹추?’
‘예의는 부족할지라도 악의가 없다는 듯 말하란 뜻이야.’
‘왜?’
‘그래야 너를 공격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지.’
나는 불현듯 비앙카와 데뷔탕트를 준비하던 시절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도리스는 혼자 조용히 웃던 것을 멈추고 부채 뒤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흡족한 듯 만족스러운 얼굴이 기이하게 빛났는데, 나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면서도 묘하게 턱이 꼿꼿하게 들려 있었다. 내가 사람의 심리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분명 내게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
‘나를 따라 하면서도 내게 우월감을 느낀다라.’
그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이 무리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것 같아 나는 조금 안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