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내가 졌어2021.11.20.
한참 잇새로 낮은 욕설을 짓씹은 노에비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블리에의 입에 제 입술을 맞댔다. 거친 손길로 여자의 뒷통수를 잡아 끌어 제 무릎에 앉히고는 정신없이 입안을 탐했다. 블리에는 전처럼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꿀처럼 흐르는 목소리와는 달리, 열렬히 응하지도 않았다. 몇 달을 사막에서 방랑했던 사람처럼 욕심을 채운 노에비안은 눈을 뜬 상태로 자신을 보고 있는 블리에를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자신으로 인해 촉촉이 젖은 블리에의 입술은 못 견딜 만큼 방탕하고 유혹적으로 보였지만, 표정은 금욕적이기 그지없어 기묘한 낯섦을 선사했다.
“……당신이 졌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입맞춤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일까.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이 여자의 생각이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착각하지 마.”
반사적으로 내뱉은 대답에 블리에는 약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연스럽게 그 얼굴에서 아드리엔을 떠올린 노에비안이 인상을 왈칵 구겼다. 여자는 어떤 원망도 없이, 그의 무릎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붙잡을 새도 없이 마차 밖으로 나갔다.
“……대답 잘 들었어요.”
탁 소리 나게 마차 문을 닫은 여자가 미련 없이 뒤돌아 멀어졌다. 노에비안은 순간, 뛰쳐나가 여자의 양팔을 그러쥐고 소리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도대체 그 조막만 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사랑 타령하는 여자에게 입을 맞추고, 중요한 용건을 앞두고 감정을 앞세우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낯선 충동이었다. 떠나는 여자의 모습을 견디기가 몹시, 힘들었다.
*** 노에비안이 대공저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황태자 바르데날도의 호위가 대공저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 그는 거칠게 풀어 헤치려던 크라바트를 다시 꾹 쥐고 별관으로 향했다. 귀부인들이나 좋아할 법한 티테이블에서 여유롭게 차를 즐기고 있던 황태자가 그를 보자마자 손 하나를 들어 친근하게 인사했다. 노에비안은 정중히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자연스레 그 앞에 착석했다.
“환송식은 끝나셨습니까?”
바르데날도가 선선하게 웃으며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노에비안은 바르데날도의 뒤에 서 있던 집사 가스팔에게 밖으로 나가라 눈짓하고 그에게 집중했다.
“에페로의 귀국이 더 빨라질지도 모릅니다. 사신단이 오랜만에 제국에 와서, 꽤나 만족하고 돌아간 터라 에페로에게 귀국을 종용할 확률이 높습니다.”
바르데날도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노에비안은 빠르게 그 봉투를 열어 확인하곤 인상을 구겼다.
“카스타냐 공작이, 숙부가 법안 폐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일로 꽤 화가 났습니다.”
“거기 참석했다 한들, 제가 그 법안 폐지에 동의하지 않으리란 걸 알 텐데 말입니다.”
“싸워 보고 패배하는 것과 싸워보지도 못한 것은 다르니까요.”
씁쓸하게 웃던 바르데날도가 싸늘한 노에비안의 눈치를 힐끔 보더니, 살짝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카스타냐 공작이 직접 나서서 에페로를 데려오기 전에, 그의 요구 하나쯤은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숙부.”
“법안을 폐지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내 상속법이 있었기에 돌아가신 레티나 황후 폐하의 어머니, 전하의 외조모께서 윈스턴 후작이 되었고, 그 세력이 전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와 그 법안을 폐지한다고 하면, 윈스터 후작이 좋게 생각하겠습니까? 안정을 찾았으니 버려지는 거라 생각할 게 분명합니다.”
노에비안에게서 쏟아지는 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전개라 황태자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법안 폐지에 관한 회의는 1년에 한 번밖에 할 수 없으니 이미 카스타냐 공작은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에페로가 올해 안에 귀국한다면, 궁에 또 다른 피바람이 불지도 모릅니다.”
“공작이 억지를 부리는군요. 그렇다고 해서 회의를 또 열 수는 없을 겁니다.”
노에비안은 와중에 듣는 귀가 없는지 재빨리 응접실을 한번 두리번거렸다.
“그 역시 그것을 인지해, 이번엔 좀 색다른 것을 요구하더군요.”
“……그가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대공비 자리에 자신이 추천해주는 인물을 넣어 달라 하던데,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하. 노에비안은 봉투를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식어버린 차로 속을 달랬다. 대공비 자리에 입을 벌린 자들이 이리 많았단 말인가.
“아직 대공비의 장례가 끝나지도 않았고 저는 상중입니다. 끝나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시간을 더 끌어볼 수는 없겠습니까?”
“숙부답지 않은 방식이군요.”
황태자는 장갑을 낀 상태로 비스킷을 집어 먹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턱을 움직여 비스킷을 씹기 시작하자, 노에비안은 저가 실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을 끌어볼 수는 없겠냐니. 노에비안 트로비카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누구를 추천한다 했습니까?”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
응접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그는 몸을 굳히고 눈만 굴려 그를 응시했다.
“얼마 전에 미망인이 된, 그대 가신의 부인 말입니다.”
*** 사신단 환송식 다음날. 마담 르블레아가 신나게 휘젓고 간 황태자비 궁은 아직도 그 열기로 후끈했다. 드레스의 가봉이며 드레이핑을 직접 마담이 와서 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얼굴도장을 찍겠다며 아이린이 참석했고, 그에 어울리는 보석을 추천하기 위해 노우라 역시 디자인 하나하나를 선보일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를 만큼 칭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인형 놀이의 주인공인 도리스의 기분은 내내 저기압이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표정이라, 나는 그녀와 독대할 기회만 노렸다. 함께 있던 노우라와 아이린을 내보내는 건 아주 간단했다. 남편을 잃은 지 며칠 안 된 미망인의 얼굴에 아주 약간의 슬픔만 어려도 그들은 수십 가지의 짐작으로 자리를 비켜주기 때문이다. 특히 노우라는 이번 사신단 환영식에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지만, 내가 미망인이라는 것만 상기시켜주면 기세가 한풀 꺾이고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노우라가 드레스에 붙이면 예쁘겠다며 잔뜩 놓고 간 보석 샘플들이 눈에 들어오자 얼마 전 마담에게서 들은 말들이 떠올랐다.
‘제가 보기엔, 황태자비 전하께서 2황자 전하께 관심이 지대하신 것 같아요.’
‘왜죠?’
‘늘 제게 수도 영애들의 가십을 물어보시는데, 아닌 척하셔도 은근히 2황자비를 노리는 영애는 없느냐는 질문이 따라붙거든요.’
‘궁금해 하실 수도 있지요.’
‘순진하시긴! 부인. 황태자비 전하께서 왜 부인을 따라 하겠어요?’
그러게. 왜 따라 할까. 굳이. 로아드네스와의 스캔들이 가십지에 아주 크게 난 뒤로, 마담의 의상실에는 그 가십지를 오려와 비슷하게 꾸며달라는 영애들이 드문드문 찾아온다 했다. 고상 떠는 대귀족가에서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 치수만 알려주고 그대로 만들어달라는 요청까지 한다고 했고. 그들이야 늘 새롭게 유행을 주도할 여인을 따라 움직이는 철새 같은 사람들이라지만, 일국의 황태자비가 굳이 날 따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밀어두었던 생각이 마담의 말로 인해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2황자 전하와의 스캔들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도리스의 이 질문에서도.
“제게 실망하셨나요?”
“…….”
도리스의 진득한 시선이 날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음울하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2황자 전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긴 했지만, 저는 그분의 마음에 보답할 수 없어요.”
“평민 출신의 황자비가 나오는 게 아니냐며 떠드는 곳도 있다더군요. 물론 부인은 지금 귀족이니 그런 의견들은 비약이지만요.”
“남편이 세상을 등졌으니, 이제는 전하께 진실을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나는 눈물이라도 떨굴 것 같은 얼굴로 도리스를 바라봤다.
“전하, 저는 대공비 자리와는 상관없이 아주 오래전부터 트로비카 대공 각하를 마음에 두었어요. 2황자 전하께서는 그분께서 아시는 누군가와 제가 닮아서 호감을 보이시는 것뿐이고요.”
내가 계속 말을 할수록, 어쩐지 못마땅하게 늘어져 있던 도리스의 입꼬리가 점점 솟아올랐다. 그제야 난 확신을 얻었다. 도리스는 로아드네스를 마음에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로아드네스의 첫사랑이 나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확신을 얻자 입을 나불거리는 건 쉬웠다.
“세상에서 가장 탐이 나는 신랑감이 저를 원한다 해도, 제가 마음에 담아두고 계신 분과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요?”
로아드네스에게 마음이 있으면서 결국 황태자비가 된 도리스라면 이런 사랑 타령을 공감해줄 테니까.
“황실에 누가 될까 봐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해요. 전하. 하지만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저로서는, 대공 각하의 곁에 서기 위해 뭐라도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오, 이런.”
도리스의 얼굴 가득, 아까까지는 없던 다정함이 피어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에 살포시 앉은 도리스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하듯 도닥여주었다.
“내가 그대를 모른 척하리라 생각했나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도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새로운 남편이 필요하잖아요, 부인.”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필요해요. 전하.”
눈치는 없지만 맡은 일은 잘하는 시녀, 블리에. 출신이 빈약해 반드시 연고가 있어야 대공비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여자. 로아드네스의 곁에서 아드리엔이라는 미련을 떼어버릴 수 있고,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용하고 버려도 되는 사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저 기다려요. 부인.”
그게 지금의 나일 테니까. 하지만 도리스가 짜놓은 판에는 아주 약간, 작은 구멍이 있다.
“감사합니다, 비 전하.”
나는 그녀에게 이용당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날 기다리고 있던 서신 하나를 펼쳐 들었다. 「내가 졌어.」 휘갈겨 쓴 듯한 노에비안의 서신이었다. 도리스가 카스타냐 공작과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공작이 황태자를 압박한 것은 아이린으로부터. 황태자가 노에비안을 찾아가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것은 마리를 통해 이미 전해 들었던 참이다.
‘졌다는 말조차도 거짓일 테지. 노에비안.’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내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크게 터트렸다. 성큼성큼 걸어 책상 위에 펼쳐놓은 블리에의 일기장을 들고 꽉 쥐어보던 나는 곧이어 책상 위에 놓인 탁상 거울을 보고 물었다.
“네가 원한 대로 됐어.”
블리에는 웃고 있었다.
“……이젠 내게 뭘 보여줄래?”
늘 저 좋을 대로 나불거리며 날 옥죄던 여자는 내게 단 한마디도 없이, 충혈된 눈을 하고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