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새로운 대공비 내정자2021.11.24.
짐스커의 아버지이자 황태자파인 레일론 백작을 시작으로 말을 타고 달려온 몇몇 가신들의 행렬이 대공저 앞을 빼곡히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공 노에비안과의 독대를 신청하며 대문을 열어줄 때까지 밤샘도 불사할 것처럼 굴었다. 모두 차기 대공비의 내정자를 위한 신분, 즉 그럴듯한 양녀 자리를 내놓으라 요청을 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이들이었다. 저택 안에서 작은 소란을 지켜보던 노에비안이 창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처음 블리에의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그들에게 협조를 구했을 때와 비슷했지만,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레일론 백작보다 일찍 대공저로 와 있던 바르데날도는 이런 소란을 예상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읽고 있던 신문을 흔들어 보였다.
“곧 이 신문이 다시 한번 숙부의 결혼식으로 도배가 되겠군요.”
“아니요, 전하. 이번에는 그리 요란하지 않을 겁니다.”
노에비안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푸석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집무실 책상에 무너지듯 앉은 그를 미소 띤 얼굴로 보던 바르데날도가 들고 있던 신문을 접었다.
“어려운 결정을 했습니다, 숙부.”
“그 여자가 제멋대로 날뛰는 꼴을 보느니, 제 감시 아래에 두는 게 훨씬 나으니까요.”
“하지만 좀 섣부른 판단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카스타냐 공작이 원했던 건 이런 방식이 아닐 텐데 그가 보기엔 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것 같아 보일 테니까요.”
노에비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픽 웃었다. 황태자의 말대로, 카스타냐 공작이 원하는 건 저로 인해 신분이 세탁된 블리에가 정식으로 대공비가 되어 거슬리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일 테니까. 카스타냐의 끄나풀로 스파이 짓을 하게 두느니, 블리에가 그토록 원하는 사랑 타령에 장단을 맞춰주고 데려와 도리스와의 인연을 아예 끊게 하는 게 이득이었다.
“이 시기에 제가 ‘2황자의 연인’을 빼앗았다는 기사가 한 줄이라도 나면 그다지 좋지 않을 겁니다. 내정만 해두고 대공비로 올리는 것은 대공비의 장례식이 끝난 이후로 일정을 잡겠다 말하겠습니다. 그마저도 최대한 일정을 미룰 겁니다.”
“……그 부인 말입니다, 숙부.”
어느새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은 황태자가 묘한 빛으로 웃고 있었다.
“아무런 사심 없이, 나를 위해 숙부 곁에 두려는 게 맞습니까?”
“무슨 뜻이십니까?”
“나는 피레타 공녀의 얼굴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집무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바르데날도의 눈은 순진무구했다.
“갖지 못했던 걸 대신해서, 비슷한 것이라도 곁에 두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까?”
“그 여자가 대공비 자리에 가당키나 한 여자입니까?”
노에비안이 입매를 비틀며 덧붙였다.
“카스타냐 공작의 압박이 아니었다면, 전하 역시도 반대하셨을 겁니다. 그 여자의 얼굴이 어떻든 간에 말입니다.”
황태자는 약간 언성이 높아지려는 노에비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다정한 얼굴에는 어느새 걱정이 어려 있었다.
“숙부가 공녀를 아꼈던 마음은 조카인 제가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숙부가 늘 이 조카를 위해 희생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이 일은 전적으로 숙부에게 맡기겠습니다. 카스타냐 공작이 원하던 방식은 아니지만, 적어도 도리스와 연이 있는 부인이 대공비 내정자로 정해진다면 숙부가 최대한 양보했다는 걸 알 테니까요.”
바르데날도가 그의 어깨를 한번 도닥이고는 유유히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노에비안은 작금의 이 상황이 꿈만 같아 한숨도 자지 못했던 지난밤을 반추했다.
‘당신은 아카시아 백작을 이용해 날 흔들려 하고, 나는 2황자 전하를 이용해 당신을 흔들려고 하고. 결국에 우리가 원하는 건 같아요.’
‘아무런 사심 없이, 나를 위해 숙부 곁에 두려는 게 맞습니까?’
밤새 곱씹었던 블리에의 목소리와 방금 머물렀던 황태자의 목소리가 교차로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가질 수 없는 것에 시간을 빼앗기기보다, 가질 수 있는 나를 가지세요.’
‘갖지 못했던 걸 대신해서, 비슷한 것이라도 곁에 두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까?’
노에비안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가지지 못한 아드리엔에 대한 욕망이 망령이 되어 제 온몸을 휘감고 비웃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장단이나 맞춰주려 졌다고 보낸 서신을 보고, 저택이 떠나가라 웃었을 여자를 생각하면 속이 마구잡이로 뒤틀렸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선 그 여자를 대공저로 들이는 게 결국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자마자, 노에비안이 별안간 눈앞에 놓인 크리스털 물잔을 집무실 문으로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가, 각하?”
“……가스팔.”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에 가스팔이 헐레벌떡 집무실로 들어서다 멈칫했다. 바닥에 널부러진 유리 파편들은 척 봐도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식을 대로 식어 있는 주군의 얼굴이었다.
“방을 새로 하나 꾸며라.”
“예? 무슨 방을…….”
“곧 새로운 대공비 내정자가 들어올 예정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정식으로 발표할 때까지는 극소수만 알고 있을 정보이니 사용인들 입단속을 잘해야 할 것이다.”
“대공비 내정자라 하심은…….”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
“!”
“가엾은 미망인을 홀아비 주군이 거두려 한다…… 대충 그리 둘러대도록.”
그리 인정 많은 주군이 아님을 뻔히 아는 가스팔의 시선에도, 노에비안은 별다른 첨언 없이 그를 집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 빠르게 가스팔을 따라붙은 하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이미 저택 입구에서 레일론과 가신들이 시위하듯 말하는 내용을 주워들은 지 오래였기에 다들 동요하고 있었던 터였다.
“무슨 일이에요, 집사님?”
“레일론 백작 영애가 새로운 대공비가 되나요?”
“자, 다들 주목.”
노에비안의 집무실 앞을 벗어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가스팔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애니의 무리와 그 곁에 멀찍이 떨어져 떨고 있는 마리에게로 향했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저택에 새로운 안주인이 드실 예정이다.”
“맙소사!”
“정말인가요?”
“벌써? 장례가 끝나자마자요?”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손으로 꾹 눌러 막은 하녀들은 묘한 기대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눈으로 가스팔을 바라보았다. 특히 애니가 가장 그러했다.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이 대공비 내정자가 되셨다. 불편함 없이 모실 수 있도록 방을 꾸미기 시작할 테니, 하녀장에게도 알려 지시를 받고 움직이도록.”
“말도 안 돼!”
애니의 낮은 비명에 고개를 젓던 가스팔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애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애니를 그녀의 무리가 붙잡아주었다. 애니는 입속을 꼭 깨물고 마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모든 게 순조로워서 이상할 지경이었다. 마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공의 집무실에서 나온 가스팔이 새로운 대공비 내정자인 블리에 아카시아 백작 부인을 위해 방을 꾸미라 지시했다고. 입궁하자마자 나를 크게 반기는 기색이던 도리스의 태도를 보아, 대공저에 그녀의 눈과 귀가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녀가 모르는 게 있다면, 노에비안이 카스타냐 공작가의 가신과 연을 맺기 위해서가 아닌 ‘가엾은 미망인을 홀아비 주군이 거둔다’는 감상적인 명목으로 날 대공저에 가둘 심산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중에 좋은 소식을 얻을 사람이 있답니다.”
도리스의 즐거운 목소리에 노우라가 눈에서 빛을 냈다. 도리스는 최근 큰 행사를 끝내자마자 마담 르블레아에게서 드레스를 받는 일에 박차를 가했는데, 그 옷과 어울리는 보석을 공급하기 위해 노우라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기 때문이다.
“블리에가 차기 대공비 내정자가 되었답니다.”
“……예?”
기대감으로 반짝이던 노우라의 얼굴이 쩌저적 갈라졌다. 나는 도리스를 보며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던지, 도리스가 곁에 있던 내 손에 제 손을 올리며 방긋 웃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비 전하?”
“말 그대로예요. 갑작스럽게 들리겠지만, 사실 나는 예전부터 블리에와 대공의 마음을 알고 물심양면 도왔답니다. 워낙 화제의 중심에 있는 대공이라 모두에게 비밀로 한 점 서운해하지 말아요. 물론 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다들 입조심 해야 하고요.”
“부, 부인이 어떻게 대공비가…… 농담이신가요?”
“노라.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이나요?”
도리스가 차갑게 대꾸하자 노우라의 떨리는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나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 도리스는 준비할 게 많을 거라며 배려하듯 나를 일찍 퇴궁시켰다. 마차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부인! ……부인!”
노우라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힐끗 뒤를 돌아보자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의 노우라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설명이, 설명이 필요해요!”
“……무슨 말이 듣고 싶죠?”
“어떻게 부인이 대공비씩이나 되는 자리에 오른단 말인지 저는 이해가 안 가요. 부인은 미망인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대공 전하 역시…….”
“그러니 둘이 이루어지는 데 장애물이 없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고 비 전하를 모셨군요.”
노우라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나를 보았다.
“어차피 부인의 출신 때문에 대외적으로 나서지도 못할, 이름뿐인 대공비일 텐데요. 도대체 무슨 꿍꿍이예요? 개인적인 감정이라고는 하지 말아요. 겨우 그런 이유로 비전하를 이용하려 했다면 그게 더 괘씸하니까!”
나는 우리 주변에 듣는 귀가 없는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제 목소리가 꽤 높았다는 걸 알았는지 노우라가 입을 다물었다.
“부인이야말로, 비 전하의 드레스에 부인이 파는 보석을 붙이지 못해 안달이던데. 그에 비하면 나는 꽤 낭만적인 이유가 아닌가요?”
“아뇨. 나는 달라요. 믿지 못할, 신뢰라고는 하나도 없는 부인 같은 사람이 비 전하의 곁에 있는 게 걱정되고요.”
“내가 보기엔 부인에 대한 신뢰가 더 떨어지는걸요. 나는 적어도 돈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노우라는 아주 큰 모욕을 받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충혈된 눈은 며칠은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처럼 번들거렸고 언제든 내게 욕을 퍼부을 준비가 된 듯 번뜩였다. 나는 낮게 한숨 쉬었다.
“차라리 나와 사이좋게 지내는 건 어떤가요? 다른 건 몰라도 돈은 확실하게 벌게 해 줄 텐데요.”
“나를 모욕하지 말아요. 비 전하를 모시는 내 마음은 진심이니까요.”
“어머, 하지만 그러면 설명이 안 되는 걸요.”
나는 보란 듯이 부채를 촤락! 펼치고 여유롭게 팔랑거렸다.
“비 전하께서는 가끔 부인의 이름을 잊으신 것처럼 ‘노라’라고 부르시며 은근히 무시하시는 것 같던데. 제 착각인가요? 이름도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그런 모욕을 받으면서도 보석 하나라도 더 비전하께 선뵈려 애쓰는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던데요.”
“……당신이 뭘 알아.”
눈알이 벌게져선 노우라가 씹어 뱉는 말에 나는 낮게 웃었다.
질투심에 이성을 날려버린 노우라 주세타와 입씨름하는 것은 내게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노에비안이 날 도리스와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라면, 마담 르블레아나 순진한 아이린보다 영악한 눈과 귀가 필요하기도 했다.
“부인. 당신은 내가 대공비가 아니라 정말 ‘황자비’자리쯤은 올라가야 내게 고개를 숙일 생각인가요?”
“!”
내 말에 점점 분노하는 듯하던 노우라의 눈이 커졌다. 내가 은근히 하대하는 것을 분명 느꼈을 테다. 나는 로아드네스와 내 가십을 부지런히 물어다 나르고, 그와 함께 참석했던 파티장에서 우리가 어땠는지 도리스에게 보고한 사람이 노우라일거라 확신했다. ‘황자비’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테고. 가십지에 나오는 평민 출신의 미망인이 황자비가 될 가능성 같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까지 모조리 도리스에게 알렸을 테니까.
“날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날 친구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거예요. 부인의 말대로, 근본도 없는 내가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부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해왔으니까.”
죽었다 살아나는 일 정도는 겪어야 할 수 있는 말이라 나는 당당했다. 노우라는 억울한 듯 입을 달싹거리다가, 오늘 도리스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기로 예정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하자 나를 쏘아보곤 바람같이 사라졌다. 나는 딱히 그녀를 탓하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꽤 오랜 기간 사교계에서 세력을 떨쳐왔고, 도리스의 시녀로 사는 동안 차올랐을 노우라의 자긍심을 건드렸으니 시간을 줘야 했다. 어찌 되었든 겉으로나마 현재 가장 총애받고 있는 사람은 나였고, 노우라는 은근히 무시를 받고 있으니 쌓인 불만도 많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