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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왜 나를 죽였어? (74/171)

74. 왜 나를 죽였어?2022.01.15.

나는 나를 꾸며주면서도, 히끅 하며 숨을 들이켜는 하녀들을 모른 체했다. 작정하고 아드리엔의 드레스를 입고 꾸미자, 내가 봐도 나는 그저 아드리엔이었다. 치장을 마치자마자 모두를 물렸다. 요나는 아침까지 아카시아 백작저로. 마리는 제 본가로. 갑작스러운 명령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질 무렵엔 애니만 콕 집어 노에비안의 침실을 지키도록 했다. 애니는 감격한 얼굴로 기꺼이 따랐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으며 나는 미친 여자처럼 웃었다. 대공비의 침실 문을 열고, 소란스러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별관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뭐라 뭐라 소리치며 발을 구르던 그레고리와 비앙카가 결국엔 억지로 들어가고야 마는 꼴을 보자 눈물이 터졌다.

16558464242676.jpg“오빠, 오빠 미안해…….”

애써 다시 한 화장이 번지는 걸 알면서도 차마 부르지 못했던 이름들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16558464242676.jpg“미안해, 언니. 미안해…….”

하지만 내가 멈출 수 없는 건 눈물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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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가운 슬픔과 뜨거운 분노를 반복해서 겪은 노에비안은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그는 미지근한 목욕물 아래에서 이전보다 많이 마른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가 남편이라도 되는 양 블리에를 보호하던 황자의 눈은 도저히 연기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 눈으로 언젠가는 아드리엔을 보았을 것이고 원했겠지. 블리에 아카시아를 보는 눈이 그만큼 애틋했으니 아드리엔은 말해 뭘 하겠는가. 동시에 가만히 그 품에 안겨 있던 블리에의 얼굴을 떠올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런 감각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짙은 혐오로 그는 몸부림쳐야만 했다. 블리에 아카시아만은 온전히 그의 것이어야 했다. 이 거대한 제국, 저택, 심지어 아드리엔 마저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데 제 손으로 환골탈태시킨 블리에 마저 자신의 것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 여자가 무엇이라고. 그 여자가 도대체 무엇이라고 가지지 못한단 말인가? 아카시아 백작은 죽었고. 아드리엔의 장례는 끝났다. 가신이라 이름 붙인 불충한 자들과는 이미 틀어질 만큼 틀어졌고, 그나마 쥐고 있던 동부 사람들마저 오늘을 기점으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처음에는 더 큰 대의를 위해서였지만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었다. 블리에 아카시아라는 그 하찮고 신경 쓰이는 여자를 얻기 위해 필요 이상의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 여자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무언가 행동을 했으면 얻는 게 있어야 한다는 기본 명제에는 격하게 공감했다. 그런 신념마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고서야, 자신의 피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아드리엔에 대한 마음을 그녀의 시신과 함께 묻고서야, 블리에를 완전히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는 물기조차 제대로 닦지 않은 몸으로 옷을 대충 꿰입었다. 제대로 몸을 닦지 않아 옷이 치덕이며 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감각마저 아드리엔에 대한 제 미련이라 생각했던 어리석은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제는 정말 남은 게 없다. 황태자파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은 누군가에게 넘겨줄지라도, 블리에 아카시아를 제 아래에 깔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동이 들었다. 그는 옷을 입고 나오자마자 술병을 따서 목에 들이부었다. 목이 타들어 갈 만큼 독한 술이었으나 이전부터 계속 마셔왔던 것이라 익숙했다.  

16558464242676.jpg‘노에비안 왜…… 나를 배신했어?’

  아직 아드리엔의 침실에 발도 들이지 않았는데, 습관처럼 그 목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배신이라니 당치도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제 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배신이라 할 수 있나? 아드리엔을 향한 지독한 외사랑은 저 혼자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살아 있을 때도 죽었을 때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건 누구인가. 이미 죽어버린 아드리엔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노에비안은 익숙한 듯 대공비의 침실로 향했다. 블리에에게 그토록 원하던 대공비의 침실을 주었으니, 자신도 무언가를 가져야 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걷던 노에비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차림으로 창틀에 걸터앉은 블리에를 보았다. ……아드리엔의 옷을 입은 블리에였다. 로아드네스가 나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사정없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격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이토록 무언가에 화를 내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분노였다. 쨍그랑! 들고 있던 술병이 두꺼운 카펫 위에서 날카롭게 깨졌다. 그만큼 세게 집어던진 것이었다. 그는 밖을 내다보고 있는 블리에에게 성큼 다가가 턱을 잡았다. 작은 턱이 손쉽게 잡혔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가고 싶어 하던 눈이 원망 섞인 눈동자로 돌변해 자신에게로 향하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 자체가 화가 났다.

16558464242694.jpg“내가 말했지. 그때 내가, 분명히.”

고개를 움직이려는 블리에의 턱을 더 거세게 그러쥔 그가 으르렁거렸다.

16558464242694.jpg“내가 엘라콘에서 돌아오고, 대공비의 장례식까지 끝나면, 널, 가지겠다고.”

흠칫하는 블리에가 느껴지자 그가 더 바짝 다가갔다. 창문과 그의 몸 사이에 단단히 낀 블리에는 숨도 못 쉬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그 눈빛이. 빌어먹게도 아드리엔과 똑같아서 기분이 엿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가지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16558464242694.jpg“네가 예뻐서 대공비의 침실을 준 것 같나? 너 따위가 내게 강아지 새끼처럼 예쁜 짓을 해서?”

16558464242676.jpg“…….”

16558464242694.jpg“천만에. 사랑을 나눈다면 이 침실이 좋다며? 그래서 준 거야.”

16558464242676.jpg“…….”

16558464242694.jpg“네 입으로 말했으니, 약속을 지켜. 나는 약속을 지켰고, 널 가질 거야. 지금 당장.”

우악스럽게 끌어당긴 허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노에비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뒤통수를 강하게 붙들어 당겨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빌어먹게 달콤하고, 빌어먹게 부드러웠다. 그리고 여자는 한참이나 목각인형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노에비안이 온몸을 부서져라 껴안고 더듬어도 꿈쩍도 안 했다.

16558464242694.jpg“……왜, 로아드네스. 그 불길한 새끼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블리에는 울고 있었다. 뜨겁게 끓어오르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16558464242694.jpg“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그 새끼랑 가십지에 더러운 소문이 돌 때부터 그냥 너를 가졌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물렀지. 죽은 대공비를 방패 삼아 날 가지고 노니까 좋았나?”

그는 표정 변화 없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울고만 있는 블리에의 얼굴을 보며 미칠 것 같은 심정을 여과 없이 폭발시켰다.

16558464242694.jpg“로아드네스는 다를 것 같나? 아드리엔을 가지지 못해 몇 년을 수도 근처에도 안 온 사내야. 그가 좀 어울려준다고 해서, 착각하지 마.”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제멋대로 침실 안을 맴돌았다.

16558464242694.jpg“그 역시 네게서 아드리엔을 보는 거지 널 보는 게 아니니까.”

도저히 말을 고를 수도, 고르고 싶지도 않았다.

16558464242694.jpg“나는 그 새끼랑 달라. 네까짓 게 좀 운다고 해서 다 해결해 주지 않아, 그저 가질 뿐이지.”

이 여자가 어느 틈에 제 마음에 들어와 자신을 다 파괴해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용품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아드리엔의 옷까지 입고 아드리엔의 침실에서 그 누구도 아닌 로아드네스를 떠올리며 우는 얼굴을 하자 생전 느껴보지 못한 폭력적인 감정이 온몸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제 타액으로 축축해진 블리에의 입술이 열린 건 그의 분노가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엇이든 부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부숴버리고 싶은 대상이 눈앞의 여자일 때, 지저분한 감정의 원흉이 입을 열었다.

16558464242676.jpg“로아드네스 님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16558464242694.jpg“……뭐?”

기어코 로아드네스의 이름이 그 입에서 나오자 그는 블리에의 어깨를 세게 그러쥐었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16558464242676.jpg“……내가 로아드네스 2황자에게 끌리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16558464242694.jpg“입, 닥쳐.”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주제에, 나오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음산했다. 노에비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라는 구질구질한 말이 혀를 굴려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핏발 선 그의 눈을 피할 생각도 없는지 더 음산한 목소리를 냈다.

16558464242676.jpg“저는 새것이 좋아요.”

노에비안은 여자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16558464242676.jpg“저를 로아드네스 님께 보내주세요.”

16558464242694.jpg“건방지긴, 감히…….”

16558464242676.jpg“억울하세요, 전하?”

여자의 눈에서 더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에비안은 여자가 미쳐서 로아드네스를 언급하며 그에게 보내 달라는 말 따위나 하는 걸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재갈을 물려서라도 입을 막고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16558464242676.jpg“억울하실 것 없잖아요. 어차피 유부남이셨으면서.”

여자가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지는. 이 여자는 미친 게 분명했다. 제 주제에 맞지도 않는 자리를 탐내다가 생각보다 큰 반대에 부딪혀서. 피레타 사람들이 자신의 뺨을 때리고, 노에비안이 우악스럽게 입을 맞추어서.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어깨를 그러쥔 손을 풀었다.

16558464242676.jpg“저는 새것이 좋아요.”

늘 버릇처럼 지껄이던 여자의 말이 못 견디게 거슬렸다.

16558464242676.jpg“생각해 보니 그렇잖아. 굳이 나누자면 전하는 ‘헌것’ 이잖아요. 로아드네스 님은 아니고요.”

16558464242694.jpg“……미쳤나?”

16558464242676.jpg“내 말을 잘 기억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요.”

16558464242694.jpg“입 닥치라고 했어.”

16558464242676.jpg“늘 말했잖아요? 나는 새것이 좋다고. 대공비의 침실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다…… 그런 말 말고 이것도 기억해줬다면 좋았을걸.”

노에비안이 웃음을 터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주제를 모르고 로아드네스를 입에 올려 자신을 화나게 하려는 영악함에 치가 떨리고 우스웠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선득했다. 어차피 유부남이었으니, 억울해하지 마라. 자신을 로아드네스 님에게 보내 달라. 굳이 따지자면 너는 새것이 아니다. 헌것이다. 나는 늘 새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지 않느냐. 그저 거슬려서 닥치라고 대답했던 그 말들이 제 몸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 모든 말들이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16558464242694.jpg“……나를 떠나기라도 하겠다고?”

16558464242676.jpg“네.”

여자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온몸을 소용돌이치던 분노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주제에 내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행동이었지만 자신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여자에게는 어떤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가정해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블리에의 앞에서 뒷걸음질 쳤다. 여자는 미동도 없이 그를 응시했다. 눈빛은 여전히 음산했다. 아드리엔처럼 자신만 바라보고 사랑한다 속삭이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16558464242694.jpg“도대체 뭐가 문제지, 블리에?”

  *** 노에비안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어느새 달빛이 쏟아지는 창가에서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았다. 술 냄새는 진동을 하고, 언제나 단정하던 매무새는 흐트러져 있는 노에비안. 예전에는 낯설었지만 블리에 아카시아가 되고 꽤 익숙해진 모습이기도 했다. 지난 2년간의 결혼 생활보다 지금 2달간의 동거 생활 동안 그를 더 잘 알게 된 기분이 들어, 나는 피식 웃었다.

16558464242694.jpg“우습나, 이 상황이?”

16558464242676.jpg“조금.”

16558464242694.jpg“……뭐?”

잠깐이나마 멀찍이 떨어져 있던 노에비안이 서서히 걸어왔다.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바라던 바였다.

16558464242694.jpg“대공비가 되고 싶다며.”

16558464242676.jpg“별로.”

16558464242694.jpg“뭐?”

16558464242676.jpg“별로. 흥미가 떨어졌어, 대공비 자리에.”

스스럼없이 놓은 말. 그토록 원하던 대공비자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에 노에비안은 뒤통수라도 걷어차인 표정으로 나를 봤다.

16558464242694.jpg“너 같은 걸 대공비로 만들기 위해, 지금…… 얼마나…….”

16558464242676.jpg“화나? 당신이 먼저 내 모든 것을 빼앗았잖아.”

16558464242694.jpg“……내가?”

노에비안은 이제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우뚝 서서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아드리엔의 드레스룸에 가득 채워져 있던 드레스 중 하나를 꺼내 입고, 아드리엔이 좋아하던 머리를 한 나는 그저 머리 검은 아드리엔 그 자체였다.

16558464242676.jpg“……말해봐, 노에비안.”

16558464242694.jpg“뭐 하자는 거지……?”

허공에 흐르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비현실적이었다.

16558464242676.jpg“왜 나를 배신했어?”

16558464242694.jpg“배신? 지금 배신을 한 게 누구…….”

습관처럼 대답하던 노에비안의 얼굴이 쩍, 갈라지듯 표정이 바뀌더니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16558464242694.jpg“블리에?”

16558464242676.jpg“……내가 아직도 블리에로 보이나 봐.”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내가 서서히 바닥으로 발을 디뎠다.

16558464242694.jpg“블리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16558464242694.jpg“블리에.”

16558464242676.jpg“약을 한 것 같진 않은데. 그럼 이게 환각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지.”

아드리엔이 아끼던 부채, 아드리엔이 꼭 입어보고 싶어 하던 드레스, 아드리엔의 걸음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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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에비안의 동공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16558464242676.jpg“말해봐, 노아.”

노아. 그 누구도 노에비안 트로비카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오로지 아드리엔 트로비카만이 그리 속삭였다. 노아. 사랑하는 나의 노아. 나의 바다. 나의 전부.

16558464242676.jpg“왜 나를 죽였어?”

지저분한 욕망으로 가득 찼던 노에비안의 눈이 단번에 절망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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